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흥(崔時興)이 이끄는 무장 단체인 천마산대(天摩山隊)에 입대하여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펼쳤던 양세봉(梁世奉)은 1930년대 독립군의 항전을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남만주로 망명하여 한중합작(韓中合作)을 추진, 항일전(抗日戰)을 벌이다가 순국하기까지 13~14년에 걸치는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무력 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최전선인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독립군의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이끌던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1931년 만주를 무력(武力) 침공한 일제가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우자,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반 만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 군사단체의 대부분은 항일 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근거지를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만주를 지키며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갔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벽해(碧海) 양세봉(梁世奉) 장군이었다.
양서봉(梁瑞鳳)이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었던 그는 1986년 평안북도 칠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별로 전하는 바가 없으며, 부친에 대한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모친의 이름이 김아계(金阿桂)였다는 사실과 어려서 마을의 서당에서 기초 수준의 한문을 배웠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나마 16세 되던 해인 191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장남이었던 그는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으며 일제(日帝)의 조선 농민들에 대한 미곡 생산량 수탈로 생활고에 시달려 가족들을 이끌고 중국 요녕성 흥경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만주 이주민들의 생활이 그렇듯이 그도 역시 소작농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국 땅에서의 생활고와 망국의 설움들은 순박한 청년 양세봉이 민족과 독립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3.1 반일시위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3.1 운동의 물결이 만주로 파급되자, 그는 남만주 흥경현에서 반일시위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순국하기까지 13~14년에 걸치는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항일투쟁의 최전선인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독립군의 연전연승(連戰連勝) 신화를 만들어갔다.
1922년 여름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지방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양세봉은 같은해 겨울 최시흥(崔時興)이 이끄는 천마산대(天摩山隊)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무력 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을 전개하게 된다. 천마산대는 3.1 운동 직후 평안북도 의주의 천마산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군사단체로 평안북도 일대를 무대로 일제의 행정기관 파괴, 친일파 처단, 일본군 헌병대 기지 습격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이 무렵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였다. 양세봉은 천마산대의 대원으로서 국내로 진입하여 평안북도 창성군 대유동의 경찰서와 영림창 등 일제의 기관을 기습해서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23년 봄 무렵에 천마산대(天摩山隊)가 서간도의 유하현으로 이동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하게 되자, 그는 광복군총영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광복군총영이 참의부(參議府)로 통합하게 되자, 그는 1924년 6월 참의부의 소대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 강계, 위원 등지에 진입하여 일본 군경과 교전하면서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같은해 말에는 참의부 의용군 제3중대장의 직책을 맡아 남만주 화전현 일대의 교민 보호와 친일파 숙청에 앞장섰다. 그리고 1926년 11월에는 남만주의 정의부(正義府) 소속 항일 의용군 제1중대장이 되어 남만주와 국내의 평안도를 넘나들며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이렇듯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전투부대를 이끌며 무장투쟁에 앞장서는 한편,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26년을 전후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의 기치 아래 유일당 촉성운동을 전개하는데 만주에서는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이때 그는 정의부의 대표 자격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가하였다. 1928년에 이르러 삼부 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은 한층 성숙되어 갔는데, 여러 차례의 회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부 통합운동은 당초의 목표대로 유일당을 건설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런 가운데 부분적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정의부를 주축으로 국민부(國民府)가 새롭게 발족하게 되었고,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산하 독립군으로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창건되면서 양세봉(梁世奉)은 부사령관의 중책을 맡았다. 당시 조선혁명군의 주요 활동은 일제 침략자들에게 협조하는 친일파들이 만든 선민부(鮮民府)라는 기관과 민족반역자 처단, 국민부 의무금 징수와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 등이었다. 양세봉은 특히 친일주구배 집단인 선민부를 응징하는데 주력해 선민부를 와해시킬 정도의 성과를 올리면서 그의 명성을 드날렸다.
조선혁명군은 창건 초기에 정치 사상적 이념의 대립으로 적지않게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민족 독립을 절대 목표로 앞세운 채 이념적 차이와 갈등을 극복해 갔다. 양세봉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어느 이념에도 편향된 사고를 갖지 않았다. 오로지 그는 민족 독립을 위한 길에만 매진할 뿐이었다. 민족 독립을 위한 길이라면 이념의 벽도 넘어서서 사회주의와도 힘을 합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가 만주국이 건립된 이후에도 만주에 남아 이념을 달리하는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도 연합작전을 모색했던 것은 그러한 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2년 1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총사령관으로 승진한 양세봉(梁世奉)은 3월 중국 동북에서 봉기한 중국 의용군과 합세하여 요령민중자위단(遼寧民衆自衛團)이라는 연합군을 구성하고 부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이때 한,중 연합군의 병력은 2천여명에 달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국인은 8백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해 10월까지 7개월 남짓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2백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
그 전투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양세봉은 전투 때마다 한,중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하였고,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면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자세와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유격작전(遊擊作戰)으로 곳곳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격퇴시켰다. 그 가운데서도 1932년 3월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 4월 신빈현전투(新賓縣戰鬪), 9월 청원현전투(淸原縣戰鬪), 무순진공작전(撫順進攻作戰) 등은 양세봉 장군의 명성을 크게 높이는 승전(勝戰)이었다. 특히 5월에 벌어진 여섯 차례의 교전에서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적병 3백여명을 살상하고 5백여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다대한 전과를 기록했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잇달아 격파하며 대승을 거둔 조선혁명군은 흩어진 전열을 가다듬어 총사령부를 환인, 흥경, 집안, 통화 등의 경계지점에 설치한 뒤 산하에 5개로(個路) 사령부를 거느리는 정예부대로 개편하였다. 또한 통화 강변에 속성군관학교(速成軍官學校)를 설립하고, 양세봉 자신이 교장을 맡아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피땀어린 전과를 올리는 가운데 조선혁명군의 전력도 소진해갔다. 전투 때마다 희생자가 나오고 무기와 탄환도 떨어져 갔으며,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을 완전히 소탕하려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포위망에 갇혀 압박을 받는 형세 아래 조선혁명군은 외로운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다. 조선혁명군 병사들의 생활이란 산간마다 토굴을 파고 오늘은 이 산간에서 내일은 저 산간으로 옮겨 다니는 고군분투(孤軍奮鬪)의 나날들이었다.
1933년 2월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포위망이 점점 조여드는 가운데 조선혁명군은 중국인 무장 단체인 요령구국회(遼寧救國會)와 한중합작(韓中合作)을 이루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갔다. 그런데 미처 조직이 정비되기도 전인 5월 일본의 관동군 사령부가 1만여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폭격기까지 사용하는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 한,중 연합군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같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양세봉(梁世奉)의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지칠줄 모르고 전개되었다. 휘하 병사 4백여명을 거느리고 관전현과 흥경현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기습 공격하는 한편,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는 등 남만주 지역의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이끌었다.
독립군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던 양세봉은 1934년 9월 19일 남만주 태립자구(太粒子溝)에서 일본군의 밀정 노릇을 하는 중국인에게 속아 일본군의 습격을 받기에 이르렀고,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던 중 적군의 흉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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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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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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