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은 만주 무장 독립군의 지휘관으로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승리로 이끌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신음하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안겨준 인물이다. 비폭력 평화적 저항이었던 3.1 운동이 일제의 무력(武力) 탄압으로 실패하자 해외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무장력을 통해 일제의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투쟁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겼던 사람들이 바로 이범윤(李範允),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등이었다. 특히 김좌진이 총지휘한 독립군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군사 1600여명, 소총 1300여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등의 전력을 갖추고 북만주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정예부대였다.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향산리에서 김형규(金衡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좌진의 집안은 당시 명문 거족의 집으로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여 2천여석의 재산과 많은 노비를 거느린 충청남도 굴지의 부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탕 영민하였고 기골이 장대하여 남보다 뛰어난 체질을 가졌다. 그래서 병정 놀이를 즐겨했으며 그대마다 지휘관 노릇을 도맡아 하였고 행동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비범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하면서 일본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목도한 김좌진은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사학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마검법(騎馬劍法), 총격술(銃擊術)을 연마하고 병법(兵法) 연구에도 열중하였다.
또 그는 근대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부리는 노복을 해방시키고 노비 문서를 태워 없애는가 하면 자신의 토지를 소작하는 소작인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주기까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추진함으로써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기에 들어서서 김좌진은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헌신하기로 하고 먼저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서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는 자신의 가옥을 개조하여 사립학교인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애국심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육과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대한협회(大韓協會) 홍성지회를 설치하였고, 이와 더불어 호서교육회가 기호흥학회 지회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에 앞장섰다.
1908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긴 김좌진은 한성신보 이사로 언론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의병부대와의 연락 업무를 위하여 이찬양행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국외와의 연락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세웠다.
1910년 경술병합(庚戌倂合)으로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더 이상 국내의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김좌진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만주지방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기로 하고 서울 시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에게 탐지됨으로써 1911년 김좌진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반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홍성헌병대에 체포되어 10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비밀 결사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결성되었는데, 채기중(蔡基中)이 경북 풍기에서 조직한 광복단(光復團)과 박상진(朴尙鎭)이 대구에서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주요 인사가 결합한 것이었다. 이 단체에 가입한 김좌진은 이석대(李奭大)의 뒤를 이어 부단장을 맡았다가 1917년에 단장인 박상진의 명령으로 만주 모란강 지역에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군관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박상진을 비롯한 대한광복회의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자 군자금 모금활동은 중지되었고 군관학교 설립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좌진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김교헌(金敎獻), 김동삼(金東三), 이동휘(李東輝),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안창호(安昌浩) 등과 더불어 민족대표 39인의 일원으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김좌진은 일제를 몰아내는 길은 무력투쟁(武力鬪爭)뿐이라는 판단 아래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에 입단하였고, 그후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입하여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준비하였다. 이어서 1919년 10월에 대한정의단을 개편 확대하여 대한임시군정부(大韓臨時軍政府)를 수립하고 자체 무장병력을 편성하여 마침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독립군을 창건하게 되었다.
서일(徐一)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金佐鎭)이 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이장녕(李章寧)이 참모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북로군정서 부대는 한국 또는 중국에서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들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연해주에서 총기(銃器), 탄약(彈藥), 군화(軍靴) 등을 구입하여 무장함으로써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중 최강의 전력을 갖추었다.
또한 자체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해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北路軍政署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6개월 과정의 군사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수많은 독립군 지휘관을 배출하였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가 김좌진의 주도하에 만반의 항전준비를 갖추어가고 있을 때 일제는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여 약 2만 5천여명의 대병력을 만주에 출병시켰다. 이때 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자기의 영토 내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을 꺼려하여 독립군 수뇌부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강권하였다.
이리하여 1800여명의 인원과 180여대의 수송차량으로 4백여리를 강행군하여 화룡현 삼도구로 들어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의군부(義軍府), 국민회(國民會), 한민회(韓民會), 신민단(新民團), 의민단(義民團) 등의 무장 단체가 연합해서 결성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과 합동작전(合同作戰)을 펼치기로 합의하고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원래 독립군 지도자들간 회의에서는 아군의 열배나 되는 일본군과 교전하는 것은 승패(勝敗)를 떠나 독립군 측에도 피해가 많을 것은 자명한 일이며 현재는 중국의 영토인 만주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중국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므로 지금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것이 좋겠다는 피전책(避戰策)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를 포위한 일본군이 독립군의 흔적을 찾아 끈질기게 추격해오자 마침내 피전책(避戰策)을 버리고 정면 승부를 벌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김좌진(金佐鎭)이 총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사단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과 힘을 합쳐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운평(白雲坪), 완루구(完樓溝), 천수평(泉水坪), 어랑촌(漁郞村) 등지에서 10회의 교전을 펼쳐 아즈마 마사히코[東正彦] 소장(少將)이 이끄는 일본군 지대(支隊) 5천여명을 격퇴,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항일(抗日) 독립전쟁사(獨立戰爭史)에서 가장 빛나는 승전(勝戰)인 청산리대결전(淸山里大決戰)이다.
청산리대결전(淸山里大決戰)에서 대승을 거둔 김좌진의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비롯해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신민단(新民團), 의군부(義軍府),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여러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였고 김좌진은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3천 5백여명이었는데, 곧 소련 땅 이만으로 이동하여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그후 약소민족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소련 적군(赤軍)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흑하지방의 자유시로 이동했던 대한독립군단은 소련의 배신행위로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었으며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만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김좌진도 부하들을 거느리고 북만주에 돌아왔으며 다시 부대를 정비하여 1925년에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다시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준비하였다. 그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계속 만주에 머무르며 한중합작(韓中合作)을 통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추진하였다.
1927년 민족 유일당 촉성운동을 전개하여 분산된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키던 김좌진은 1929년에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여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30년 1월 영안현(永安縣)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에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소속 단원인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하였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의 독립운동 방향은 어디까지나 무력투쟁(武力鬪爭)에 있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력(武力) 수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하여 임시정부 참여 요청도 거부하고 최후까지 만주에 머물며 군사활동을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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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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