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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11.실크로드를 개척했던 고구려 유민 출신의 세계적인 명장 고선지(高仙芝)

회기로 2010. 1.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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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탁월한 능력만으로 중국 당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이 된 전설적인 명장이다. 그는 망국(亡國) 고구려(高句麗)의 유민이라는 차별대우 속에서도 출중한 지략과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여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위대한 장수(將帥)였다. 따라서 그는 비록 당나라에서 태어나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지만,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피를 물려받은 고구려인이었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였다. 고선지가 억울하게 죽은 까닭의 하나도 다름 아니라 당나라에 적대했던 이민족, 특히 고구려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모함을 받아 원통하게 처형되었지만 사서(史書)가 전하는 그의 훌륭한 인품과 '유럽 문명의 아버지'로도 평가받고 있는 위대한 업적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고선지는 고구려가 망한 지 30년이 지난 서기 695년, 또는 700년 무렵에 당나라에서 태어났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등도 그의 활약상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의 사망 시기만 나올 뿐, 그가 정확하게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먼저 고선지에 관한 초기의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의 앞부분을 보자.

'고선지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계(舍鷄)다. 처음에는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했는데 공(功)을 쌓아 사진장군(四鎭將軍), 제위장군(諸衛將軍)이 되었다. 그는 외모가 사나이답고 건장할 뿐 아니라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 또한 용감한데다가 과단성도 뛰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 안서(安西)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공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다.

고선지는 나이 20여세가 되어 장군에 제수되어 아버지와 벼슬이 같게 되었다. 그러나 절도사 전인완(田仁豌)과 개가운(蓋嘉運) 밑에 있을 때에는 큰 벼슬을 하지 못했다. 뒤어 부몽영찰(夫蒙靈察)이 여러차례 발탁하여 파격적 승진을 거듭했다. 개원(開元) 말기에 안서도호부, 사진도병마사가 되었다.'

◆ 고구려 왕가의 후예로 당에서 태어나

이 기록을 분석해보면 고선지는 고구려의 후예지만 고구려가 아니라 당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당나라가 고구려의 유민들을 산동성과 영주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670년에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통치하려고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소인 평양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676년에는 안동도호부를 보다 중국 내륙 쪽에 가까운 요동으로 이전했다.

또 677년에 당(唐)이 조선군왕(朝鮮群王)으로 봉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寶臧王)이 말갈족(靺鞨族)까지 규합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펼치자 이에 겁을 먹고 고구려 유민들을 더 먼 하남과 농우(감숙성)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강제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이 사서에는 2만 8천 200호라고 전하니, 이는 약 15만~20만명에 이르는 인구였다.

그리고 고선지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해가 중국의 사서들은 모두 755년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당시 그의 나이가 55세 정도로 본다면 700년 무렵에 60세쯤으로 본다면, 695년 무렵에 태어났다고 추측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고선지의 출신 성분을 살펴본다. 그의 성(姓)은 고구려 왕족과 같은 고씨(高氏)요, 그의 아버지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무인이었다. 또한 부모 모두 고구려 사람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고선지가 고구려 왕족의 후예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본래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당나라에 끌려온 포로였으나 실력이 뛰어난 무인으로서 하서군에서 당나라를 침범하는 서강족(西羌族)을 막다가 실크로드의 서쪽 끝 지역, 오늘의 신강성 고차현인 안서도호부(安石都護府)로 재배치되었다. 당시 안서도호부의 치소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며 천산북로의 갈림길인 고창에서 천산남로의 관문인 고차로 옮겨져 있었고, 당나라의 주둔군은 3만 병력이었다.

고선지는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20세 전후에 유격장군으로 전격 발탁된 듯하다. 그리고 736년부터 741년 사이, 즉 개가운과 전인완이 절도사로 있을 때에 그들의 밑에서 전공(戰功)을 세웠고, 741년 말에 부몽영찰이 현재 신강성 지역 등을 다스리는 안서도호부사 겸 사진도병마사로 부임한 이후 발탁되어 군인으로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한 것으로 추정된다.

◆ 20세 전후에 탁월한 전공으로 입신양명

고선지의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기록인 구당서(舊唐書) 봉상청전(奉常淸傳)은 이렇게 전한다.

'개원(開元) 말에 달해부락이 당에 반란을 일으켜 그 세력이 흑산에서 북쪽으로 향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서쪽의 쇄엽까지 미치자 현종(玄宗)은 부몽영찰에게 이들을 쳐서 무찌르도록 조서를 내렸다. 부몽영찰은 고선지에게 기병 2천을 거느리고 부성(副城)에 가서 북방의 능령 기슭까지 출정토록 했는데, 이때 적을 격파했다. 그런데 달해가 너무 멀리 왔기에 인마가 모두 지쳐 있었으므로 고선지는 이들 (달해부의) 병사를 모두 죽이고 말도 모두 빼앗았다.'

달해부는 천산산맥 서쪽 끝자락에 있던 투르크족의 한 부족이 세운 소국이었고, 봉상청은 당시 고선지 장군의 심복이며 참모였다. 봉상청은 영리하고 과단성 있는 재사(才士)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인은 아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외할아버지가 키웠는데,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어 박식하고 글 솜씨도 좋았지만 마른 체구에 애꾸눈에다 절름발이라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장수로 출세하기에는 여러 모로 조건이 나빴다. 그런 까닭에 나이 30세가 넘도록 아무 벼슬도 못하다가 고선지 장군의 명성과 인품을 사모하여 그의 수하에 들어가기를 간청했다. 고선지가 이를 거절하자 봉상청은 수십 일을 두고 고선지의 집 문 앞에서 밤낮으로 애걸하니 마침내 고선지가 허락하여 자신의 수하로 삼았다. 이후 봉상청은 고선지의 막하에서 조정에 올리는 보고서 작성을 도맡았다.

◆ 당황(唐皇) 현종(玄宗)의 명에 따라 토번 정벌에 나서

730년에 당(唐)과 토번(吐蕃) 사이에 체결되었던 평화조약이 깨지고, 토번이 당을 제치고 서역 여러 나라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자 그 동안 중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당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동서교역의 지배권 확보를 위한 경쟁에서 토번에게 밀리게 되자 당은 토번을 무력(武力)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747년에 현종(玄宗)은 안서도호부에 토번을 정벌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이에 따라 고선지는 보병과 기병 1만명을 이끌고 출전했다. 이에 앞서 736년부터 741년까지는 개가운(蓋嘉運)이, 741년부터 그 이듬해까지는 전인완(田仁豌)이, 742년부터 747년까지는 부몽영찰(夫蒙靈察)이 사진절도사로 있으면서 토번과 싸웠으나 모두 이기지 못했으므로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임명, 서역원정군을 파견했던 것이다.

고선지가 인솔한 1만 병력은 일종의 특수부대요, 결사대였다. 그런 까닭에 기병뿐만 아니라 보병도 모두 말을 가지고 있었다.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1만명의 원정군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의 험로를 넘어 기적 같은 100일간의 강행군을 감행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차를 출발, 15일 뒤에 발환성에 다다랐고, 다시 10일 뒤에 악비덕을 지났으며, 다시 10일간의 행군 끝에 오늘의 카슈가르인 소륵에 이르렀다. 그리고 20일 뒤에는 총령수착을 지나고, 또 20일 뒤에는 파미르 고원의 최고지점을 통과하여 파밀천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20일의 강행군을 하여 특륵만천을 건너 파미르 고원의 남단이며 오늘의 타자키스탄의 영토인 오식닉국(五識匿國)에 이르렀으니, 100일 동안 3000리에 이르는 험로를 돌파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연운보(連雲堡) 공략전(攻略戰)에 돌입했다. 중국의 서쪽 끝과 파키스탄 사이 파미르 고원 남단부에 위치한 연운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토이지만, 고선지 장군의 원정 당시에는 토번의 서북방의 지키는 요새로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고선지는 전열을 정비한 뒤 원정군을 세개의 부대로 나누어 진격명령을 내렸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아마도 부친인 고사계로부터 배운 고구려식 전법인 것으로 추측된다.

군사를 세개의 부대로 나누어 각각 다른 길로 진격하도록 한 것은 세개의 보급로를 확보하여 좀더 안전하게 공격지점에서 합류하기 위함이었다. 분산 진격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고선지는 불과 2시간 동안의 치열한 교전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가파른 산성인 연운보를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고선지의 군사들은 적병 5천명을 죽이고 1천명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1천필의 군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기와 군량, 의복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 연운보전투(連雲堡戰鬪) 승리에 이어 소발률국(小勃律國) 정복 위업(偉業)

고선지 장군은 연운보를 점령한 뒤 다시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길기트) 원정을 단행했다. 이 원정은 해발 4천 6백 94미터나 되는 험준한 탄구령(坦駒嶺)을 타넘어야 하는 고행과도 같은 강행군이었다. 이 원정 또한 용장했던 고구려 무인의 피를 이어받은 고선지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 무서운 투지와 과단성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 연운보전투(連雲堡戰鬪) 승리와 소발률국(小勃律國) 원정 성공에 힘입어 당나라는 그동안 토번에게 빼앗겼던 서역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동서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원정의 성공에 따라 고선지의 역사적 위상이 당나라의 장수에서 세계사적인 인물로 격상되었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오웬 스타인도 고선지 장군이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을 원정한 일을 가리켜,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보다도 더욱 위대한 전술적 모험이었다."고 찬탄했다. 그는 고선지 장군의 원정로를 답사한 뒤 이렇게 기록했다.

'고선지는 힘든 전투와 행군으로 지친 3천명의 군사와 더 이상 진격을 반대하는 고위관리 몇명을 남겨 연운보를 지키도록 했다. 고선지는 나머지 병사와 더불어 진군을 계속, 3일이 지나서 힌두쿠시 산맥 정상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부터 아래로 40리가 넘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버티고 있었다. 고선지는 그의 군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물결이 흐르듯 진군시키며 3일간 계곡을 내려간 뒤 고도로 계산된 심리전을 펼쳐 아노월성호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선지는 부하 장수인 석원경(席元慶)과 하루여윤(賀婁餘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동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엄한 군율만이 아니라 뜨거운 형제애와 동지애를 바탕으호 부하들을 통솔한 탁월한 장수였음을 일러준다.

그는 토번의 대규모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유일한 통로인 다리를 끊고 진격하여 토번과 서방 여러 나라와의 통로를 차단한 뒤 소발률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3천 병력을 소발률국에 주둔시키니, 이로써 당나라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이 재개되었다. 또한 소발률국의 항복에 따라 인접국인 카슈미르와 가불이 당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당서(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은 다소 과장된 면도 있지만 당시 그의 전공(戰功)을 이렇게 기록했다.

'고선지의 토번 정벌이 성공을 거두자 볼름(乶凜), 대식(大食) 등 서방 72개국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당(唐)에 항복해 왔다.'

볼름은 오늘의 시리아, 대식국(大食國)은 당시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 제국이다.

◆ 시기와 모함, 차별대우 받고서도 절도사로 승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고선지(高仙芝)는 소발률국의 국왕과 왕비를 포로로 이끌고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개선했다. 현종(玄宗)은 조서(詔書)를 내려 소발률국의 이름을 귀인(歸仁)으로 고쳐 귀인군으로 만들고 군사 1000명으로 하여금 진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남의 공로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다. 고선지가 소발률국을 정복하고 하서로 개선하자 하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察)이 그의 전공(戰功)을 시기하여 죽을 고생 끝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고선지를 패전지장(敗戰之將)으로 몰아 호되게 추궁했다. 요는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고 조정에 바로 상주했다는 것이었다. 고선지는 일정한 지역을 맡아 방어하는 절도사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관할구역이 따로 없이 옮겨다니며 전투를 치르는 행영병마절도사였으니, 부몽영찰의 추궁은 오로지 시기심에서 비롯된 생트집에 불과했다.

부몽영찰은 전에는 고선지의 상관이었으며,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여러번 승진할 수 있도록 뒤를 밀어준 적도 있었는데, 정작 고선지가 큰 공훈(功勳)을 세워 자신보다 벼슬이 높아지게 되자 말끝마다 '고구려 노예 놈' 이니 '개 창자를 씹을 놈' 이니 하는 욕설을 퍼부으며 고선지의 전공을 깎아내리고 모욕했던 것이다. 저 자신도 한족(漢族)이 아닌 서강족(西羌族) 출신으로 중국인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종족의 혈통이란 사실을 잊고 그렇게 미쳐 날뛰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만 두고 보더라도 고선지는 비록 당나라에서 태어나 당나라 장수로서 전공(戰功)을 세웠지만 어디까지나 망국(亡國) 고구려(高句麗)의 유민이기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신들의 변방사(邊方史)로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歷史歪曲)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모순인지 자명하다고 하겠다.

결국 고선지의 전공은 그의 원정군에 감군(監軍) 자격으로 종군했던 환관 변영성(邊令誠)이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상주하여 모든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고, 이에 따라 현종은 고선지에게 홍로경(鴻盧卿) 어사중승(御史中丞)의 벼슬을 내리는 한편, 부몽영찰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고선지를 안서사진절도사로 삼았다. 때는 서기 747년 12월이었다.

현종은 또 고선지의 전공을 치하하여 장안의 저택 두 채도 상으로 내렸다. 고선지가 맡은 안서사진절도사는 휘하 병력이 2만 4천명으로 당나라 서쪽 끝 지역의 군사, 행정의 총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이로써 고선지는 망국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멸시와 차별대우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당 제국 군대의 최고 사령관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인 고선지를 음해하고 모함하는 소인배들의 작태는 멈출 줄을 몰랐다. 구당서(舊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은 그의 부하 장수였던 장군 정천리(程千里)와 대장군 필사침(畢思琛) 등이 그를 모함할 때 고선지가 그들을 다룬 일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고선지가 절도사를 맡게 된 뒤 정천리에게 말하기를, "너의 얼굴은 사나이답게 생겼으나 마음 쓰는 것은 꼭 어리석은 계집 같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물었다. 또 필사침에게 말하기를, "오랑캐 놈이 감히 나를 만나러 왔구나! 그래, 성동(城東)의 종자장 1000석을 네놈에게 주려는데 생각이 있느냐?" 하고 물었다. 필사침이 고선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중승(中丞)께서 저의 어려운 사정을 아시고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고선지가 "나는 지금 네가 권세를 부릴까봐 염려하는 거다. 어찌 널 가엾게 여겨 재물을 주겠느냐? 만약 내가 이렇게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너희가 오히려 걱정하지 않겠느냐? 이젠 할 말을 다 했으니 속이 후련하구나!"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왕도(王滔), 강희순(姜憘順), 진봉충(陳奉忠) 등을 불러들여 매질하고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이로부터 군대 내에서 심리적 두려움이 사라졌다.'

◆ 실크로드 장악한 실질적 중앙아시아 총독

고선지가 안서절도사로 재임할 무렵은 당(唐) 제국의 전성기였고, 당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고선지는 실질적인 중앙아시아의 총독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749년에 또 한차례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 지역의 지배권 탈환을 시도하는 토번(吐蕃)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로써 당은 타림분지 전역, 천산산맥 북쪽에서 아랄해 동쪽, 파미르고원의 아프가니스탄 지역 동쪽, 인도 북부 카슈미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공로를 높이 산 현종은 고선지에게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란 벼슬을, 고선지의 아들에게는 5품관 벼슬을 특별히 내렸다. 그런데 고선지의 부인과 아들의 역사기록에 전해지지 않는 것은 매우 아쉽다.

고선지는 749년부터 750년 사이에 다시 한번 천산산맥을 넘어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을 정벌하고 국왕과 왕비와 왕자와 공주를 포로로 잡아 개선했다. 이번 원정은 서방에서 급성장하여 강성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라센 제국에 맞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 앞뒤 분별없이 석국의 국왕을 처형하는 바람에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이에 분개하여 당나라를 응징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였다. 어쨌든 이번 전공(戰功)으로 고선지에게는 또 다시 개부의동삼사에 어사대부 벼슬이 추가되었다. 고선지는 자신이 받은 상을 아낌없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최초, 최대의 동서 문명전쟁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그리고 반년 뒤인 751년 7월 말에 역사적인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다. 이는 고선지가 거느린 당나라 군사들과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세계 최초, 최대의 동서양 문명간의 전쟁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 전투의 전말을 이렇게 전한다.

'고선지에 의해 석국왕이 포로가 되었을 때 요행히 도망쳐 나온 석국의 왕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고선지가 기만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사실에 대해 호소했다. 그러자 여러 나라가 한결같이 분노하여 대식(大食)의 군대와 함께 사진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고선지는 번(番), 한(漢)의 무리 3만을 거느리고 대식 공격에 나섰다. 그의 군대는 7백여리나 깊숙이 들어가 탈라스 긍라사성에 이르러서 대식군과 마주쳤다. 서로 닷새 동안을 대치했는데, 이때 갈라록 부중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이용해 대식군이 당군을 양면에서 공격하니 고선지가 크게 패했다. 이때 고선지의 사졸들은 거의 다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살아남은 자는 수천에 불과했다.'

그런데 구당서(舊唐書)에는 이때 고선지의 군사가 3만이 아닌 2만으로, 또 다른 사서에는 6~7만명으로 서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아랍 측 사료에 따르면 그 전쟁에서 중국군 5만명을 죽이고 2만명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이를 분석해보면 고선지의 군사는 3만명 정도이고, 각지에서 전투 지원을 위해 이끌고 간 인원이 또 3만명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대 제일의 명장 고선지의 패인(敗因)은 무엇이었을까? 자치통감 등이 밝힌 것처럼 첫째는 돌궐계의 케르륵 부족인 갈라록의 반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고, 둘째는 고선지의 예측보다 사라센군의 기동력이 훨씬 뛰어나 당군이 미처 전열을 정비할 사이도 없이 협공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랍 연합군을 이끈 총사령관은 지하드 이븐 살리히라고 알려졌다.

◆ 탈라스 전투 패배로 중앙아시아 영향력 상실

이 전쟁에서 고선지의 당군이 결정적 패배를 함으로써 당나라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되었고, 따라서 이 지역은 그 뒤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아랍 지역으로 글려간 당나라 군인 일부에 의해 제지술과 화약 제작기술이 서양으?? 전파되어 이후 서양 문명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탈라스 전투와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제지술은 사마르칸트, 바그다드, 다마스쿠스를 거쳐 독일로 전해졌다. 바그다드에는 794년에 제지공장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고, 독일에서는 500년쯤 뒤인 1456년에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서양사 최초로 인쇄술을 개발해 처음으로 성서를 찍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종교가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전파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패전(敗戰)의 책임을 지고 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 직책에서 물러나고 752년에는 그의 후임으로 봉상청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당황(唐皇) 현종(玄宗)은 무슨 까닭으로 고선지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두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종은 양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정사(政事)를 제대로 볼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안녹산(安祿山)의 반란까지 당하기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그동안 고선지가 세운 전공이 크고, 또 그가 그동안 가져다 바친 서역의 호화로운 사치품들이 양귀비의 환심을 샀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런 까닭에 그의 후임으로 고선지의 심복이었던 봉상청을 임명했는지도 모른다.

4년이 지난 755년, 고선지는 밀운군공(密雲郡公)으로 봉해진다. 밀운군은 현재 북경 북쪽지역인데, 전에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곳 가운데 하나였다. 이어서 그해 11월에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선지는 토벌군 부원수로 재기용된다. 당시의 사정을 구당서(舊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11월에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날 현종은 경조목(京兆牧) 영왕(榮王) 완(琓)을 토적원수로 삼고 고선지를 부원수로 임명했다. 고선지에게는 매우 빠른 기병과 활을 가진 기병이 있었다. 그는 삭방, 하서, 농우에서 명령받고 경사(京師)로 올라오는 병마를 수습하는 한편, 관보(官湺) 5만여명을 모집한 뒤에 봉상청의 뒤를 이어 동관으로 나가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어사배두를 겸직하게 했다.'

토벌군 원수 영왕은 현종의 여섯번째 아들이고, 실전에는 나가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인 토벌군 원수는 고선지였던 셈이다. 이에 앞서 봉상청이 반란군을 막지 못했기에 당대의 명장 고선지의 능력이 다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종은 이번에도 고선지의 군대에 환관 변영성을 감군으로 파견했다.

◆ 반란군과의 전투를 준비하던 중에 모함당해

12월 13일에 반란군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고 수도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고선지는 섬주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동관으로 후퇴했다. 이는 제1선에서 안녹산의 반란군을 막으려던 봉상청이 패퇴했으므로 장안을 방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인 동관을 적군에게 빼앗기지 않고 선점하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이 결과적으로는 고선지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또한 중요한 군사적 결정은 감군과 상의해야 하는데 고선지는 변영성과 상의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위세를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그의 모함을 자초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선지는 섬주에서 동관으로 후퇴하며 주요 보급기지를 적군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창고를 열어 돈과 비단과 식량 등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남는 것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것이 또한 그의 죄목을 더욱 무겁게 한 이유가 되었다.

현종은 퇴각한 책임을 물어 봉상청을 파직했는데, 고선지는 동관을 공격해온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런데 그 사이에 환관 변영성이 황제에게 고선지를 음해, 모함했다. 이에 노한 현종은 반란군이 눈앞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탓인지 고선지와 봉상청을 모두 斬首刑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당서(新唐書) 고선지전(高仙芝傳)은 고선지와 봉상청의 최후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황제가 대노하여 변영성(邊令誠)에게 곧 군중(軍中)에서 베어 죽이게 했다. 변영성은 봉상청을 베어 죽여 시체를 거친 대자리에 싸서 버렸다. 고선지가 다른 곳에서 도착하자 변영성은 도수(刀手) 100명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지시한 뒤 고선지에게 말하기를, "대부(大夫)에게도 역시 황명이 있다."고 했다.

.....고선지가 이내 급히 내려가 말하기를, "내가 후퇴한 것은 죄를 지은 것이니 그 때문에 죽는다면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보고 창고의 식량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모함이다."라고 하고, 다시 변영성에게 이르기를, "위로 하늘이 있고, 아래로 당이 있고, 삼군(三軍)이 모두 여기 있는데, 어찌 임금께서는 이 일을 모르시는가?" 했다.

또 휘하의 사졸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모집했던 처음 의도는 적을 쳐부수고 나서 큰 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이 순간에도 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동관을 고수하고 있게 되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너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너희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원통하다고 외쳐라!"라고 하자, 군중에서 모두가 "원통하다!"고 크게 외쳤는데 그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고선지가 봉상청의 시체를 보고, "그대는 내가 발탁했고, 또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그대와 더불어 죽으니 이는 모두 운명이 아니랴!"하면서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 장병들의 함성 속에 의연하게 죽음 맞아

그렇게 해서 고구려인의 기개를 세계에 떨친 일세의 명장 고선지는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변영성이 봉상청의 경우와는 달리 유독 고선지를 죽이기 위해서 100명이나 되는 도수(刀手)를 거느리고 온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대장부 중의 대장부 고선지의 빛나는 전공(戰功)과 위명(威名), 군심(軍心)을 휘어잡은 감화력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선지와 봉상청을 처형한 뒤에 현종은 어떻게 되었는가? 동관이 함락되자 현종은 총애하는 양귀비와 환관 고역사(高力士)를 데리고 장안을 탈출하여 피난길을 재촉했다가 병사들의 위협에 못 이겨 애첩 양귀비를 죽이고, 마침내 아들에게 양위까지 하게 된다.

고선지는 노예와 마찬가지 신분이었던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탁월한 지략과 담력으로 최고 사령관에 올랐다. 또한 세계의 지붕을 넘어 서역 원정에 성공하고, 동서 문명간의 교류를 이끌어냄으로써 세계사를 바꾼 명장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당나라의 무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고구려인이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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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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