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4년 2월 3일에는 일제(日帝)에 의한 민족수난기에 미주(美州) 한인(韓人)이 '애국관'이라고 불렸던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거리 368번지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회관 앞거리 작은 공터에서 '도산 안창호 스퀘어'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마침 국내 흥사단이 그곳 태평양연구소와 공동으로 도산을 중심으로 하는 미주 한인의 민족운동에 관한 국제학술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이어서 이 행사를 미주 한인의 조국애를 포상하는 경축전으로 개최하였던 것이다.
해외에서 유명 한국인의 이름을 따 거리명, 혹은 광장명을 붙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나, 전례를 든다면 전세계에 두 군데가 더 있다. 그 하나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옛 수도 크즐오르다시에 있는 삼수갑산의 백두산 산록과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에서 대한제국 말기 의병과 이를 이은 일제치하 항일 독립군의 명장으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운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그것이다. 그가 만년을 보낸 크즐오르다의 스뎁나냐 거리에 있는 옛집을 기념관으로 만들고, 그 알 도로를 '홍범도 거리'로 명명하여 그 유례를 적은 안내판을 부착해 놓았다. 다른 하나는 연해주의 수도 하바로스크 시내 마르크스 거리에 연접해 있는 '김유찬 거리'를 들 수 있다. 김유찬(金流贊)은 소비에트혁명 때 한국 출신 빨치산대장으로 용전(勇戰)의 전적을 올린 인물로 소개된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대한제국 시기와 그를 이은 일제 식민지 지배 시대에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을 선도한 여러 인물 중에서도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민족계몽운동(民族啓蒙運動)의 선각자요,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실천자이다.
도산은 일제 침략을 예고하는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체결 2년 후인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도롱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전통 학문의 길인 한학(漢學)을 배웠다. 1894년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과 청일전쟁(淸日戰爭) 등으로 격동과 혼란을 겪은 후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상경, 언더우드 목사가 학장으로 있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조교로 임용되었고 기독교에도 입교하였다. 20세가 되던 1897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참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이와 전후하여 3년 동안 경기, 황해, 평안도를 순회하며 정열적인 계몽연설을 하였다. 특히 평양 쾌재정에서 행한 연설은 그의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한 명연설로 칭송되었다. 그후 1899년 강서군 동진면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워 육영사업을 시작하였고 또한 황무지 개간사업도 추진하였다.
청운의 뜻을 품은 도산은 24세가 되던 1902년에 이혜련과 결혼하고 그해 11월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태평양 관문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품을 팔면서 학교에 입학,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제쳐두고 1903년 9월 상항친목회를 조직, 지도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그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을 맡아 그곳 한국인사회에 처음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세계적 미항이며 미국의 태평양 진출의 관문이자, 동야인이 그때 '상항'이라 부르던 샌프란시스코는 한국인들에게는 하와이에 이어 미주 본토에 진출하는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여기에 공립협회(共立協會)를 건립,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왔다가 미주 본토로 진출하기 위하여 계속 바다를 건너오는 한국인이나 혹은 중국 등을 거쳐 유학을 목적으로 직접 도미하는 청년들을 적극 받아들여 애국애족(愛國愛族)을 최고 이념으로 서로의 어려움을 도우며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공립협회는 그 헌장에서 "밖으로 세계 만방과 공립하고 안으로 빈부귀천(貧富貴賤)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서로 공립하여 동종(同種) 상보(相保)하는 것이다."라고 밝혔으며 회의 목적은 '충의(忠義) 상면(相勉)'하는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았다.
공립협회가 추진하던 중요사업의 하나는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발행이었다. 공립신보는 본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보도하여 그 불법성을 규탄하는 한편, 한국인의 시급한 당면 문제로 근대 교육의 보급과 산업진흥, 그리고 당시 독립운동의 사조(思嘲)였던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구현하기 위한 독립전쟁의 준비 등을 내다보고 이를 강조하는 기사와 논설을 집중 게재함으로써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도산은 조국의 명운이 임박하던 1907년 4월 국내에 돌아와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강(李剛), 전덕기(全德基),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는 핵심역할을 수행하였고, 나라가 망하던 1910년까지 온 정성을 다하여 그를 통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펼쳤다. 1908년에는 평양에 도자기 회사와 대성학교를, 긔고 서울, 평양, 대구 등지에는 태극서관을 설립하고,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조직, 지도함으로써 장래에 필요한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4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길에 오른 도산은 유동열, 신채호(申采浩), 이강 등의 신민회 동지들과 일단 중국 청도에 모여 청도회담을 열어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그해 9월경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그곳에 먼저 가 활동하던 이강, 김성무(金聖武), 정재관(鄭在寬), 이갑(李甲)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1911년 3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도산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고 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동참하기 위하여 상해에 갈 때까지 8년 동안 30대의 모든 정열을 다 바쳐 재미한인(在美韓人) 사회를 기반으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흥사단(興士團) 활동을 통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08년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공립협회가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 국민회로 발전하고 다시 1909년 2월 장경(張經)이 주도하던 대동보국회도 국민회에 통합되어 명실공히 미주 한인사회의 대통합을 이룩한 민족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부상한 결사단체이다. 대한인국민회는 이강과 정재관의 주도로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국 지방총회까지 성립됨으로써 동서양으로 뻗친 해외 한인사회가 하나의 조직으로 결속되는 계기마저 마련되었다.
도산은 지체하지 않고 이와 같이 발전하던 4개 지역의 지방총회를 총괄해서 지도, 운영하는 기능을 가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성립시키고 총회장에 선임되어 조국 광복을 위한 전 해외동포의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행, 항일민족언론을 주도한 것이다. 한편 대한인국민회의 여러 활동을 통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신장시키며 국내외 한인사회에 민족주의 신장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도산은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하나같이 귀중하게 여기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도산이 독립운동의 완전무결한 준비를 뜻하는 '민족대업의 기초'로서 가장 소중하고 보다 성실하게 추진시킨 사업이 1913년에 8도 대표를 뽑아 조국 광복을 위한 인재 양성기관으로 결성한 흥사단이었다. 그러므로 흥사단 단원은 누구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단체적 수련을 통하여 '무실(務實) 역행(力行)과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정신'으로 덕성을 함양하고 신체를 단련하여 기력을 튼튼하게 하고 전문지식 또는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건전한 인격을 기르게 하였다. 나아가 자주적 정신과 대공의식(大公意識)을 고양, 광복한 새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품격을 함양하게 하였다.
도산은 42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고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온 민족의 염원을 안고 성립되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급히 서둘러 상해로 가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로 취임, 창립 초의 다사다난하던 임시정부를 주도하여 전후 27년에 걸친 임시정부 활동의 기반을 굳혔다. 1924년에는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고, 그와 전후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모범촌 건설사업에 수년 동안 노력하였다. 또한 1926년부터는 상호 분산 대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고자 한인(韓人)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 동북지방을 순회하면서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을 전개하던 중 1927년 일제(日帝)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 직후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그는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과 대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월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가출옥되어 요양하던 중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던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을 빌미로 다시 투옥되었다. 이듬해 중병으로 출감, 대학병원에 입원 요양하였으나 1938년 6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해방 후 서울 강남에는 그의 공적을 기려 도산공원이 조성되었고, 일제치하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던 유해를 옮겨와 유택(幽宅)을 마련함으로써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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