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전쟁영웅(戰爭英雄)과 성인군자(聖人君子)는 살아서도 명예가 있지만 의사(義士)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을 의사(義士)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 소재 윤봉길 의사 기념관 뜨락에 세운 윤봉길 숭모비(尹奉吉崇慕碑)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벌어진 윤봉길의 반일의거(反日義擧)는 한국 민족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당위성을 높인 통쾌한 독립전쟁(獨立戰爭)의 한 장면이었다. 세계 언론들은 이 사건을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때 국민당 정부를 이끌던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중국의 1백만 대군이 못한 일을 나라도 없는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으니, (우리 중국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1988년 상해 공산당이 간행한 상해인민혁명사화책(上海人民革命史話冊)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봉길 의사를 크게 소개하고 있다.
그와 같이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는 누구에게나 뜨거운 독립운동의 쾌거로 기억되고 있다.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施梁)에서 태어나 농촌 청년으로 자라며 수암청년회(修岩靑年會), 부흥야학당(復興夜學堂) 등을 만들어 농민계몽운동(農民啓蒙運動)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농민이 우매하기 대문에 우리가 못 사는 줄 알고 농민계몽운동을 펴 왔는데, 알고 보니 그 왜인(倭 人)들 때문에 못 사니 이 불효자식 갈 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어머니 전상서를 올리고, 23세 때인 1930년에 해외로 떠났다. 그의 책상에는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 폭이 놓여 있었다. 이 처연한 글귀에는 당시 국권을 회복하는데 힘쓰겠다고 일어섰던 젊은 애국지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1945년 한국 광복은 이처럼 자신의 생명을 던진 선열들의 순국정신과 희생의 대가였음을 알아야 한다. 광복절을 비롯한 국경일에 행하는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이 단순한 절차로만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선열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순국정신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중국 청도에 당도한 윤봉길은 세탁부로 취직했다.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계몽운동을 하느라고 빌린 돈을 갚고 나서 상해로 갔다. 그때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난 것이다.
중,일 양군의 총성(銃聲)을 '민족과 민족이 충돌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마량로(馬粮路) 보경리 4호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만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이봉창(李奉昌),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을 일본과 민주로 파견하여 거사(擧事)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데 대한 임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즉 만주사변 후 반일한중연합작전(反日韓中聯合作戰)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는 이봉창을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로 파견하여 일본 국왕 마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를 폭살하도록 하는 한편, 유상근과 최흥식으로 하여금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에서 항일전(抗日戰)을 펼치는 한,중 연합군을 지원하는 작전으로 중요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만주 확보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 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뒤집어 응징했는데 그 현장이 상해의 홍구공원인 것이다.
상해사변(上海事變)은 일본군의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전투가 끝날 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해승전(上海勝戰) 기념 행사를 열어 대대적인 군사적 시위를 벌이고자 획책하였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러시아의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 대관식을 펼쳤던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타국의 영토에서 '대일본제국 만세'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오만방자한 행사를 벌인 것이다.
여기에 한국 청년 윤봉길이 일본 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잠입한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열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返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 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쯤 되었을 때에 윤봉길이 쏜살같이 뛰쳐나가 지니고 있던 도시락을 던졌다. 중국군의 병공창(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 있던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어느 소련 기자가 촬영한 현장필름을 보니 일본뿐 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시라카와 대장은 목숨을 잃었고 일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보병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일본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은 각각 눈과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왼쪽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된 시게마쓰[重光葵]는 13년 후인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패전(敗戰)이 확정되자 일본의 외무상(外務相)으로서 미국 군함인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활동하던 재중교포 김학철(金學鐵)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했다. 거사 직후 체포된 윤봉길(尹奉吉)은 5월 25일 상해파견군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민족의 갈 길을 밝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의 청년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정부는 1962년에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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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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