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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46.중세 동양 최고의 의학자 구암(龜巖) 허준(許浚)

회기로 2010. 1. 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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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의성(醫聖)'이라고까지 추앙받는 구암(龜巖) 허준(許浚)은 신분적 불리함을 딛고 자기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도전적 인간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적 가치관이 전부이던 시대에 태어나, 당시로서는 크게 대우받지 못하는 의술(醫術)이라는 길에 인생을 바쳤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륵까지 자신을 갈고 닦아 시대적 가치를 뛰어넘는 평가를 이끌어 낸 위대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의원으로서 허준의 뛰어난 점은 약과 치료보다 건강의 유지와 증진에 의술의 본뜻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치료 의학'보다는 '예방 의학'을 우선시했다는 점이 그의 의학 사상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다. 이것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그의 모든 저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데,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도 대단히 선각자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의술은 기술(技術)이 아닌 인술(仁術)로 파악한 인본주의자였던 허준은 항상 가난한 백성의 입장에서 치료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실정과 우리 민족의 체질이 갖고 있는 특성에 알맞는 치료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었다.

허준에게 있어서 의술의 목표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호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배운 학문으로 그 어떤 정치인보다 치도(治道)의 근본을 실천한 큰 인물이었다. 또 전란으로 인해 어수선하고 흔들리던 당시 정권을 한쪽에서 굳건히 지탱해 준 버팀목이기도 했다.

허준의 독보적인 가치는 중국 의술의 아류로 취급되던 조선 의학의 체계를 정립시킨 데에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운 환경을 뚫고 자신의 길을 열어 나간 개혁 정신과 좌절의 순간에도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오랜 시간을 의술이라는 한 가지 길에 정진하여 불후의 명작, 동의보감을 탄생시킨 인간 승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서얼로 태어나 의술 공부에 전념하다.

허준은 1546년에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許論)의 서자로서 경기도 양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손씨는 지방 현령의 딸로 아버지으 소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운명적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을 박탈당한 채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으며, 그것은 훗날 그가 의술을 철학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려 집대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허준의 배다른 형제로는 형인 옥(沃)과 동생 징(澄)이 있었는데 그 중 동생은 꽤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준은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서 전남 지역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서얼 출신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일찍부터 자각한 그는 당시 중인 계층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던 의원을 인생의 목표로 선택하였다. 의술 공부에 전념하던 그는 젊어서부터 이미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어 주위의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허준의 의술은 집안의 뒷바라지가 있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0대에 이미 중앙으로 상납하는 약재를 검사하는 심약(審藥)이라는 종9품 관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허준이 의원으로 출세하는 데에는 아버지의 본부인 영광 김씨의 도움이 컸는데, 특히 김씨의 친적으로 허준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김시흡(金時洽)이 그의 자질을 인정하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에게 소개해 주었고, 유희춘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여러 가지 면에서 허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허준이 유희춘을 처음 만난 시기는 유희춘이 유배에서 풀려난 1568년으로,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유희춘은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윤원형(尹元衡) 일파에게 탄압을 받고 유배 생활을 하다가 선조가 즉위하고 나서야 21년 동안의 긴 유배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 후 유희춘은 선조(宣祖)대에 전라감사, 홍문관제학, 대사헌 등의 요직을 역임하게 되는데, 이러한 유희춘의 지원과 보살핌은 허준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희춘의 추천으로 1569년에 궁중의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이 된 허준은 당대 최고의 의원으로서 국왕과 왕족의 진료를 책임지고 있던 어의(御醫) 양예수(楊禮壽)를 만나게 된다. 흔히들 허준의 스승을 유의태(柳義泰)로 알고 있지만, 그는 허준보다 후대에 활동한 인물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꾸며 낸 것에 불과하다.

양예수를 만난 허준은 의술의 정수를 진수받아 의원으로서 더욱 높은 실력을 쌓아 갔다. 양예수가 지은 의림촬요(醫林撮要)가 훗날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허준에게 있어서 양예수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허준은 1571년에 종4품인 내의첨정에 올랐다가 1575년에 의과에 정식으로 합격하고 어의로 선발된다. 갓 서른의 나이에 의원으로서 확실하게 지위를 굳힌 셈이다. 이때부터 허준은 왕실 진료를 함에 있어 많은 공적을 세우기 시작했고, 결국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허준은 왕실 전담 의원으로 근무하면서 의학을 꾸준히 연구하여 1581년에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을 4권 4책으로 펴낸다. 이 책은 중국인 고양생(高陽生)이 쓴 찬도맥결(纂圖脈訣)을 수정, 보완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 낸 것이다.

사실 찬도맥결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지만 내용이 워낙 복잡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허준이 지은 교정본은 이러한 문제점을 대폭 수정하여 기본적인 진맥법과 병세에 따른 진맥법을 항목별로 상세하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어 희학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으로 인해 내의원 내에서 그의 위치는 더욱 확실해졌다.

1590년에는 천연두에 걸린 광해군(光海君)을 낫게 해 주어서 그 공로로 정3품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허준은 광해군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서얼 출신이자 기술 관료인 그에게 정3품 당상관 대우는 부당하다며, 품계를 도로 거두어들이라는 여론이 빗발쳤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전란 속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고통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허준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왜군은 부산포에 침입한 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믿었던 신립(申砬)마저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자, 선조(宣祖)와 조정은 개성을 향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때 허준은 어의로서 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갔다. 당시 양예수가 노쇠하여 47세의 허준이 어의로서 그 소임을 대행했던 것이다. 그는 피난길에 잠시도 국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건강을 돌본 공로로 선조가 대궐로 귀환한 후 또 다시 품계를 올려 받았다.

그런데 한성으로 돌아오면서 목격한 조국의 신하는 전란으로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부상당한 사람들과 전란 끝에 으레 찾아오는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가까이서 지켜 본 허준은 이들을 치료할 방도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허준은 선조의 명을 빌려 모든 병을 치료하는 방안을 수록한 의학서를 편찬학로 하고, 1596년에 그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노쇠한 양예수가 은퇴하여 허준이 그 뒤를 이어 내의원 최고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때는 아직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敾? 휴전 상태로서, 왜군이 여전히 남해안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국내 정세 또한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구휼과 치료가 시급하다는 생각에, 우선 내의원 안에 새 의서를 찍어 내기 위한 편찬국을 두고 허준을 비롯하여 정작(鄭酌),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 내노라 하는 의관들이 모두 모여 공동 연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창 연구가 진행되는 도중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생하여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구는 부득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양상은 중부 지방에서 전선이 형성된 후 교착 상태에 바졌다가,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으면서 남긴 조선 철병 유언으로 왜군이 일제히 철병하였고, 이에 따라 7년에 걸친 전란이 겨우 끝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내의원도 다시 정비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중단되었던 의학서 편찬 작업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부터는 허준 혼자서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는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5백여권의 의학서를 참조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나갔다. 연구에 몰두하던 그가 55세 되던 1600년에는 스승인 양예수가 세상을 떠났고, 그때부터 허준은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의원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허준은 의서 편찬 작업이라는 어려운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의원으로서 자신의 힘이 필요한 경우에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601년부터 전국에 천연두가 급속하게 퍼져 나가자, 허준은 연구하던 것을 잠시 접어두고 병들어 죽어 가는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일선으로 나아가 의원으로서 임무에 충실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염병이 워낙 극성을 부려서 왕실 치료를 전담하는 내의원 의관들도 손놓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준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일반 백성들이 의원의 도움을 못 받더라도 쉽게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도록 세조(世祖) 때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던 구급방(救急方)을 한글로 번역하여 2권 2책의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으로 내놓았다. 또 세조 때의 의학자 임원준(任元濬)이 저술한 천연두 치료에 관한 책인 창진집(瘡疹集)을 개편하고, 역시 한글로 번역하여 언해두창집요(諺解痘滄集要)를 편찬해 낸 것도 같은 해의 일이었다. 허준은 이 책을 알기 쉽게 고쳐 쓰기도 했지만, 자신이 직접 치료하면서 효과가 ?종年? 진료 방법을 덧붙여 적어 놓아 천연두 퇴치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러한 공로로 1604년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攻臣) 3등이 되었다가 2년 후에는 양평군(陽平君)이라는 작위와 함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봉해져서 관리로서 최고위직 대우를 받게 된다.

● 동의보감을 완성하다.

의원으로서 허준과 같은 대접을 받은 사람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그러나 일종의 '기술직'으로 문관(文官), 무관(武官)에 비해 그다지 우대받지 못하던 의관(醫官)이 전례 없이 파격적인 대접을 받게 되자, 자?? 조정 내에서는 허준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결국 직위가 취소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된 허준은 그 와중에도 의학 연구에 꾸준히 몰두했다.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한글로 옮기고 수정하여,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출산과 악 양육법에 관한 해설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원으로서 승승장구하던 허준에게 그 해 2월에 엄청난 위기가 다가왔다. 선조(宣祖)가 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군왕의 주치의로서 치료에 잘못이 있다 하여 집중적인 탄핵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위하던 임금이 죽으면 그의 건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하여 규례적으로 어의의 죄를 논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의례적인 절차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일로 인해 어의가 처벌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허준은 중서(中庶)의 신분임에도 그동안 선조의 신임과 보호를 받아서 높은 벼슬아치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았다는 죄 아닌 죄로 인해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당해야만 했다.

결국 허준은 삭탈관직된 후 유배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이런 좌절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의학서 집필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 허준을 유배시켜 버리고도 이에 만족하지 못한 조정 중신들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다음 해 4월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가중 처벌까지 받게 되어,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 해 11월에 광해군(光海君)의 명으로 사면되어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내의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자 시절 허준에 의해 병을 치료받았던 광해군이 그를 풀어 주고 어의로 다시 불렀던 것이다.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그동안 연구했던 새 의서 저술을 마무리지었고, 마침내 작업에 착수한 지 15년만인 1610년 8월, 2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완성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포고문을 내려 그 공로를 치하하고 상으로 태복마(太復馬)를 하사하였다. 이 책은 출판 준비에만 3년이 걸려 실제로 간행된 것은 1613년 11월이었다.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혼자 힘으로 고군분투하던 허준은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 낸 것이다. 끈질긴 집착력과 사명감으로 기나긴 세월 동안 한 길을 향해 매진한 결과였다. 집필을 마쳤을 때 그의 나이도 어언 65세로 고령이 되어 있었다.

동의보감은 그 후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간되었다. 중국에서 출판될 때 그 서문에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전세계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적어 극찬하였고, 일본에서도 '의가의 비급(備急)'으로 소중히 떠받들어졌다.

● 말년에도 질병 퇴치를 위하여 매진하다.

허준(許浚)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한 후에도 새로운 병이 발견되면 몸을 아끼지 않고 처방을 연구하여 책으로 펴냈다. 1612년 12월에는 온역(瘟疫)이라고 불리던 발진 티푸스가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유행하다가 점점 전국으로 번져 나갔는데, 이때 허준은 중종(中宗) 때부터 전해져 오던 벽온방(碧瘟方)을 참고하여 신찬 벽온방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발진 티푸스의 원인 및 예방과 치료법에 대해 적은 것으로 1613년 2월에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 당독역(唐毒疫)으로 불리던 성홍열에 전국에서 유행하자 벽역신방(碧疫神方)이라는 치료서를 엮어 내기도 했다. 이 책에는 성홍열의 기원과 중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치료법과 약방문에 이르기까지, 사용하기 쉽고 효험이 큰 방법들이 간결하여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의학 연구 및 저술과 병든 백성들의 구호에 진력하던 허준은 1615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다음 광해군은 그의 공적을 기려 예전에 중신들의 반발로 취소됐던 양평군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와 같이 허준은 조선뿐만 아니라 동양 의학계 전체에 지울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중국에서는 그를 가리켜 '동국(東國)의 의성(醫聖)'이라고 추앙하였으며, 그의 책을 질병 치료에 길잡이로 사용했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동의보감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어 세계적인 의학서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동의보감(東醫寶鑑)의 내용과 가치

동의보감은 의학서에 대한 허준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임상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실용적인 의학서이다. 각종 질병에 따른 처방을 상세히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약제만으로 병을 다스릴 수 있는 단방(單方) 치료법을 주로 열거하였다. 그 밖에 약만으로 효과가 없을 경우에 쓸 수 있는 침구법도 덧붙여서 완벽한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약재에 있어서도 중국산과 국산을 구분하여 국산 약재는 산지, 지방별 명칭, 채취 계절과 제약 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하여 약재는 산지, 지방별 명칭, 채취 계절과 제약 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하여 약재를 구하기 쉽도록 했다. 그리고 처방의 출전을 밝혀두어 질병에 대한 고금의 치료 방법을 계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으며, 민간 요법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목차편 2권, 내과인 내경편 4권, 외과인 외형편 4권, 유행병, 급성병, 부인과, 소아과 등을 합친 잡병편 11권, 액재와 약물에 관한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 등 5강목으로 나뉘어서 총 25권으로 발간되었는데, 특히 잡병편에서는 증세를 중심으로 각종 질병을 알아낼 수 있도록 배열하여 임상 경험이 부족한 의원도 이 책을 기초로 하면 쉽게 진맥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처방약으 용량도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표준치를 만들어 적당히 가감하여 조제할 수 있도록 하였고, 복용 방법까지 명시해 놓았다.

무엇보다도 동의보감은 그의 의학사상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정(精), 기(氣), 신(神)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내장기의 생리적 기능 변조 가능성과 그로 인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증세를 다루고 있는데, 4백여년 전에 이미 현대 의학에 가까운 의술이 모색되었다는 측면에서 경이로울 따름이다. 이와 같이 고금의 각종 의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여러 가지 치료 방안을 취사, 선택한 후 실제 임상 경험을 거쳐 치료에 효과가 있는 핵심만을 뽑아 내느라 무려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의보감은 무엇보다도 정확성과 함께 실제적 활용 가능성을 중요하게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한의학(漢醫學)을 집대성하여 토대로 삼았지만,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게 재정립했기 때문에 한방의학(漢方醫學)이 아니라 한방의학(韓方醫學)의 결정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의술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수록되었다고 할 정도로 상세하면서 그 내용이 정확하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이와 같이 뛰어난 책이 다시 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동양 의학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의보감의 진정한 가치는 한국 의학의 우수성과 민족적 재능의 뛰어남을 과시한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에 있다. 또한 기술로서의 의술이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는 인술로서 의학을 대했던 한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깊다 하겠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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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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