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求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외적의 침범으로 나라와 겨레가 전란(戰亂)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마다 탁월한 통솔력과 빛나는 지혜를 발휘하여 적침(敵侵)을 물리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 낸 구국의 영웅은 많았지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하늘이 이 땅에 내려준 구세주였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인의(忠孝仁義)와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으로 일관한 민족의 사표였다.
전쟁터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서 전투를 벌였으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 전술로 연전연승(聯戰聯勝)을 거두었던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그는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란(戰亂)이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7년 동안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으로서 남해안 바다를 지키며 23회의 해상전투에서 전승무패(全勝無敗)의 전공(戰功)을 세우고, 신기(神氣)에 가까운 용병술(用兵術)로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한 전략가였다. 또한 조국에 대해서는 지극한 충성심으로 헌신했고 가정에서는 극진한 효성과 자애를 다했으며, 부하들에게는 너그러운 포용력으로 감싸주고 창의력을 길러주는 등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해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의 준장(准將)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해전사가(海戰史家) 발라드(G.A. Ballard) 장군은 "동양에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해전의 영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조선의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사령관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다.
● 32세에 무과 급제,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전전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덕수 이씨 가문의 선비 이정(李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순신의 조부였던 이백록(李百錄)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부친은 이 때문에 벼슬살이를 외면한 채 무명의 평범한 선비로 지냈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태어나고 자랄 무렵의 가세(家勢)는 매우 궁핍했다. 갈수록 형편이 곤궁해지자 부친은 현재 현충사(顯忠祠) 자리에 있던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의 처가로 낙향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3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생활했으니, 백암리야말로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20세 때에 상주 방씨 가문의 무관 방진(方震)의 딸을 아내로 맞아 혼인한 뒤 장인의 영향을 받아 무과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병서를 읽고 무술을 닦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28세 때에 무과시험에 응시했으나 기마술(騎馬術) 종목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낙방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576년 2월에 32세의 나이로 다시 무과에 응시, 합격한 그는 그해 12월 압록강 상류 국졍지대인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년 뒤 35세 때 훈련원 봉사로 전근되어 서울로 왔는데, 원래 말수가 적은 이순신으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인사 관계 업무에만 전념할 뿐 한눈파는 일이 없었다. 그때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徐益)이 자신의 친지 하나를 특진시키려고 했는데 이순신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뚜렷한 공로도 없이 서열을 무시한다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못 올라가고 나라의 법도에도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서익은 정5품의 계급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뜻을 관철하려 했으나 끝내 이순신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소문이 퍼지자 일부는 통쾌하게 여겼지만 일부는 서익의 앙심으로 이순신이 후환을 당할까 걱정했다.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은 이런 이순신의 사람됨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서녀를 소실로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권력자에게 붙어 출세하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면서 거절했다. 이렇게 성품이 강직하니 금력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 관계에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훈련원 봉사로 임관된 지 8개월만에 그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내색도 없이 부임해 맡은 일만 열심히 했고, 간혹 출장을 다녀올 때에도 남은 양식을 반납할 정도로 공사(公私)가 분명하고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다.
이순신은 1580년 36세 때에 전라좌수영 관내의 발포만호로 전근되었다. 수군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하려고 했지만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 탓에 끊임없이 소인배들의 중상과 모략을 당했다. 한번은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搏)이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객사 뜰 앞의 오동나무를 베어 보내라고 했을 때,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것이고 여러 해 길러온 것이므로 함부로 벨 수 없다." 면서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이처럼 옳지 못한 일은 참지 못한 울곧은 성품 때문에 열 차례 위기를 당하던 이순신은 1582년에 훈련원 봉사 시절의 상관이던 서익의 모함에 걸려 파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순신이 울곧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조정 안팎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당시 이조판서인 율곡(栗谷) 이이(李理)가 대사간 유성룡(柳成龍)을 통해 한번 만나자고 전해왔다. 율곡은 이순신과 동성동본(同姓同本)으로 나이는 3세 위였지만 항렬은 19촌 조카뻘이었다. 이순신은 이번에도 "나와 율곡은 집안간이니 못 만날 것도 없지만 그가 관서로 있는 한은 만나는 만나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면서 끝내 만나지 않았다.
그는 파직된 지 4개월 만인 그해 5월, 전에 근무하던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다. 종4품에서 종8품으로 형편없이 강등당한 셈이지만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맡은 일만 성실히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궁술(弓術) 연마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순신의 전통(箭桶)을 본 우의정 유전(柳塡)이 이를 탐내 달라고 했다. 이순신이 "이것을 드리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 일로 인해 대감과 제가 더러운 소리를 들을까 두렵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유전이 "그대 말이 옳다!" 고 탄복하면서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 두만강변 국경에서 여진족과 싸우다가 백의종군
그 이듬해 이순신은 함경도병마사의 군관을 거쳐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두만강가 건원보의 권관으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여진족 추장을 사로잡는 무공(武功)을 세웠지만 병마사 김우서(金禹瑞)의 시기로 아무 포상도 받지 못했고 벼슬도 올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달인 11월에 고향에서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고 아산으로 달려가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르었다.
42세 때에 종6품 사복시 주부로 복직했다가 16일만에 건원보와 가까운 조산보만호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조산보에서 좀 떨어진 두만강 가운데 녹둔도 둔전관도 겸하게 되었다. 병력은 부족한데 여진족이 수시로 쳐들어오고 해서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수차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그해 수확기에 수많은 여진족이 침범하여 약탈과 살인을 일삼자 이순신은 겨우 1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적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주민 60여명도 구해냈다. 하지만 이일은 이순신을 패장(敗將)으로 몰아 죽이려 했다. 이순신이 패전(敗戰)의 책임을 묻는 이일에게 이렇게 항변했다.
"이것이 어찌 패전(敗戰)이라고 하시오? 그리고 수차례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한 명도 보내준 적이 없었잖소? 그 공문 사본이 모두 여기 있으니 조정에서 알면 내게 죄가 있다고는 못하리다."
이일이 할 말이 없자 옥에 가둔 뒤 조정에는 적당히 보고했다. 결국 이순신에게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부당한 명령이 떨어졌다. 벼슬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그는 1589년 45세 때에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과 종5품 정읍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정읍현감 재임시 이순신은 노모를 비롯해 먼저 간 두 형의 자식, 즉 조카들까지 데려다가 부양했다. 이 일로 너무나 많은 식솔을 거느린다는 비난이 일자 그는 "내가 차라리 벼슬이 떨어지더라도 이 의지할 곳 없는 것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면서 결혼도 자기 자식들보다 먼저 시켜주는 등 따뜻이 보살펴주었다.
1590년 7월에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종 3품직인 고사리진첨사로 임명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되었고, 다시 1개월 뒤에는 만포진첨사로 임명되었으나 이것도 역시 사간원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진첨사로 임명되었으며, 임지로 부임하기 직전인 2월 13일 정3품 당상관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역시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쓴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의 강력한 천거가 있었다.
● 유성룡의 천거로 47세 때에 전라좌수사 임명
당시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었으며, 남해안 방어의 중책을 맡은 이순신은 다가올 전쟁을 예견하고 방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장차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을 것으로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왕 선조(宣祖)를 비롯하여 무능한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쓸모없는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하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내를 순시하고 전함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고 무기를 손질했다. 그리고 열심히 수군을 훈련시켰??.
특히 이순신은 침식을 잊고 일본의 군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특수 전투 돌격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의 부하 중에는 조선술(造船術)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나대용(羅大用)이란 군관이 있었다. 나대용은 이순신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거북선[龜船]을 설계, 건조하는데 힘써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직전에 완공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거북선과 더불어 이순신이 신경을 썼던 것은 해전에서 사용할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특히 당시까지는 해전에서 주병기로 사용하지 않던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차대전(次大箭), 대장군전(大將軍箭), 철환(鐵丸) 등 발사무기와 화약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일본의 태합(泰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 4월 14일에 20여만명의 군사와 7백여척의 군선을 파견하여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이순신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동안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허약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북진(北進)을 계속했다. 4월 17일에는 양산을 점령하고, 잇따라 언양, 김해, 경주, 창원 등지를 점령하며 계속 북진했다. 그 사이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거느린 1만여명의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 이순신의 뛰어난 지도력과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聯戰聯勝)
4월 17일에야 급보를 받은 조정에서는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던 신립을 내려보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도록 하고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삼아 군사들을 총지휘하게 했다. 하지만 조선 관군은 군대다운 군대의 모양조차 갖추지 못한 형편인지라 근 1백년 동안의 내전(內戰)을 통해 강병으로 변모한 일본군이 조총(鳥銃)이라는 신무기까지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당할 도리가 없었다.
순변사 이일(李鎰)은 상주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군사 8백여명을 잃고 패배하여 도주했으며, 도순변사 신립(申砬)도 충주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일본군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맞아 싸웠으나 전술 부재로 역시 패배, 전사하였다. 국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서울을 버리고 몰래 임진강을 건너 개성, 평양을 거쳐 국경인 의주까지 피난길을 재촉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함락시킨 것은 5월 2일, 다시 보름이 지난 그 달 13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으니 겨우 2개월 만에 거의 전 국토가 일본군의 발길에 무참하게 유린된 것이었다.
한편 수군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처음 일본군의 대선단을 발견한 가덕도첨사 전응린(田應麟)의 보고를 받은 박홍(朴泓)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통보하고 응전 태세를 갖추는 듯했으나 일본군의 세력이 너무나 강대하자 무기와 군량을 바다에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으며, 원균 또한 1백여척의 군선을 자침(自沈)시키고 1만여명의 군사를 해산시킨 뒤 겨우 소수의 군선을 이끌고 한산도 근처에 와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원균의 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檍祺)에게 통보하고 함께 출전하기로 했으나 그가 기일을 지키지 못하자 전라좌수영 함대만 이끌고 출동했다. 그날이 5월 4일이었다. 이튿날 판옥선(板屋船) 24척을 거느리고 당포에 이르렀으나 약속한 원균은 그 다음날 한산도 근해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가 거느린 군세(軍勢)란 판옥선 4척과 협선(狹船) 2척뿐이었다.
5월 7일에 거제도 남쪽 옥포에 적선들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함대를 지휘하여 옥포에 있는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에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거느린 30여척의 일본 군선 중에서 26척을 격침시키고 4천 5백여명의 일본 수군 병사를 살상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합포에서 적선 5척을 격침시키고 적진포에서는 적선 13척을 분쇄했는데, 아군의 손실은 부상자 2명뿐이었다. 이순신의 백전백승(百戰百勝)하는 탁월한 지휘능력이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29일에는 사천 앞바다에서 적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3천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이순신과 나대용이 부상을 입게 되었다. 6월 2일에는 당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선 30여척을 공격하여 21척을 쳐부수고 적병 4천여명을 섬멸했는데,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25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조선 수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전력이 증강된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은 당항포에 있던 일본 수군을 공격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으며 적장의 수급(首級)도 일곱 개나 베어 얻은 전과를 올렸다.
7월 8일에 이순신은 다시 원균, 이억기와 합세하여 군선 55척을 거느리고 견내량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선 76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으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대를 포위하고 무차별 포격으로 적선 59척을 격침시켰는데, 바로 한국 역사에 길이 빛날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었다. 9월 초에 벌어진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는 1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쳐부수었다. 이로써 남해안 동쪽 일부를 제외한 80% 이상의 재해권을 조선 수군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또한 서남해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를 장악하고 나아가 황해로 북상하여 중부 이북을 공략하려는 적군의 기도를 여지없이 무산시키는 전략적 승리를 뜻하기도 했다.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함대만 만나면 여지없이 대패한다는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침내 "조선 수군과 마주치면 싸우지 말고 도망쳐라." 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전국 각지에 대대적인 전함 건조를 지시했다. 해가 바뀌어 1593년 2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군선 8백여척으로 증강된 일본 수군을 약 1개월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해상전투 끝에 격멸시키니 일본 수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거제도 서쪽 해상에서는 적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15일에 이순신은 여수에서 부산포가 가까운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 전함과 무기를 새로 만드는 한편 군사들의 조련도 열심히 했다. 충청수사 정걸이 전함 수십 척을 거느리고 합류한 것도 이때였다.
● 조선 수군 총사령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8월 1일 군왕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발령은 8월 1일자였으나 명령을 받은 것은 10월 9일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 된 이순신은 지금가지 똑같은 계급이었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사들을 지휘 감독하여 작전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출중한 장수였던 이억기와 정걸 등은 평소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통솔력에 감복하던 바여서 충심으로 승진을 축하해주고 복종을 다짐했으나, 나이도 많고 군에서도 선배였던 원균은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원균의 불평과 독단적인 행동으로 군심(軍心)이 뒤숭숭해지자 이순신은 차라리 자신이 물러나겠다는 생각에서 직책을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나면 그 결과는 자멸뿐이란 것을 염려한 충정의 발로였다.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이순신과 원균의 문제를 논의한 결과 원균을 전출시키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다. 그는 충청병사를 거쳐 전라병사로 갔다가 뒷날 이순신이 모함에 결려 원통하고 억울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백의종군할 동안 그렇게 원하던 통제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문 것은 그해 7월부터 1597년 2월까지 3년 7개월간이었다. 원균의 후임 경상우수사로는 배설(裵楔)이 왔다.
그동안 육상의 전황은 어떠했던가. 개전 초 관군이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공격에 싸움다운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한 채 여지없이 패퇴를 거듭할 때 경상도에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가장 먼저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왜군을 물리친 데 이어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김덕령(金德齡), 김천일(金千鎰), 정문부(鄭文孚), 휴정(休靜), 유정(惟政) 등이 잇달아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동으로 싸우거나, 또는 단독작전을 감행하여 각지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또한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은 명(明)에서도 지원군을 보내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4만여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군과 연합작전(聯合作戰)을 펼쳐 평양을 수복했다.
한편 경상죄병사 박진(朴晉)은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화약 무기를 전투에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고 왜군을 서생포로 내쫓았으며,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도 6일간의 결사항전(決死抗戰)으로 왜군 3만여명의 공격을 막아내고 진주성을 사수하면서 순국했으며,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은 행주산성에서 군사 2500여명을 지휘하여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 3만여명을 격퇴시키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을 기록하기도 했다.
본래 일본군의 전략은 서울을 함락한 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안도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경도를 점령하고, 수군은 황해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 전역을 석권하는 것이었으나, 이순신의 함대가 연이어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의병들과 승군이 유격전(遊擊戰)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입혀 진로가 막히고 보급로마저 차단되면서 전황은 지리멸렬(支離滅裂),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교섭으로 전황은 교착상태
이때 명나라의 유격장군 심유경(沈維敬)이 조선으로 건너가 명군과 왜군 진영을 오가며 강화협상(講和協商)을 진행시켜 1593년 일단 일본군을 남쪽으로 철군시켰다. 그러나 이는 사기가 저하된 일본군에게 다시 힘을 길러주는 기회만 제공한 셈이 되었다. 조선 관군의 장수와 의병대장들은 분노했으나 독자적으로 일본군을 격퇴시킬 힘이 없었고, 무능한 조정에서 요청한 명군은 대국군(大國軍)이라는 자만심에서 조선의 대신돠 장병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왜군에 못지않게 잔악한 만행을 저지르는 형편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 통제영에서 군량을 마련하고 무기를 제작하고 전함을 건조하며 군사를 조련하는 등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를 전투에 대비하여 잠시도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으며 군율은 엄히 시행하되 부하가 전사하면 친자식을 잃은 듯 슬퍼하며 친히 장사지내니 군사들과 백성들 모두가 친부모를 따르듯 하였다. 이처럼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장병들과 함께 나라를 걱정하며 적군을 조선 당에서 완전히 몰아낼 방도만 궁리하던 이순신이었지만 또다시 악운이 찾아왔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던 1597년 초, 일본의 첩자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찾아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나쁜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책이라면서 , 본국에 돌아갔던 가토 기요마사가 아무 날 어디로 오는데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지키고 있다가 치면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한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의 간계였으나 병법에 대해 무지한 무능한 장수와 대신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김응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부산으로 잔격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적군의 간계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함대를 출동시키는 대신 우선 척후선을 보내 적군의 동태를 정찰토록 했다. 적군의 함정에 바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첫번째 계략에 실패한 일본군 수뇌부는 다시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이순신이 바다를 막지 않는 사이에 기요마사가 조선에 상륙했다."고 이간책을 썼다. 그런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온 것은 권율이 이순신에게 조정의 명령을 하달하기 이미 일주일 전이었다.
● 왜군의 간계에 넘어가 두번째 백의종군
당시 조정은 전란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음에도 동서로 갈라진 당쟁은 피난 중에도 그칠 줄 몰랐고, 선조(宣祖)는 오늘은 동인의 손을 들어줬다가 내일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하면서 자신의 왕권안보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흉계에 바질 무렵에는 원균과 가까운 서인들의 발언권이 더욱 강했다. 윤두수(尹斗壽)를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어전회의 때마다 이순신을 모함하는 반면 원균을 천거하기에 갖은 애를 썼다. 그런 중에 마침 결정적인 호재가 생긴 것이었다.
그해 2월 6일 이순신은 난리가 나면 도망이나 치고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대신들의 아우성에 따라 해임되고 "조정을 속이고 적군을 치지 않았다" 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금부도사에게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후임자인 원균에게 군사, 무기, 군량 등을 정확히 인계하고 그날 26일 돼지우리 같은 남거에 실려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서울로 끌려갔다. 그리고 의금부(義禁府)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다.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적극 나서서 고문만은 하지 말 것을 하소연하고, 이에 앞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도 글을 올려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수군이고, 이순신을 바꿔서는 안 되며, 원균을 보내서도 안 된다."고 상소했다. 또한 이덕형(李德馨)도 구명을 호소했고, 이순신의 심복인 정경달(丁擎達)은 죽음을 무릅쓰고 "장군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이순신은 4월 1일에 풀려났지만 두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어명(御命)을 받고 무등병으로 강등당해 권율의 원수부(元帥府)에 소속되어 금부도사에게 끌려갔다. 원수부가 있던 합천군 초계로 내려가던 도중에 순천에 피난갔던 83세의 노모 초계 변씨가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들었다. 참으로 무심한 하늘이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으나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떠났다.
● 원균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패배로 조선 수군이 전멸되다.
한편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은 이순신이 아끼던 역전의 장수들을 대부분 갈아치우고 자신의 뜻에 맹종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가 하면, 군비는 허술히 하는 대신 운주당(運鑄堂)에 들어앉아 주색에만 빠졌다. 부하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적군을 만나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고 탄식했다. 이순신이 잡혀가자 일본군 장수들도 "이순신이 없어졌으니 이젠 아무 걱정이 없다.:고 좋아하면서 잔치까지 벌였다.
6월 하순, 그래도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던 왜군은 또다시 이중간첩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후속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밀서를 전했다. 첩보를 받은 도체찰사 이원익은 도원수 권율과 상의하여 수군의 출동을 명령했다. 왜군의 똑같은 간계에 세 차례나 넘어간 셈이었다. 명령을 받은 권균은 먼저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을 무찌른 뒤 수륙연합작전(水陸聯合作戰)을 펴서 부산을 펴야 한다면서 좀처럼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여러 차례 독촉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함대를 끌고 나갔다가 6월 18일에 가덕도 인근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군선 십여척이 손실되는 패배를 당하자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면서 재출동을 명령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척을 거느리고 출동했다.
7월 4일 한산도를 출발한 원균의 함대는 5일에 칠천량을 지나 6일은 옥포에서 묵고 7일에 다대표를 거쳐 부산포로 향했다. 그런데 절영도에서 적선 1000여척을 발견하고 그들을 추격했지만 풍랑이 거칠어지자 한산도에서부터 4일간이나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배를 저어온 군사들인지라 싸움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일부는 서생포로 밀려가 격파당하고 원균은 남은 군선을 거느리고 가덕도로 후퇴했지만 배후를 지키고 있던 일본 수군이 사정없이 공격을 퍼붓자 크게 패하여 다시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형편없다고 생각한 왜군은 7월 14일 거제도까지 쫓아와 이튿날 밤 칠천량에서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고 군선 130여척이 격침되었다. 다만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군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한산도에 이르자 모두 도망치게 한 뒤 군량과 무기들을 불태우고 그 역시 전라도로 도망쳤다. 이로써 이순신이 피땀으로 육성해온 막강한 수군의 전력은 하루아침에 전멸되었다. 수군이 전멸되자 바다는 왜군의 독무대가 되었고 전라도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사천, 하동, 구례에 이어 남원, 전주까지 함락된 것이다. 위기를 의식한 명나라도 급히 구원병을 증파하고 조선 관군도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다시 왜군에게 넘어가는 듯했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을 계기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당하고 또다시 위기를 맞자 선조는 급히 어전회의를 열었지만 당쟁과 탁상공론으로 나날을 보내고 위급하면 도망치는 재주밖에 없는 위인들인지라 뾰족한 대책이 나올 턱이 없었다. 선조는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과 형조판서 김명원(金命元)의 진언을 받아들여 한때는 죽이려 했고 지금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 불가사의한 승리 명량해전(鳴梁海戰)
벼슬은 예전대로 돌아왔으나 피땀 흘려 육성한 강병과 함대는 간 곳이 없었다. 이순신은 15일간 남해안 지방을 돌아다니며 남은 군선 13척을 인수하고 120명의 군사를 모아 가까스로 수군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진도와 해남간의 물목인 명량해협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작전을 구상했다. 그런데 전부터 겁이 많던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어서 백여척이 넘는 적군 함대가 나타났다는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전에는 적선을 찾아다니며 격멸하던 조선 수군이었으나 이제는 기다렸다가 싸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16일에 군선 13척으로 일본 수군 전함 133척과 맞서 싸워야 하는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명량해전(鳴梁海戰)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군선과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적군 함대를 조류의 변화가 심하고 빠른 급물살이 흐르는 울돌목으로 유인하여 해저에 미리 설치한 철쇄(鐵鎖)에 적선을 걸리게 해서 연속충돌을 일으키게 했다. 일본 수군이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배의 중심을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조선 수군의 포격을 받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에서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8천여명의 적병을 살상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일본 수군의 선봉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도 이순신의 궁시(弓矢)를 맞고 바다에 떨어져 전사하였다. 반면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자 2명과 부상자 3명이 전부였으며, 13척의 군선 가운데 단 한 척도 손실되지 않았으니,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적의 승첩인 명량해전(鳴梁海戰)으로 정유재란은 또다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일본 수군이 군선 133척과 군사 3만여명의 대병력으로 군선 13척과 군사 120여명뿐인 와해된 조선 수군에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하자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적장들은 참패의 수모를 안겨준 이순신에게 보복하기 위해 아산에 병력을 보내어 이순신의 셋째아들 이면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598년 2월에 조선 수군의 새 본영을 완도 고금도로 결정한 이순신은 여기서 수군의 전력을 복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군선을 40여척 더 건조하고 군사도 8000여명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지원군으로 온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자만심에다 욕심도 많고 포악하여 조선 수군의 작전수행마저 방해를 주게 되니, 새로운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순신은 이런 진린을 무마하여 전공(戰功)이 있으면 그에게 돌리고 결국은 그를 김복시켜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도 장악했다.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지휘력과 넓은 학식이 이 무지막지한 중국인 장수까지 감복시켜 나중에는 강 간과 약탈을 일삼는 자기 부하에 대한 처벌 권한까지 넘겨주니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이순신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 노량 앞바다의 마지막 전투에서 순국
그해 8월 18일 전쟁을 일으킨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조선에 있던 왜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은 그렇지 않아도 싸우기 싫은데 잘됐다면서 길을 터주자고 했으나 철천지원수 왜적(倭敵)을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던 이순신이 허락할 리 없었다. 뇌물을 받은 진린은 대국 장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칼까지 빼어 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이순신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결국 진린이 몰래 길을 터준 틈을 타 일본군의 연락선 한 척이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하여 일본 군선 3백여척이 남해의 노량 앞바다에 몰려들었다. 첩보를 입수한 이순신이 전군에 출정명령을 내리자 진린도 마지못해 따라나왔다. 11월 19일 새벽에 노량에서는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과 일본 수군 사이에 최후의 대결전(大結戰)이 벌어졌다. 치열한 접근전(接近戰)으로 펼쳐진 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일본 수군은 6천여명이 넘는 전사자와 5백여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나오고 군선 4백여척이 박살나는 타격을 입었으나, 조선 수군도 2백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이순신은 적선들에게 포위된 진린의 대장선을 구원하고 도주하는 적선 50여척을 뒤쫓다가 적군의 총탄을 맞고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숨을 거두기 전에 "나의 몸을 방패로 가려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므로 군사들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온 군선과 군사들에게 전해지자 바다는 온통 통곡성으로 울렁거렸고,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도 울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의 나이 그때 54세였다. 그의 영구(靈柩)는 우선 남해 노량 현재의 충렬사(忠烈祠)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곧 본진이 있던 고금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아산에 당도한 영구는 금성산 밑에 장사지냈다가 16년 뒤 현재의 자리인 아라산 기슭으로 천장했다. 1604년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선무1등공신에 좌의정 겸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증되었고, 1643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다시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현충사(顯忠祠)는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지 108년 뒤인 1706년에 건립되어 그 이듬해 숙종(肅宗)의 친필 현판이 사액되었다. 그 뒤 200여년간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에는 헐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1932년 충무공 유적 보존 위원회가 앞장서 사당을 재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4월 28일 장군의 탄신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56년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장군의 묘소가 사적 제112호로 지정된 데 이어 1967년에는 현충사도 정화, 단장하고 성역화되어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전쟁터에서는 뛰어난 지략으로 연전연승(聯戰聯勝)한 탁월한 명장이었고, 가정에서는 효성 극진한 효자였으며, 부하들을 너그럽게 감싸주고 백성들을 사랑했던 이순신 장군. 참다운 나라 사랑의 길, 참다운 인간의 도리를 제시해준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무인(武人)의 차원을 넘어 우리 겨레의 살 길을 열어준 구세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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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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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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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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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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