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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44.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조선 관군을 총지휘했던 권율(權慄)

회기로 2010. 1. 26.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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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는 때를 잘못 타고나 불운한 일생을 보낸 아까운 인재도 많았지만, 하늘이 때를 맞춰 내려준 영웅호걸도 많았으니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강감찬(姜邯贊)과 최영(崔瑩), 그리고 조선왕조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뛰어난 통솔력과 비상한 지략으로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김시민(金時敏), 곽재우(郭再祐)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권율은 문신(文臣)이면서도 타고난 장수감이었다. 그는 과감한 성격에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으며, 기지와 용기를 두루 갖춘 천부적 장재(將材)였다. 선조(宣祖) 재위 25년(서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뒤늦게 벼슬길에 나아가 당시 광주목사로 있던 권율은 남원에서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북상하다가 금산의 이치(梨峙)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는 왜군을 물리쳐 호남이 유린당하는 것을 막았고, 다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수원 독성(禿城)을 굳게 지키며 포위 공격해오는 왜군과 맞서 싸웠다.

또한 권율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2월 12일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불과 2천 3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무려 14배에 이르는 3만여명의 왜적(倭敵) 대군을 격퇴시키는 대승(大勝)을 거둠으로써 역사에 길이남을 전공(戰功)을 세운다. 권율은 그해 6월에 조선의 육군과 수군을 총지휘하는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영남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했다는 죄 아닌 죄로 해직되었으나 곧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었다. 그 뒤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 재위 30년(서기 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와 힘을 합쳐 울산에 주둔해 있던 왜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 동안 전국의 전쟁터를 누비며 목숨을 걸고 싸우던 권율은 전쟁이 끝난 뒤 전후(戰後) 처리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 40세가 넘도록 풍류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 길러

권율(權慄)은 중종(中宗) 재위 32년(서기 1537년) 12월 28일에 강화도 연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그는 명종(明宗) 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선조(宣祖) 초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권철(權轍)과 조씨(曺氏) 부인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재상가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남들에게 귀한 집안 자식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글공부에만 죽어라 하고 매달린 책벌레도 아니었다.

젊어서 윤근수(尹根壽)와 더불어 이덕수(李德秀)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고, 17세 때인 명종 재위 8년(서기 1553년)에 조휘원(趙輝原)의 딸과 혼인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이 딸은 뒤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시집갔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오성대감(鰲城大監)'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선조 재위 13년(서기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다섯차례나 역임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런데 권율은 첫 부인이 이 딸 하나만 낳고 일찍 죽자 29세 때인 명종 재위 19년(서기 1564년)에 현감을 지낸 박세형(朴世炯)의 딸과 재혼했다. 하지만 박씨(朴氏) 부인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권율은 나이 20세가 넘도록 과거(科擧)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산수 간에서 풍류를 즐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그렇게 소요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 40세가 훨씬 넘어버렸다. 40세면 당시로서는 노인 축에 들어가는 나이였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음직(蔭職)으로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했다. 음직이란 과거를 보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훈(功勳)으로서 벼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권율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도 성가실 정도로 권하는 사람에게는 "옛날 강태공(姜太公)은 나이 80세에 영달했는데 내 나이는 그보다 절반밖에 되지 않았거늘 벼슬은 무슨 벼슬인가."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거를 보기 전에 산천을 유람하다가 권율은 장차 왜적(倭敵)이 조선을 침략할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전란이 일어나면 충실한 측근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쓸 만한 인재를 물색하던 중 한번은 송파나루를 건너다가 '여주장사'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이 '여주장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장군의 밑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전설이 전해온다.

그런 권율이 과거를 본 것은 46세 때인 선조 재위 15년(서기 1582년)이니 사위 이항복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 뒤였다. 사람들이 사위보다 뒤늦게 무슨 과거냐고 비웃었지만 권율은 그런 속물들의 평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대범하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한 중늙은이 권율은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전라도 도사, 예조좌랑, 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선조 재위 21년(서기 1588년)에는 함경도 경성부판관(京城府判官)으로 나갔는데, 2년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그가 왜 벼슬을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임명

그가 다시 관직에 나간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한해 전인 선조 재위 24년(서기 1591년)이었다. 의주목사 자리가 비자 논의 끝에 권율이 가장 적임자라는 결론을 보아 의주목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4월에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권율이 쓸 만한 인재라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는가? 그에게 영남과 호남의 거진(巨鎭)을 맡겨야겠다." 하고 그날로 의주목사로 있던 권율을 광주목사로 임명했다.

권율은 전임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짐을 꾸렸다. 그런 그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사람이 잇었는데, 권율은 "나라가 위급하여 신하가 죽을 때인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느냐!"면서 남행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급히 광주로 달려갔지만 도착하여 집무를 개시하기도 전에 빨리 군사를 모아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임금의 행차란 다름이 아니라 선조가 백성들 몰래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에 권율은 방어사 곽영(郭嶸)을 따라 근왕군(近王軍)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다. 당시 근왕군은 총 병력이 4만명으로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곽영이 2만명씩 나누어 통솔했는데, 이광은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았고, 곽영은 권율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그해 4월 20일에 두 갈래로 나누어 북상했다.

이들은 직산에서 다시 합류하고, 경상감사 김수(金粹)와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이끌고 올라온 군대와 또 다시 합세하여 수원으로 진격했다. 그때까지는 제법 군세가 왕성했으나 5월 5일에 벌어진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와키사카 야쓰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왜군의 공격을 받고 병력의 절반이 무너지는 참패를 당했다. 권율과 백광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군의 수효가 겨우 1천 6백여명뿐이라는 점을 얕잡아본 이광이 무리하게 공격명령을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 전투에서 결국 백광언과 이지시가 전사했다. 이튿날 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본진에서 구원병까지 달려와 초전에 패배한 조선 관군을 재차 공격했다. 잇따른 패배로 근왕군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용인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권율은 황진(黃進), 위대기(魏大器),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관내와 이웃 고을에 격문을 돌려 1500여명의 군사를 모집했다. 이때 격문 가운데 "장차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를 쳐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으니 권율의 기개와 포부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전란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의 피해가 비교적 적은 호남지방을 든든한 후방기지로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서 농사에 힘서야 한다, 무술을 연마하고 자제들을 군대에 보낸다, 유언비어를 믿어서는 안된다, 미란민이 오면 힘써 위로한다, 대나무를 키우고 쇠를 캐서 군기를 만든다, 여자는 부지런히 여자의 일을 다하고 남자를 대신하여 집안을 다스린다, 양식을 절약하고 옷을 아껴 군대에 보탬이 되게 한다, 관민이 서로 믿고 한 집안같이 한다는 등 약법 10조를 발표했다.

◆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첫 승리 거둬

그해 7월 1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이 전라도를 침범하기 위해 무주를 점령하고 금산으로 쳐들어왔다. 원래 왜군은 창원에서 함안, 의령, 함양을 거쳐 남원, 전주로 진격하려 했으나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의병부대에게 패배를 당하자 진로를 바꿔 거창, 황간을 거쳐 무주, 금산으로 공격해온 것이었다. 왜군이 금산에서 전주를 노린다는 보고를 받은 권율은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대장 황박(黃搏), 김제군수 정담(鄭湛)에게 웅치를 지키도록 지시하고, 동복현감 황진에게는 이치를 먼저 점령하도록 명한 뒤 자신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치로 향했다.

7월 7일부터 8일까지 이틀 동안 밤낮없이 계속된 이 전투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관군 1천 5백여명은 1만이 넘는 왜적(倭敵)의 대군을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마침내 크게 무찔러 격퇴시켰는데, 아군의 피해는 정담과 그의 종사관 이봉(李封), 그의 비장 강운(姜運)과 박형길(朴亨吉) 등 전사자 11명에 불과했다. 이 싸움에서 권율은 적군의 눈에 잘 띄는 금빛 투구를 쓰고 금빛 갑옷을 입고 최전선에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병들을 환도(環刀)로 베어 넘기며 독전(督戰)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용장이 따로 없었다. 권율이 거둔 최초의 승리인 이치전투로 왜군의 육로를 통한 호남 침범의 야욕은 봉쇄되고 말았다. 승전보(勝戰報)를 받은 의주의 선조(宣祖)는 다음달에 권율을 나주목사에 임명했다가 곧 전라감사 겸 순찰사로 승진시켰다. 권율은 황진에게 그대로 남아서 이치를 지키게 하고 전주로 이동하여 1만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자 그해 9월에 임금이 있는 의주로 가기 위해 북상했다.

그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을 점령하여 주둔 중이었고,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해도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또 왜군의 총사령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이미 점령한 서울에 주둔하고 있어서 대동강 이남은 전라도만 남기고 모두 왜적(倭敵)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였다.

권율은 당시 대부분의 장수가 왜적(倭敵)과 맞서 싸우기를 주저하며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주장하자 그들에게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그러나 한성(漢城)은 나라의 근본인 서울이니 하루빨리 탈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서울을 되찾으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발을 묶어 감히 나라의 동쪽을 넘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임금의 뒤도 더 이상 쫓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강화도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가 왜적에게 약한 모습만 보이게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서울을 탈환하고자 수원 독성(禿城)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 뛰어난 전략으로 5개월간 수원 독성 지켜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한성의 왜군 2만명을 거느리고 독성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권율은 병법에 따라 우세한 적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어리석음을 피해 그 이듬해인 선조 재위 26년(서기 1593년) 2월에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이동할 때까지 5개월 동안 독성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유격전(遊擊戰)을 펼치며 왜군을 괴롭히자 왜군도 할 수 없이 한성으로 퇴군했다.

권율이 독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성안에 물이 부족하여 밥 짓기도 곤란할 정도였다. 왜군이 이런 사정을 눈치채고 물길을 막아 성을 고립시키려고 했다. 이를 한 권율은 며칠동안 쓸 수 있는 물을 비축토록 한 다음, 서장대에 높이 장막을 치고 요란하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군마 몇필을 끌어오게 하여 물로 목욕까지 시켰다. 이런 광경을 멀리서 본 왜군들이 밥 지을 물은 말할 것도 없고, 말에게 목욕까지 시키는 것을 보니 성안에 물이 많다고 여겨 스스로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하지만 말을 씻긴 것은 사실 물이 아니라 쌀이었다. 멀리서 보니 쌀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의 기지가 이처럼 대단했다.

권율의 두번째 승리인 독성전투(禿城戰鬪)는 결과적으로 왜군을 한성에 묶어두는 한편 호남에서 서해를 통해 의주의 선조와 통할 수 있는 지대한 전략적 효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왕조 들어 미증유의 재앙을 당한 조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란 중에도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쟁을 멈출 줄 몰랐던 조정의 사간원(司諫院)에서 권율이 무모한 싸움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냈고, 명나라 지원군의 작전에도 차질을 가져왔으므로 파면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얼빠진 자들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권율은 2월에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천명을 주어 용인 광교산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2천 3백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왜적의 공격에 치밀하게 대비하였다. 그는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에게 성을 수리하고 목책을 이중으로 설치하게 하여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석포(石砲)와 화차(火車)를 여러 곳에 배치하고 백병전(白兵戰)에 대비하여 물을 끓일 수 있는 가마솥과 적병의 얼굴에 뿌릴 수 있는 재를 담은 보자기도 수천개나 준비했다. 특히 행주산성 싸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화차는 장성 출신의 호남소모사 변이중(邊以中)이 만든 것으로, 변이중은 화차 3백량을 만들어 40량을 권율에게 나누어주어 대승으로 이끌 수 있게 했다.

한편, 당시의 전황은 명나라에서 이여송(李如松)이 구원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조선 관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니 왜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함경도에서 철수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구로다 나가마사 등 괴수급 적장 대부분이 서울에 집결해 있었다. 왜군은 권율이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서울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으나 곧 그 군세가 보잘것없다고 여긴 나머지 단숨에 공격하여 위협을 제거하려고 했다.

◆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 승전(勝戰)의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

2월 12일 새벽, 척후병이 달려와 "적의 대군이 좌, 우익으로 나누어 각각 홍기와 백기를 들고 쳐들어옵니다!" 하고 급보를 전했다. 이에 권율은 장병들에게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장대(將臺)에 올라가 보니 3만에 이르는 왜군 병사들이 7개 부대로 나뉘어 들판을 가득 덮은 채 쳐들어오고 있었다. 행주산성은 왜군의 선봉부대 1천여명에 이어 뒤따라온 1만여명의 왜군에 의해 이내 포위되고 말았다.

권율은 왜군의 제1공격대가 개떼처럼 짖으며 성으로 몰려오자 크고 작은 총통(銃筒)과 화차(火車),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지신포(地神砲) 등 각종 화약무기를 동원해 발사하도록 하고 궁수들에게도 사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군은 이와 같은 결사적 방어전(防禦戰)으로 왜군의 제1공격대를 궤멸시켰다. 제1공격대가 퇴각하자 잇따라 제2공격대, 제3공격대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조선 관군은 권율의 침착하고 탁월한 지휘 아래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한때 적군이 섶을 묶어 불을 질러 목책 일부가 불에 타기도 했지만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불을 껐고, 또 한때는 승군이 지키던 서북쪽 자성(子城)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권율이 칼을 높이들고 달려가 독전하자 군사들이 무서운 기백으로 싸워 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한때 화살이 모두 떨어져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선박 두척을 이용해 화살을 싣고 와 위기를 면하기도 했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마을의 부녀자들까지 총동원되어 앞치마에 돌을 담아서 날랐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행주치마'의 전설을 낳은 유래가 되었다. 또 날이 저물 무렵에는 경기수사 이빈(李濱)이 수십척의 배에 군사와 식량과 무기 등을 싣고 와 사기를 올려주었다. 이렇게 아침 여섯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아홉차례에 걸쳐 쉴새없이 계속된 적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선 관군은 악전고투를 펼친 끝에 왜군을 격퇴시켰다.

3만이 넘는 대군으로 아무리 공격해도 성을 점령할 수 없자 마침내 왜군은 포기하고 퇴각했다. 왜군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비롯한 지휘관이 3명이나 부상당하고 1만여명에 가까운 병사가 사멸(死滅)하는 타격을 입었는데, 전사자들의 시체를 네곳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니 시체 타는 냄새가 10리 밖까지 퍼져나갔다.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아군은 퇴각하는 적군의 후미를 공격해 130여명의 목을 베고 730여점에 이르는 무기와 갑옷 등을 노획했다.

이 무렵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이여송은 행주대첩 소식을 듣자 자신의 비장을 보내 축하하고 만나보기를 청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거들먹거리며 찾아오자 권율은 성내를 정비하고 엄정한 군기 속에서 그들을 맞으니 명나라 장수들이 권율 부대의 군율이 엄정함을 보고 대국의 장수라며 감히 잘난 척하지 못했다. 다음달인 3월에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저희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왜노(倭奴)들이 조선 국왕의 삼도를 함락시키자 모든 군현에서는 그 위세만 바라보고도 도망쳐 버리고, 어느 한 호걸도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국토의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없더니, 오로지 전라관찰사 권율은 외로운 성을 굳게 지키며 무리를 모으고 여러번 신기한 계책을 내어 때때로 대적(大敵)에게 대항하여 싸웠으니 이는 바로 왕국의 사직을 지탱한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 권율의 명성을 높이고 전설까지 남은 행주대첩

그러자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은 조서를 내려 칭찬하기를, "조선은 본래 강한 나라라고 이르더니 지금 전라도가 적을 많이 참획하였다니 그 나라 백성들이 그래도 사기를 떨칠 만하겠다."라고 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이 권율의 이름을 들으면, "아! 바로 행주대첩을 거둔 명장 아니냐?"고 찬탄했다고 한다.

행주대첩(幸州大捷) 이후 권율은 고산현감 신경희(申景禧)를 선조에게 보내 전투 결과를 보고하니 조정은 권율에게 자헌대부, 조경에게 가선대부, 의승장(義僧將) 처영(處英)에게는 절충장군 벼슬을 내렸다.

행주대첩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야담은 전한다. 하루는 행주나루에 큰 관 하나가 떠내려오기에 건져서 열어보니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권율이 이를 부하 장졸들에게 나누어주니 모두 기뻐하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그런데 며칠 뒤에 똑같은 관 하나가 또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금은보화가 가득 들었으려니 하고 군사들이 건져서 열어보려고 하자 권율이 이를 막고 관을 밧줄로 묶은 다음 톱으로 가운데를 켜게 했다. 두 동강이 난 관 속에는 비수를 든 왜병이 허리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2월 16일에 권율은 파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4월 19일까지 2개월간 주둔하며 파주 탈환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면서 수시로 행주산성 싸움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덤벼드는 왜적을 복병과 유격전으로 괴롭혔다.

3월 중순에 침략의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철?? 명령을 받은 왜군은 명군과 접촉하여 "명나라가 강화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명군이 요동으로 철수한다면 조선의 왕자를 돌려보내고 4월 8일에 한성에서 철수하겠다."고 제의했다. 명(明)이 이를 받아들여 강화사절을 파견하자 왜군은 4월 19일에 일제히 서울을 빠져나갔다. 이를 안 권율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적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려고 했다. 하지만 권율의 작전계획을 들은 이여송이 강화교섭에 방해가 된다면서 부하들을 시켜 한강의 배를 모두 장악하는 바람에 강을 건너 적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명군의 방해 때문에 5만 3천명의 왜군은 수많은 조선 백성을 포로로 이끌고 안전하게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 문관(文官) 출신으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都元帥)에 올라

분노를 속으로 삼키며 권율은 선거이와 함께 다시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해 6월 14일에 김명원(金命元)의 뒤를 이어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문관(文官) 출신으로서 조선의 육군과 해군, 그리고 의병까지 모두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도원수가 된 권율은 왜군 대부분이 영남지방에 몰려 있었으므로 그들을 치기 위해 경상도로 이동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했다.

그 이듬해인 1594년 9월 22일에 권율은 휘하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사천, 고성, 거제도 등지의 왜군을 무찌르고자 했지만 이 작전은 육군과 수군의 손발이 맞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해가 바뀌어 1595년 6월, 권율은 노구를 이끌고 4년 동안이나 전쟁터를 누빈 것이 원인이 되어 기력이 쇠약해진 끝에 끝내 병이 들고 말았다. 권율은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선조는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다가, 7월에 탈영자를 처형한 문제로 탄핵을 받자 사직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파직을 했다.

이 문제는 비겁한 무관(武官) 하나가 싸움에 나가기를 두려워하여 전주에 숨어서 명나라 장수 송대빈(宋大斌)에게 의탁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권율이 전주에 왔다가 이 사실을 알고 당장 잡아들여 송대빈의 간청을 뿌리치고 처형해 버린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군율을 바로잡으려는 정당한 처사였다. 그런데 그 뒤 그의 가족이 전라제찰사 윤두수(尹斗壽)에게 억울하다고 고소를 했고, 이것이 결국 조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뒤에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는 권율과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윤근수의 형이다. 권율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원수 직에서 물러날 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3년 동안 한 나라의 대장으로 있다가 도망병 하나를 처형했다고 해서 벼슬을 내놓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전란이 끝난 것도 아니고, 나라에 인재도 부족했다. 그는 몇달 뒤에 한성부판윤으로 복직되었다가, 다시 11월에는 비변사 당상관과 호조판서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때 명나라와 일본 간의 화평교섭이 지지부진함에 따라 전쟁도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왜군이 좀처럼 다시 물러가지 않고 경상도 남쪽 해안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으며 노략질을 계속하자 도원수를 다시 두어야 한다는 논의 끝에 선조는 권율을 불러 다시 도원수에 임명했다. 1596년 3월이었다.

이때 권율은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지만 선조는 "경은 충성이 지극하고 용략이 뛰어나 이름이 세상을 덮었고, 위풍이 적도들을 두렵게 했으니 경이 아니고 누가 적임자랴. 경이 아니었다면 국가의 운명이 어찌 오늘의 형세에 이를 수 있었으랴." 하면서 특별히 말 한필까지 내려주었다. 권율은 어쩔 수 없이 두번째로 도원수에 취임할 수밖에 없엇다.

도원수 권율은 부임하자 곧 군무에 관한 일곱가지 방안을 올려 왜적의 재침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고 7월에는 장수들을 지휘하여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진압했다.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군과 합세 왜군 물리쳐

그의 예측대로 왜국의 대군이 재침한 것은 그 이듬해인 1597년이었다. 바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이때 왜군은 길을 나누어 북상했는데 선봉대가 충청도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실각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 원균(元均)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패배로 전멸당해 왜군은 전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던 호남지방까지 유린하기에 이르렀다. 한성이 또 다시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한강에서 왜군을 차단하기로 하고 도원수 권율을 급히 불러올렸다. 그리고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과 더불어 왜군의 북상을 막게 했다. 유성룡은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모든 작전권을 권율에게 위임했다. 현명한 처사였다. 그런데 북상하던 왜군이 직산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여 다시 남쪽으로 퇴각하니 조정에서는 권율에게 다시 남하하여 명군과 협력하여 왜군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권율은 명군과 합세하여 울산 도산성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은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을 공격했다. 이때 명군의 사상자가 많이 나자 경리 양호(楊鎬)가 권율에게 조선군 단독으로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지휘권이 명군에게 있었으므로 지시에 따라 권율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돌격했다. 하지만 장졸들이 두려워 머뭇거리자 권율은 본보기로 몇명의 목을 베어 군중에 돌리니 모두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돌격했다. 그 광경을 군막 앞에서 보고 있던 명군 제독 마귀(麻貴)가 탁자를 치면서 "권 원수가 참으로 훌륭하게 군사를 지휘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하지만 성 위의 왜군이 내려다보며 조총을 빗발처럼 쏘아대는 바람에 공성전(攻城戰)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 전후(戰後) 처리에 노심초사하다 63세로 별세

임진왜란(壬辰倭亂)은 결국 왜군의 철수로 끝났지만 권율은 마음 놓고 쉴 틈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여름에 권율은 영남에서 전후 처리에 진력하다가 담질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는 병든 몸으로 더 이상 도원수의 소임을 다할 수 없으니 죽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해달라고 청해 선조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7월 12일에 세상을 떠나니 그때 나이 63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의 벼슬을 추증하고, 그 뒤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일등에 봉하고 영의정 벼슬을 추증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권율의 사람됨을 이렇게 기록했다.

'침착 신중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모에 위엄이 있었다.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에 관대하고 인자하니 사졸들이 진심으로 복종했다. 독산성을 진수(鎭守)하자 경기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행주대첩으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으니 옛날 유장(儒將)의 기풍이 있었다.' 

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권율을 평한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을 통솔하는데 더욱 능하고 화애(和愛)하나 성실하며, 엄하지만 노하지 않았다. 따라서 잘 복종했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의지하게 되었다.'

석수여록(錫修如錄)이란 책도 권율에 관해 이렇게 썼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 진린, 마귀가 모두 공과 더불어 군사(軍事)를 의논하고 가탄하며 정중히 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본국에 돌아가서도 권율의 안부를 물었으며, 왜국의 장수들도 권율의 안부를 물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의 행주산성은 현재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산 이름은 덕양산이었으나 행주대첩 이후 지금까지 행주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산성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권율 장군의 동상이 있고, 위로 올라가면 오른쪽 길에 홍살문이 있으며, 홍살문을 들어서면 권율 장군의 사당 충장사(忠莊祠)에 이른다. 충장은 권율 장군에게 내려진 공신호이다. 충장사 위 대첩기념관에는 행주대첩도와 당시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질려포, 대질려포 등은 오늘날의 지뢰와 같고, 화차는 지금의 다연장 로켓포와 같은 무기이다.

행주산성 안에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을 기리는 승전기념비(勝戰紀念碑) 3기가 있다. 가장 처음 것은 1602년에 권율의 부하였던 최립(崔笠)이 당시의 전투상황을 묘사한 비문을 짓고 명필인 한석봉(韓石峰)이 글씨를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을 썼으며, 뒷면은 권율의 사위 이항복이 글을 지은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번째 비는 1845년에, 마지막 것은 행주산성을 정화한 1963년에 산 정상에 세운 것이다. 권율 장군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유원지 뒷편 안동(安東) 권씨(權氏) 묘역 안에 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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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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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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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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