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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60.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아버지 백범(白凡) 김구(金九)

회기로 2010. 1. 2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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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에 참가하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전권을 일임받았던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윤봉길(尹奉吉) 의거(義擧) 등 각종 항일공작(抗日工作)을 주도하였다. 또한 백범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2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때맞춰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했다. 30년에 이르는 임시정부의 긴 항일투쟁 역사는 조국 광복과 국권 회복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금세기 전반사는 곧 일제의 독점적 침략시대로서 주체적으로 이와 맞서 싸운 독립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이래 독립운동가들은 단절없이 일제와 현실적으로 교전을 하였던 것이다. 어떤 전쟁도 전투원과 비전투원으로 나누어지고 비전투원의 수가 더 많은 법이다. 흔히 말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전투원으로 볼 때 그들의 교전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국내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명멸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유독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물론 임시정부의 역할이 미비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가 그리 크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지만, 임시정부의 긴 역사 자체만으로도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는 물론 한국 근,현대사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 임시정부를 논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다. 그가 독립운동사에 차지하는 위치는 그만큼 확고부동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상징적 존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그는 15세 때에는 정문재(鄭文哉) 밑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 교문활동을 했다.

1894년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 일어나자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敬通:通文)에 호응하여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울분에 젖어 있던 중 1896년 2월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장교 쓰치다[土田壤亮] 중위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1897년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로 사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에 환속하였다. 1900년에는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하고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힘쓰다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 조약의 불법성을 주장하는 시위에 참석했으며, 1909년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1년 안명근(安明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14년에 가석방되었다.

◆ 임시정부의 중심 인물로 항일의거(抗日義擧)를 지휘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改組論)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의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 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시정부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시정부 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28년 그는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고, 이듬해 재중(材中) 거류민단장도 겸임하였다.

그 당시에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고 있었고, 임시정부의 활동도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김구는 침체기에 빠진 임시정부의 반일운동(反日運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1931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특수공작을 결행하기로 했다.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에 대한 전권을 일임받은 그는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일본 국왕 암살 미수 사건, 윤봉길(尹奉吉)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장 투탄(鬪彈) 사건 등을 계획, 실행하도록 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이 김구를 체포하기 위한 수사망을 펼치자 그는 상해를 탈출했다.

1933년 난징[南京] 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독립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대일(對日) 전투방책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 공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시정부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개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등 3당이 통합되자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제정·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있으며, 3·1 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이 좌우합작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金元鳳)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左右聯合戰線)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 가을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일제를 무력(武力)으로 타도할 계획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對日宣戰布告文)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 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대일(對日) 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李始榮)·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국 육군 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 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 남북통일을 위해 진력하다가 피살되다.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국 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귀국했다. 그뒤 전국을 순회하며 자유·평등·행복의 신한국을 역설하며 국가건설에의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로 결의되자 신탁통치반대운동(信託統治反對運動)을 주도했다. 이 중심체는 비상정치 준비위원회였다. 이 단체는 이승만의 독립촉성 중앙협의회와 합치기로 하고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였다.

1947년 2월 14일에는 제2차 비상국민회의 전국대회를 열고 독립촉성 국민회와 민족통일본부를 합칠 것을 결의하고 국민의회로 바꿨다. 이 시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삼천만동포에 경고함'이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진영의 재편성, 새로운 합작위원회의 구성, 신탁통치 반대, 미국 소련 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 자주 독립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다. 그는 즉시 독립을 열망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족자주와 반탁을 일치시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문제는 UN으로 넘겨졌다.

1947년 11월 UN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하며, 완전 자주독립 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UN 한국 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선거 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제의가 UN 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에 그는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미 2월13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천명한 바 있었다.

이승만(李承晩)과 한국민주당 계열이 선거를 주장하고 준비를 서두르자,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며 이들과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그는 1948년 4월 19일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일성과의 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국 소련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김구는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9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대 장교 안두희(安斗熙)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김구 암살에는 이승만(李承晩) 배후설, 김창룡(金昌龍) 지시설, 박정희(朴正熙) 가담설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아직가지 확실한 정황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헌신한 그의 공훈(功勳)을 높이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추서하였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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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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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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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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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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