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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45.붉은 갑옷의 전설을 남긴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회기로 2010. 1. 26.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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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일본의 20만 대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거침없이 북상, 조선의 국토와 백성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벼슬아치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조선의 온 산야는 백성들의 비명과 통곡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이때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부대를 조직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꼭 열흘 째 되던 날, 붉은 갑옷을 입고 은색 안장을 얹은 백마(白馬)를 타고 나타난 곽재우는 서릿발 같은 예도(銳刀)를 휘두르며 왜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홍의장군(紅衣將軍)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6세기 동양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중국, 한국, 일본 동양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國際戰)이었다. 7년 동안 전개된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배로 종결되었지만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중요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전 국토가 폐허로 변하는 등 조선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일본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은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連戰連勝)과 의병들의 필사적인 투쟁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중원대륙으로 진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지원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들은 전투에는 소극적이면서 일본과 강화협상(講和協商)을 맺어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7년 전쟁 동안 명나라 군사들이 참가한 전투가 고작 8회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별로 기여한 공로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관군이 무기력하게 일본군에게 패퇴하여 아무도 나라의 안위를 보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만약 의병들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이 없었다면 16세기에 한반도는 일본 침략군의 정복지(征服地)가 되었을 것이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곡리는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곽재우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이다. 또한 이곳은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 유격부대가 창설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의령군 남강 기슭 정암진은 곽재우의 부대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경상도를 짓밟고 전라도를 향해 물밀듯이 밀려드는 왜군을 격퇴시킨 빛나는 전승지(戰勝地)로서, 이곳에서의 승전(勝戰) 때문에 왜군의 육로(陸路)를 통한 전라도 점령 기도를 완전히 봉쇄하게 된 것이다.

곽재우(郭再祐)는 필승의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유격전(遊擊戰)의 맹장(猛裝)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공(戰功)의 포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을 탐내지도 않았다. "의병은 싸울 뿐이다. 결코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는 말에서 사심 없는 그의 충정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조정과 관료들은 썩 을 대로 썩어 있었다. 그들은 허구한날 당파 싸움으로 숱한 충신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드렸다. 그리고 전란(戰亂)이 닥치자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는 커녕 제 한 목숨 건지기 위해 도망치지 바빴다. 도망치는 와중에서도 당파 싸움은 끊이지 않았으니 조선의 운명은 불 보듯 뻔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예정된 전란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희생 끝에 전란이 끝난 후 곽재우는 붉은 갑옷을 벗고 활과 칼도 버렸다. 여러 차례 내려 준 벼슬도 마다한 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으려고 했다. 그의 아호인 망우당(忘憂堂)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대장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갔으며, 전란이 끝나자 고향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낸 곽재우는 달성군 구지면 구지산 기슭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어 '망우의 적막'을 누리고 있다.

● 평범한 한량(閑良)이 의병을 모집하다.

곽재우(郭再祐)는 1552년 8월 28일, 의주 목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친이 처가실이를 하던 유곡면 세간리다. 망우당집(忘憂堂集)에 따르면 곽재우는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 호탕하였고 침착하였으며,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보면 안광(眼光)이 번쩍번쩍 빛나서 감히 마주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곽재우는 어렸을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남명의 외손녀와 혼인했다.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곽재우는 학문을 닦고 무예를 익히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로 성장했다. 스물한 살 때에는 의주 목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가 3년 동안 곁에서 모시는 한편, 틈틈이 군사에 관한 지식과 무술을 연마했다. 곽재우는 그다지 벼슬에 뜻이 없었지만 부모의 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른네 살 되던 해에 과거(科擧)를 보아 2등으로 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답안에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며칠 뒤에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이듬해 부친이 별세했는데, 그는 죽기 전에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관복을 곽재우에게 물려주며, "우리 가문을 이을 사람은 너뿐이다." 라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도 곽재우는 벼슬길에 오를 생각은 않고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기강 옆에 집을 짓고 시와 술과 낚시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풍류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곽재우가 불혹의 40세가 됐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의 20만 대군은 상륙하기가 무섭게 조선 땅을 휩쓸기 시작했다. 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양산, 밀양, 대구,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까지 북상했다. 유성룡(柳成龍)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경상감사 김수(金?)는 진주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동래로 가던 중에 왜적(倭敵)이 밀어닥친다고 하자, 자신은 그 길로 도망치며 각 고을에 전령을 보내 모두 재주껏 산 속으로 숨으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가만히 있다가는 힘 없고 나약한 백성들은 모두 죽게 될 게 뻔했다. 그러나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내 힘으로 싸우다 죽자며 의병이 모집된 것이다.

곽재우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4월 22일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왜군 3만여명이 김해, 창원을 점령하고 현풍으로 들어오던 날이었다. 의병을 모집하기에 앞서 그는 현풍의 본가로 달려가 조상의 사당에 고하고 묘의 봉분을 평평하게 만들어 적병들이 범하지 못하게 했다. 그 다음에 어머니 허씨를 비롯한 가족들을 데리고 의령으로 돌아와 깊은 산 속으로 피난시킨 후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 따르면, 처음에 곽재우는 집에 데리고 있던 종 10여명을 데리고 이불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붉은 관복을 입은 다음, 스스로 하늘에서 내린 붉은 군복의 장수(將帥)라고 일컬으면서 집 앞 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그것을 치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글고 가산을 정리하여 곳간을 열고 사람들에게 곡식을 마음대로 퍼가게 하는가 하면, 자신의 옷을 벗어 그들에게 입힐 정도로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변변한 벼슬 한 자리도 못하면서, 매일같이 술과 낚시를 즐기며 풍월이나 흥얼거리던 곽재우가 의병을 모은다니, 머슴 열두어 명만이 삽, 곡괭이, 낫, 도끼 같은 것을 들고 따라 나설 뿐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구나 싶어 곽재우는 평소 눈여겨봐 두었던 지략과 담력을 갖춘 젊은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 결과, 가까스로 수십 명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힘들게 의병부대를 만든 지 보름이 채 못 된 5월 4일, 곽재우는 왜군의 척후선 3척이 남강을 거슬러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선봉장 심대승(沈大升)을 비롯한 날래고 힘깨나 쓰는 부하 10여명을 인솔하여 거름강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강가 갈대밭에 궁수들을 매복시키고 강 속에는 통나무와 밧줄 등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기다리다가 왜병들의 선박이 거기에 걸려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틈을 타 공격명령을 내렸다. 의병들의 쉴새없는 화살 공격에 왜병들은 조총 한 번 제대로 쏠 새도 없이 모두 죽고 군선도 침몰해 버렸다.

곽재우는 첫 승리에 환호하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작은 전투였지만 승리의 파급효과는 대단히 컸다. 곽재우가 거름강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의 군세(軍勢)는 말 그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5월 6일, 이번에는 11척의 적선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비록 의분(義憤) 하나만으로 일어나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무기도 변변치 못한 형편이었지만, 의병들은 이번에도 곽재우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에 따라 용감히 싸워 또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임진왜란(壬辰倭亂) 개전 이래 최초의 해상전투인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첫 승리를 거두기 바로 전날이었다.

곽재우의 거듭되는 승전(勝戰) 소식을 듣자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 속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던 사내들이 무더기로 내려와 홍의장군(紅衣將軍)의 깃발 아래로 모였다. 처음에 10여명으로 첫 발을 내디딘 의병의 수는 수백 명으로 불어나 마침내 2천명을 헤아리는 대부대가 되었다.

곽재우의 의병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정암진전투(鼎巖津戰鬪)야말로 그의 활약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싸움이다. 1592년 6월 함안을 점령한 왜군 2만명은 의령을 공격하기 위해 정암진에 도착해서 강을 건너기 위한 작전을 시도했다. 당시 경상도를 맡은 적장은 모리 테루모토이고 전라도를 맡은 자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인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연속 격파하면서 재해권을 장악하자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되어, 육로를 통해 전라도를 침범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정암진은 물이 워낙 깊은데다 그나마 얕은 곳은 진창이어서 도저히 깅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로잡은 조선 백성들을 동원해 마른 곳만 골라서 깃발을 꽂아 표시하게 하고 다음 날 해가 뜬 후 강을 건너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던 곽재우는 밤새 의병들을 시켜 깃발을 모조리 뽑아 진창으로 옮겨 꽂게 하고, 수심이 깊은 곳에는 장애물을 설치한 뒤 강변 갈대밭에는 궁수들을 매복시켜 놓았다.

날이 밝자 과연 왜병들이 강가로 꾸역꾸역 몰려 나왔다. 그리고 깃발을 다라 강을 건너다가 모조리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정암진 벼랑 위에 붉은 갑옷을 입고 백마 위에 높이 앉은 장수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긴 칼을 높이 쳐들고 벼락치듯이 소리를 질렀다.

"쏴라! 한 놈도 놓치면 안 된다."

비 오듯 화살이 날고 여기저기서 왜병들이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선발대가 조선 의병들의 매복작전에 걸려 거의 전멸되자, 왜군은 머릿수만 믿고 인해전술로 밀고 나왔다. 곽재우는 무모하게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과 맞서지 않고 의병들을 후퇴시킨 다음, 여기저기 산등성이와 산골짜기 속에 군사들을 숨긴 뒤 유인작전을 펼쳤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키와 몸집이 비슷한 부하 10여명을 봅아서 가짜 홍의장군을 만들어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이라고 쓴 대장기를 들고 곳곳의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 후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쳐들어가 백병전(白兵戰)을 벌이다가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니,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적병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고 조총을 쏘며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쫓다보니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여기에도 홍의장군, 저기에도 홍의장군이 나타나서 우렁차게 호통치며 어지럽게 칼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넋이 나간 왜병들은 등을 보이며 다시 강변으로 도망치니 이번에는 사방에 숨어 있던 의병들이 나타나 마구 공격해 대기 시작했고, 결국 이 전투에서 2만의 왜군 가운데 8천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참패하였다. 그 뒤부터 왜군은 홍의장군만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이 나타났다!" 하면서 도망다니기 바빴다.

● 정규군 총사령관이 되다.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자기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이토록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웠건만, 나라로부터 상을 받기는커녕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도망쳐 숨기에 바빴던 자들에게 모함을 받아 오히려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할 때도 있었다. 정말 한심한 임금에, 한심한 벼슬아치들에, 한심한 나라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공로를 인정받아 성주 목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된 곽재우는 일단 의병부대를 해산시켜 일부는 관군으로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돌아가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는 경상도 좌방어사로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적군과 대치하였다. 그곳은 산 정상에 오르면 창녕은 물론 멀리 고령, 합천, 의령, 함안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은 곽재우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 등의 군사와 백성들을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올라가 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는 유격전을 펴는 의병이 아니라 정규군 총사령관으로서 적의 대군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전력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맞서기 위해서는 험한 지형에 의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곽재우는 성벽을 구축하고 보강한 다음 장작과 섶을 무더기로 쌓아 성이 함락될 경우 다 함께 불을 질러 죽기로 결의하고 적군을 기다렸다. 이윽고 왜장 가운데 가장 용맹스럽고 흉포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3만 대군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다. 하지만 온 산을 뒤덮은 적군의 깃발과 창검을 내려다보고도 곽재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바위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倭놈들 중에 병법에 밝은 자가 있다면 감히 우리가 지키는 성에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과연 곽재우의 말대로 가토 기요마사는 하루 낮밤을 성 밑에서 동정만 살피다가 승산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냥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전투 한번도 치르지 않고 적군을 물리친 것이다.

● 다시 한량으로 돌아가다.

전란이 끝나고 나서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사양했다는 이유로 영암에서 2년간 귀양살이를 한 곽재우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을 짓고 은거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고 풍류를 즐기는 일에 전념했다.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이 여러 차례 벼슬을 주려 했지만 모두 거절한 곽재우는 아들들에게도 벼슬길에 나가지 말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솔잎으로 끼니를 때우고 책과 거문고, 낚시를 즐기면서 만년을 풍류와 도술에 몰두하며 보내던 곽재우는 1614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66세를 일기로 세상과 하직한다. 그가 죽던 날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리고 한바탕 풍우가 몰아치더니, 문을 열자 방 안에 이상한 향기가 가득하였다는 이야기가 야사(野史)에 전해 오고 있다.

생전에는 공신 반열에 끼지 못했던 곽재우에게 1709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라는 공신호(功臣號)가 내려졌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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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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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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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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