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Re: 남연군묘에 대하여

회기로 2010. 1. 30. 17:47



남연군 묘

 

본관은 전주. 성은 이(李), 이름은 구(球)이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병원(秉源)이다.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아버지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인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된 뒤 남연군에 봉해졌다.

 

1815년(순조 15) 수원관(守園官), 1821년 수릉관(守陵官)을 지냈고, 죽은 뒤 충청도 덕산(德山)에 묻혔다. 1868년(고종 5) 2회에 걸쳐 우리나라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이 만행으로 국내의 반서양의식과 흥선대원군의 쇄국주의가 더욱 굳어지게 되고, 천주교도들은 엄중한 단속을 받게 되었다. 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였으나, 뒤에 충정(忠正)으로 바뀌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득세에 불만을 품고 왕권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야심으로 아 버지 남연군의 산소를 이장할만한 명당자리를 찾아 나섰다.
10여 년 동안 헤매다 한 지 관이 안내해 준 가야산에 명당을 구해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니 그 후 13년만에 아들이 임금자리에 올랐다.  그가 곧 고종 임금이다.

 그 외에도 여기서 소개하려는 흥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있는데 이묘로 인하여 흥선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는 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리던 흥선이 정권을 다시 찾아 왕권을 회복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를 위해 흥선은 명당자리를 찾아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고 풍수지리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가야산이다. 실로 10년을 거쳐 찾은, 후대에 왕이 나오는 명당자리인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남영군을 가야산으로 이장한후 흥선은 아들 하나를 더 두었는데 그가 바로 고종임금이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풍수가 육관 손석우옹이 이곳을 자미원(세계를 거느릴 명당터가 있는곳)이라 부르며 자기자신의 묘를 남연군묘 위에다 터를 잡았다.
이곳 답사 포인트는 과연 우리가 알고있는 상식으로 임금이 날자리인가? 이다
기존 풍수지리에서 중요시하는 좌청룡 우백호가 200m이상 멀찌기있고 앞에 물은 인공호수가 있으며
풍수지리책을 뒤져도 도저히 이해를 할수 없는 그러한 묘자리인것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곳이 왜 명당터이고, 왜 아들에게 발복이 안되고 손자에게 발복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소천이 상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출처 : 너와나에 인생 여행
글쓴이 : 소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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