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獨立運動) 군사단체(軍事團體)의 지도자로서 무장(武裝) 항일투쟁(抗日鬪爭)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 장군은 광복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 독립의 일념으로 산 참된 군인이었다. 1888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한 장군은 대형(大亨)이라는 아명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8세 때에 어린 지청천이 일본인에게 30전자리 동전을 받자 자기 힘으로 벌지 않고 얻은 돈은 떳떳지 못하며 더욱이 나라를 침범하는 천박한 일본인의 돈은 받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을 만큼 곧은 성품의 어머니 밑에서 지청천 장군은 나라의 동양(棟樑)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서당을 거쳐 재종숙이 지석영(池錫英) 선생의 영향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황성기독청년회(皇城基督靑年會 : YMCA의 前身) 등에 관련하면서 지청천 장군은 점차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토론회에서 "우리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총이다."고 토로했던 혈기방장한 지청천 장군은 결국 1904년 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일찍이 자신의 행로를 잡아갔다.
그러나 1907년 일본 제국주의의 실권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힘의 부족을 절감한 장군은 훗날 더욱 조직적인 항쟁을 기약하며 신문물을 배운 것을 결심하고 관비(官費)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서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를 거쳐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청도 전투(靑島戰鬪)에 참전하여 실전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실전 경험은 이후 항일 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을 치르면서 백분 활용할 수 있었으니 일제에게 그대로 갚은 꼴이 되었다.
1919년에 이르러 그동안 억눌렸던 한민족의 울분이 3.1 만세운동의 함성으로 일시에 폭발하자 장군도 드디어 기다리던 반일항쟁(反日抗爭)의 전선에 나섰다.
그 해에 일본군 부대 기지를 탈영, 만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까지 사용하던 석교(錫奎)라는 이름도 버리고 새로이 이청천(李靑天)이라고 개명하였으니 이때가 장군의 일생에는 둘도 없는 전환기였다.
봉천성에는 이미 1910년대부터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모여 경학사(耕學社), 부민단(扶民團)을 거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도 설립,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마침 독립군 양성을 위해 근대적 군사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던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로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청천 장군의 합류가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청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교 성대장(敎成隊長)을 거쳐 교장을 맡아 항일투쟁(抗日鬪爭)의 간성이 될 독립군 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전선이 공고해질수록 일제의 탄압도 극심해져 갔다. 일제는 1920년 독립군 토벌을 위해 대규모 부대를 파견, 동삼성에 불법 침략하여 독립군을 압살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 정규군 15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서일(徐一)과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1920년 10월에 6일 동안 벌어진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제21사단의 협공을 격퇴, 적병 3000여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축을 이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였던 지청천 장군은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홍범도 장군의 부대와 합세,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軍勢)를 통합하였다. 이어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 수행을 위해 군단을 인솔하여 일본군 추격병들과 여러차례 접전을 펼치면서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군 전 부대를 다시 고려혁명군단(高麗革命軍團)으로 개편하는 한편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君官學敎)를 설립, 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항일 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요에 의한 소련 정부의 배신으로 인해 독립군은 소련군과 혈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장군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강력한 항의로 형집행 일보직전에 석방되는 등 망국군(亡國軍)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다시 동삼성으로 돌아온 장군은 이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등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의 강화에 힘쓰다가 1924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義勇軍)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국내진격작전을 지휘, 일경(日警) 주재소를 습격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7월에는 동삼성 길림에서 홍진(洪震), 신숙(申肅)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산하에 별도로 한국 독립군을 편성, 총사령관이 되어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누비며 무력항쟁(武力抗爭)을 계속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중국 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도발하자, 지청천 장군은 중국 측과 연합전선(聯合戰線)을 형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한국 독립군의 전 병력을 고봉림(考鳳林) 등이 이끄는 중국 의용군과 합쳐 한,중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이때부터 연합군은 지청천 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滿洲國) 붕괴를 목적으로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32년 8월, 한국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쌍성보(雙城堡)를 공격하여 일본군과 한치의 양보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그러나 11월에는 공군력(空軍力)을 동원한 일본, 만주국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쌍성보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박호(鏡泊湖)에서 만주군 순회유격대를 격파한 한국, 중국 연합군은 1933년 4월 사도하자 전투(四道河子戰鬪)에서 일본군 1개 사단 병력을 궤멸시켰으며, 6월 동경성 전투(東京城戰鬪)에서는 옛 발해 유적을 도굴하던 일본군 병사 15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7월의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는 일본군 이즈카[飯塚] 부대를 매복작전으로 섬멸하여 박격포 5문, 소총 1500자루, 군복 3000벌 등을 노획하는 대승(大勝)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전리품의 분배 문제로 한국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 간에 불화가 생겨 향후 한,중 연합작전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한국 독립군이 동녕 전투(東寧戰鬪)에서 지원병력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던 중국 의용군 군단장 오의성(吳義成)의 배신으로 2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패배를 당했으며, 지청천 장군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 간부 대부분이 중국 의용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감금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여 김구(金九) 선생의 주선에 의해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의 교관으로 다시금 항일투쟁(抗日鬪爭)의 전위에 나설 독립군의 양성에 노력을 경주했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결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장군의 진면목은 역시 독립군을 지휘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최전선에서 무력항쟁(武力抗爭)을 전개하는 데에서 찾아진다.
더욱이 1937년 일제가 다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도발하자 무장 군사력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지청천 장군은 임시정부에 합류, 국무위원과 한국 독립당의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항일 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의 구심체로 엮어내는 데 힘쓰는 한편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되었다.
광복군(光復軍)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외에도 대적선전(對敵宣傳),포로심문,선전전단 작성,암호문 해독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약을 벌였다.
8.15 광복은 결코 우연도 행운도 아니었다. 이렇듯 좌절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립으로의 열망을 실천해간 유명 무명의 수많은 선열들이 이룩한 당연한 결과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 민족은 한시도 일제에 대한 항쟁(抗爭)을 쉬지 않았고 지청천 장군은 바로 그 투쟁의 선두요 최선선에서 민족의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그러나 광복을 이룬 조국의 앞길도 평탄하지만은 않아 남한에 지주한 미군의 반대로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여야 했고 장군은 1946년 4월 28일 피와 땀과 고난의 힘으로 이룩한 독립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 할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으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결성, 조국 재건에 힘쓰다가 1957년 1월 15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운명하기까지도 바로 서지 못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해 간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지청천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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