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조선 민족 대표가 일본 정부와 협의하여 평화롭게 목적을 수행하려 한다. 만일 불행하게 일본 정부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까지라도 계속하여 그 운동 목적을 수행할 것이다."
"나는 조선도 민족자결의 취지로써 독립이 될 희망을 가지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그 취지를 건의하고, 한편 대사를 선언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밖으로 기독교 측에서도 그런 계획이 있어 쌍방의 의사가 합치되어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1919년 3.1항일시위운동(三一抗日示威運動)을 준비, 추진하였던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천도교계의 대표자이다. 위의 증언 내용은 손병희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받은 심문조서 중 3.1운동의 목적과 방법, 그 이념 등을 소신있게 답변한 것으로써 그의 독립운동정신(獨立運動精神)은 물론 3.1운동이 지향하였던 사상과 방향을 잘 보여준다. 이같은 독립운동정신 속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새로운 세계질서와 사조 속에서 평화적인 독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염원인 조국독립을 성취하겠다는 독립운동가들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1861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손두홍의 서자로 태어난 손병희는 집이 가난하여 일정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였고 풍모는 곰처럼 딱 벌어진 체격과 호랑이상을 한 과묵, 진중한 성품을 지녔다. 자라면서 적서차별의 사회적 모순을 뼈아프게 느꼈고, 또한 부패한 관리들의 농민 수탈 현상과 차별받는 삶 등에 반항하였다. 젊은 시절, 일정한 직업없이 시장을 배회하면서 주로 못된 양반들에게 모욕을 주고, 죄없이 박해받는 약한 사람을 구해주는 등 의로운 일을 한 일화들이 많다.
12세 때 그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공금 40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러 가는 도중에 얼러 죽게 된 행려 병자를 보고는 그 공금으로 구해준 일이 있었다. 또 한번은 숙정이라는 약수터를 양반들이 혼자 차지하고 세력없는 백성들은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물터에 들어가 맑은 물을 퍼서 백성들에게 주고 흐린 물을 양반들에게 끼얹었다. 그러나 그 양반들도 그가 누구인 줄을 아는 터이라 아무 소리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의식은 평등사회 실현을 위한 사회개혁 의식으로 성장, 연결되었다.
손병희는 7세 위인 장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22세에 처음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백성을 널리 구제하고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동학의 창교정신이 바로 자신이 추구하였던 평소의 인간평등의 생활철학을 펼쳐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는 입도 후 그때까지의 낭인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자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입도 2년만에 제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을 대면하고 그와 함께 익산 사자암, 공주 가섭사에서 각기 49일 기도를, 그리고 진천 방도에서 37일 기도를 함께 하면서 해월의 계명들을 충신히 지키고 수도생활에 힘써 크게 신임을 얻었다. 1893년 동학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내세우며 혹세무민죄로 억울하게 처형된 창시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는데 손병희도 적극 참가, 지도하였다.
국정이 쇠퇴하고 관기가 부패 문란하여 농민을 핍박한다고 해서 일어난 1894년의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에 그는 적극 가담하였다. 갑오농민항쟁은 경제적 침략세력인 일본과 서양이라는 외세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포악한 정치를 제거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자는 대의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농민군의 강한 기세는 관군의 연전연패(連戰連敗)로 이어져 마침내 남도 일대는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농민군에 의해 점거되었다.
이때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국내로 군대를 보냈고, 일본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동학인을 몰살할 기세를 보였다. 당시 한 부대의 통령으로 임명된 손병희는 농민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전봉준의 군대와 합류해서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다가 대패하였다. 그는 살아남은 동학인을 모아 교주인 해월을 호위하면서 관동과 서해지방을 전전하는 피신생활을 하면서 지하 포교활동을 하였다.
1897년 해월은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에 손병희를 제3대 교주의 승계자로 지목하였다. 해월이 죽은 뒤 그는 계속하여 각지를 돌면서 지하 포교로 동학 재건에 힘쓰면서 교단을 재조직하였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탄압은 그치지 않았고, 국정은 날로 삐뚤어져 이를 통탄하여 1901년 새로이 큰 뜻을 품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선진 국제사회의 정황과 대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선편 등이 여의치 못하여 결국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변성명으로 숨어 지내다가 망명객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박영효(朴泳孝) 등과 교유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뒷날 천도교의 중진으로 함께 3.1운동을 추진한 민족지도자가 되었다.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목도한 손병희는 하루속히 국내 정치개혁과 산업, 교육의 진흥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포부로 부풀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유능한 청년들을 일본으로 초빙하여 유학하게 하고 장학금을 주었으며, 1904년에는 한국 의정대신과 법부대신 앞으로 정치를 개혁할 것을 건의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 당시 일본 안에서는 러시아와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때였으므로 이에 대비한 국내 정치사회의 쇄신을 의도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교도 이용구(李容九)로 하여금 동학인이 주도적 위치에서 개혁을 추진하게 하고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활동하게 하였다. 진보회의 조직과 활동은 국정개혁운동과 신생활운동으로서 천도교에서는 이를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진보회가 친일단체인 일진회(日進會)에 이끌려 활동하게 되자 일반사회에서는 진보회를 일본에 협력하는 단체로 간주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이용구 등 친일인사를 동학교단에서 축출하는 정풍운동(整風運動)에 착수하고 귀국에 앞서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1906년 1월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서둘러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천도교 교세 확장 기반을 확립한 그는 해월의 사위인 김연국(金演局)에게 대도주(大道主)의 직을 이양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스스로 공부하면서 실력연마에 힘쓰는 한편 귀국할때 사온 인쇄기로 보문사를 설립하여 민중을 일깨우는 인쇄사업과 교육사업에 힘썼다.
귀국 당시 그는 학교를 창설하여 직접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1909년부터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에 찬조금을 지급하다가 그뒤 직접 경영을 했다. 이같은 여성교육의 실천은 동학의 교리로서 주장되던 남녀평등사상의 실천운동을 손병희 자신이 솔선한 것이다. 또 1910년 12월에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이밖에 수많은 학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한편 경영에 약간의 분규가 있던 보문사를 새로 보성사에 합병하고 1910년 8월부터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창간, 계속 간행하였다. 이후 보성사는 민족문화의식을 개발하는 각종 잡지를 간행하여 민중생활의 혁신운동은 물론 민족적 자존의식을 높이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보성사는 3.1만세운동의 잊지 못할 산실이었다. 이곳에서 대한독립선언서 2만 1천부가 인쇄되어 경향 각지에 밀송, 거국적인 시위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의 횃불이었던 손병희는 1919년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권동진(權東鎭), 이승훈(李昇薰), 최성모(崔聖模), 한용운(韓龍雲) 등과 더불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본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검거된 후,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부인 주옥경과 천도교도들의 성심어린 간병을 받았지만 효험도 없이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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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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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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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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