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일본 국왕 마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가 탄 마차 행렬이 사쿠라다문[櫻田門]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길 옆에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와 일왕(日王)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의 뒷편에 떨어져 폭음을 내며 폭발하였다. 일장기를 든 기수(旗手)와 근위병이 탄 군마(軍馬) 두 필이 거꾸러졌다. 일본 국왕을 폭살시키려 했던 그 청년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단원 이봉창(李奉昌)이었다.
일왕(日王) 암살미수의거(暗殺未遂義擧)의 주인공 이봉창은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원래 수원이었지만, 철로 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 지주에게 빼앗기고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소년시절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그리고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이후 6년여 동안 나고야 등지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며 어려운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나이 삼십대에 접어들었을 때, 이봉창은 일본인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반도에서나 일본 열도에서나 조선인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민족적 의분을 느껴야 했다.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뼈저린 굴욕감을 느끼기도 했던 그는 반일(反日)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가담할 생각으로 1931년 1월 상해로 갔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민단사무소 직원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왕(日王)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다지듯이 몰아 부쳤다. 일본 국왕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그를 임시정부에서는 믿지 않았다. 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해 수상히 여긴 것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민단사무소 직원들을 시켜 이봉창을 은밀히 떠보도록 했다. 어느 술자리에서 이봉창은 "작년에 동경(東京)에서 일왕(日王)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났藥?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라며, 자신이 일본 국왕을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또 다시 꺼냈다.
사람을 시켜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직접 이봉창을 찾아갔다. 김구를 만난 그는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투쟁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고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당시 임시정부는 좀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의열투쟁(義列鬪爭)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일본 국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운동에 몸바치겠다는 이봉창의 말은 김구를 감복시켰다. 그의 진심을 확인한 김구는 그를 동지로 맞이하였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하였고, 마침내 일본 국왕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키로 하였다.
모든 준비는 김구가 맡았다. 김구는 미주지역 동포들이 보내온 자금을 가지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인 유치(劉峙)를 통해 폭탄 하나를 더 마련하였다. 하나는 일본 국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봉창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자금과 폭탄, 모든 준비는 끝났다. 1931년 12월 13일에 이봉창은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봉창은 "나는 참된 적성(赤星)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
이봉창의 큰 거사를 위한 송별회가 열렸다. 이봉창을 사지(死地)로 떠나보내는 김구는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구를 위로한 것은 오히려 이봉창이었다.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며 자신이 먼저 웃는 표정을 지었다.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할 때도 그는 양손에 폭탄을 들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1931년 12월 17일, 이봉창은 도쿄로 향했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일본 국왕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 새해 1월 8일 일본 국왕이 동경 교외에 있는 대대목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봉창은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김구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고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 이봉창(李奉昌)은 일본 국왕이 돌아오는 길목인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국왕의 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봉창은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힘껏 던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봉창이 던진 폭탄은 빗나가 일본 국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폭발하였다. 굉음을 내며 터지긴 했지만 그 위력은 일본 국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그의 회고록 '대륙의 분노'에서 군중과 일본 국왕의 거리가 100m 정도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 폭탄의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비록 일본 국왕을 폭살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이 의거(義擧)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1931년 9월 일본에게 만주를 빼앗긴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동경발 기사로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대서 특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동경에서 일본 국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적중하지 못하였다.'라는 기사를 실어 일본 국왕 암살에 실패한 점을 매우 애석해 하였다. 이 보도는 일본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1932년 1월 상해를 침공하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켰다.
일본 군국주의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더욱이 일본 군국주의가 신성시하는 일본 국왕에 대한 저격이었다는 점에서 이봉창(李奉昌)의 항일의거(抗日義擧)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3개월 정도 지난 4월 29일에는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가 이어지면서 한민족(韓民族)의 강인한 독립의지와 투혼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다. 동시에 침체의 늪을 헤매고 있던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주도해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봉창 의사는 나머지 폭탄을 사용할 겨룰도 없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10월 10일 서곡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해방 후 임시정부 주석으로 환국한 김구는 일본에 있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봉환, 효창공원에 모셨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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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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