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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9.만주의 독립운동 기반 형성에 큰 공훈(功勳)을 세운 이상룡(李相龍)

회기로 2010. 1. 2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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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만주 지역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해서 동포들의 교육, 자치에 많은 투자를 했고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한민족(韓民族)의 저력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시도하였으나 일제가 만주국을 세워 실패로 돌아갔다.

185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승목(李承穆)의 맏아들로 태어난 이상룡은 14세 때에 사서(四書)와 모든 경서(經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리고 1876년부터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에 몰두하기 전까지는 주로 임청각(臨淸閣)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1896년 박경종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진지를 구축하고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시도했으며, 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年) 등의 의병부대를 지원하기도 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식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유인식(柳寅植), 김동삼(金東三) 등과 더불어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을 전개하여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봄 의병항쟁과의 관련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일시 구속되었으나 그를 지지하는 시위대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6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여기에서 매월 2회씩 시국강연을 개최하여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합으로 협회도 해산되었다.

1910년 11월 황만영(黃萬英), 주진수(朱鎭洙) 등으로부터 신민회(新民會)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듣고,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한 후 1911년 2월 서간도 회인현 항도천에 도착, 심택진의 집에서 김대락 등과 함께 약 2개월간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사(韓滿關係史)를 연구, 집필하였다.

4월에는 봉천성 유하현으로 이동하고 대고산(大孤山)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반일(反日)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의 방략과 진로를 설명하면서 이를 추진하기 위한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경학사장으로서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병농제를 실시하여 동포들에게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게 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무력(武力)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912년에 이상룡은 경학사를 발전시켜 간도 교민들의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은 부민단의 가구를 정비, 강화하기 위하여 경학사를 해체하고, 소재지를 유하현 추가가에서 90여리 떨어진 통하현의 합니하(蛤尼河)로 옮기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함께 이동하여 제2의 새 기지를 정하였다. 부민단의 두번째 단장으로 추대된 그는 자치, 교육 등 광복사업을 꾸준히 수행하여 나갔다.

부서 조직에 있어서는 중앙부에 서무, 법무, 검무, 학무, 재무 등을 두었으며, 단장과 각 부서 주임 관할하에 지방, 구, 패로 나누어 주민을 능률적으로 관할하였다. 따라서 부민단은 이러한 네 단계의 조직을 통하여 통화현, 임강현, 유하현, 해룡현, 몽구현 등 각 현에 산재해있는 동포들을 결속하고 계몽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을 귀자(鬼子)로 호칭하고, 이 귀자와 교통 연락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으며, 모든 민사 관계의 일도 이를 심리 판결하여 처리하는 등 이주 동포들의 자치기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13년 5월 요령성 의회에서 재만한인(在滿韓人)의 토지소유전매조차금지안(土地所有轉賣租借禁止案)이 가결되자 유하현 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중화민국 국회에 건의서를 보내 재만한인이 당면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귀화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자세 등에 대하여 재만한인에게 호소하는 경고남만주교거동포(警告南滿洲僑居同胞)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4년 존화양이변(尊華洋夷辨)을 발표하여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했고,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17년 길림성 총독과 재만한인(在滿韓人)의 권익 확보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에서 김교헌(金敎獻), 이동녕(李東寧), 서일(徐一) 등 39명의 민족 지도자와 더불어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1919년 3.1 운동 뒤 그는 부민단(扶民團)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동단합(大同團合)의 자치단체로 유하현 삼원보에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 한족회는 곧 부민단의 모체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한족회의 재정부담으로 임시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5월에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여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 단체를 이끌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자, 해외 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 만주의 비무력(非武力) 독립운동 단체 및 무력(武力)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20년 이래 일제의 만주지역에 대한 출병과 경신참변(庚申慘變) 등이 일어났으나, 그는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액목현에 이전하여 민병제(民兵制)에 의한 주경야병의 훈련을 계속하였다. 이때 그는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산재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으 통합을 시도하여, 1921년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하여 관전현 삼도항에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 서간도 일대의 반일단체와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그해 4월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상해, 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개최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산하에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같은해 가을에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중대장 채찬(蔡燦), 소대장 김유권(金劉勸)을 삼원보에 파견하여 일제의 주무기관을 습격, 파괴하도록 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지휘하였다.

1924년 10월에 정의부(正義府)가 발족되자 독판(督辦; governor)에 선출되었으며,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이에 그는 임시정부의 내분을 막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9월 24일에 국무령 취임식을 거행하고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김좌진(金佐鎭) 등 중진급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였으나, 그중 대부분이 사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으로 임시정부의 내분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쇠퇴한 몸으로 허영에 몸을 굽히는 것은 사뭇 평소의 기대에 어그러지는데, 그래도 한번 움직인 것은 오직 각파를 서로 조절하고 통합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이것이 이미 희망이 없으니 어찌하여 지체하겠는가."라며 탄식하고, 국무령을 사임하고 서간도 반석현 호란하로 돌아왔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정의부의 김동삼(金東三), 현정경(玄正卿), 지청천(池靑天) 등을 대표로 참의부(參議府)와 신민부(新民府)의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 지역을 장악한 일제가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5월에 길림성 서란 소성자에서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역에서 영면하였다. 그는 아들에게 "외세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늙은 사람이 죽을 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 뿐이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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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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