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경주 최부자집에 대한 風水的 一見

회기로 2010. 5. 21. 11:30

 

 

경주 최부자집에 대한 風水的 一見


 경주 최부자 집은 300년 동안 12대 만석지기 부자로 유지해온 집안이다. 이곳 요석궁터(현 최부자집 터)에서만도 7대를 유지해왔다. 그럴만한 이유를 이곳 집터를 보고서 정통적 풍수관으로  조명해보면 龍, 穴, 砂, 水 등 등에 있어서 표현 할 길이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첫째, 용에 대해서 말해 보면 경주 지형이 드넓은 평야지형인데 그 내려온   맥세를 감별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초승달 지형인 반월성 옆에 어줍잖은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점도 정통적 풍수관에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혈에 대해서 보면 주변이 모두 예전 건물지로서 지금도 많은 건물이  남아 있고 하여 정확히 혈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셋째, 사에 대해서 보면 양택지로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뒤가 허하여 바람을 타게된 지형적 입지로 이 역시 전통적 양택입지에도 어긋 난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수에 대해서 보면 반월성을 타고 돌며 유속이 흐려지면서 최부자집을  목성수로 흘러 가게 되는데 약간은 최부자집 터를 치고 나가는 형세이며 그 물이 멀리 비주 하는 듯 하니 역시 결함이 된다.


 怪穴은 天藏地秘라 하늘이 숨긴다 하는데 이 터가 그러한 터 인지는 모르나  아무리 괴혈이 된다 할지라도 이미 발복을 한 곳은  그 이유를 찾아 볼 수가 있다. 다만 그 이유를 좋은 쪽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숨길 수 없으나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라도 만족을 해야 하는 심정이 이 최부자집에 대한 풍수적 소견 이라 하겠다.


1.경주최부자의 시초인물인 정무공 최진립의 생가 터, 그리고 묘와 그로 인한 발복론

  

 무관이자 경영자이며 사회사업가인 정무공의 묘소는 울산 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에 소재하여 있는데 2009년 울산과학기술대부지 뒤쪽 산에 자리 잡고 있다. 가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나 일설에 이르길 기가 왕성한 호미형의 꼬리부분이라고도 하고, 14세손 최 채량 선생 집 뒤로 연화산 밑의 괘등혈로 보기도 한다. 이에 묘소 아래의 연못은 등잔의 기름으로 본다. 또는 연못위에 묘가 존재 하므로 연화부수혈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장풍국임을 이야기한다.

  위와같은 형국과 묘소에 대한 설이 구구하나 밤늦은 시간이라 찾다가 못보고 온 탓에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많은 풍수사들이 이 터로 말미암아 대를 이어 부자로 산다고들 한다.

이 묘소를 통한 감평은 추후 답산을 한 연후에 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선 단지 묘터로 인한 발복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2. 최부자 1대에서 5대 까지 살아오며 부를 축적한 경주 내남면 이조리의 일명 개무덤 마을인데 형산강 상류의 두 물이 만나는 합수부에 위치하고 그 형국이 행주형이라고 하는 교동택 이전의 이조리 양택명당의 발로라는 점이다. 이 터에서 발복하고 교동택에서는 수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터전 역시 집 뒤로 비보림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앙법 개시 , 관개수로의 실시 , 병작제 실시 , 성과급 지급의 실시 , 마름없이 직접       수의 계약 실시 , 공동경작을 통한 공적 경비산출 실시, 사회보장제 실시




3.경주 교동의 집터에 대한 淸園(필자: 安 甲秀 )의 風水的 一見


   교동택은 내남면 이조리의 개무덤 마을과 유사한 형국으로 선조들로부터 이러한 터를 좋아한 것 같다.  풍수에 있어 물을 접하면 부자의 터로 보기도 하는데, 富地 즉 부자의 터란 것은 대개 어둡고 낮은 땅에서 발하는데 평지나 밭에 임하여 물이 가깝고 수려하지 못하여 밝지 않다, 이는 귀지가 높고 밝아 천혈에 속하여 밝은 땅, 즉 용혈과 사수가 청수함을 요하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하겠다.

 교동의 터는 거대한 분지형의공간에 또 평지로 내려와 앉은 공간에 있다. 향교와의 알력이 있어 어사또의 판결에 따라 향교의 지붕보다 1미터 50센치나 낮게 지은 까닭에 대지를 깍고  집을 세우니 더 더욱 낮은 곳에 임하고  가까이 반월성의 등 돌림과 주변사격이 그리 아름답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의 대문에서 보면 앞으로 금체, 그 뒤로 토체의 안이 있는데 이는 대문서 보이지 않는 목성수와 더불어 좋은 생기를 전해준다 하겠다. 즉 토생금, 금생수로 이 집안에 水官財物 즉 재물을 밀어주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 집터의 앞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목성수인데  약간 치고 飛走하는 이 水星에 대해 平岡龍이나 高山龍의 水星論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풍수에 있어 대양을 마주보고 혈을 정하는데 있어서는 물이 만조하는 것을 지극히 귀하다 하는데 이 곳 평양지의 물은 그러한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비록 목성수가 흠이라 해도 보이지 않는 정도의 깊은 곳에 입택한 점 탈살의 개념으로도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의문점은 많으나 해답은 명쾌하지 않다. 순서로 돌아가서 먼저 용의 내려온 脈勢를 보자

 

龍 ---

 평양지라 그리 쉽게 그 맥세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주변의 능묘 조성과, 垓字(해자)의 구성, 반월성과의 상관관계 등 확인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아쉬운 점이 있으나 혁거세가 태어난 곳인 계림의 입지와 그와 연결 된 맥세가 요석궁(현 최부자터이자 이두문자를 창시한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태어난 집터)으로 내려오고 있음은 짐작 할 수 있으며 집터 뒤가 허하여 이 집터를 조성하기 수년전부터 수령이 오래가는 회화나무를 비보개념으로 심었다는 점, 향교와의 알력설 보다는 장풍국의 모습을 취하고자 이 터를 낮게 하여 조성 한 점, 이 땅을 택지 할 시에 친구지관과 함께 동행하여 알아보고 사들인 점 등 을 헤아려 볼 때 현시점에서 육안으로 용을 논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그만한 충분한 맥이 내려왔을 개연성이 있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穴 ---

혈로 인정할 만한 穴證 또한 어렵다.  다만 이 터 역시 맥이 내려온 것을 전제할 때 뒤의 회화나무를 비보림으로 조성하고( 집짖기 수년 전부터 조림하여 일제시대 공출로 거의 다 베어 가기 전까진 뒤가 안보일 정도로 울창한 숲이었다고 전해짐 . 현재 드문 드문 고목이 존재하고 있음) 이를 방풍림으로 의지하여 앞을 바라보면  전통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 되며 집터를 낮게 하여 신축 한 점도 좌우를 배려한 인위적 비보조성의 노력이 컸슴을 확인 할 수가 있는 것이다.


砂 ---

평양지에서 특별히 사격을 논할 필요는 없고 수세를 확인하여 그 물의 분합을 살펴야 하는데 다만 이 자리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土,金體의 案山은 뚜렷하게 재물을 담보로 하는 바 옛 말에 外山(羅城-밖의 산들)이 중첩되고 수려하여도 가까운 안산 하나가 아름다운것만 못하다 하였은 즉 이 안산의 사격이야말로 최부자집의 일점 영광(재물생기의 발로)이라 하겠다.


水 ---

월성을 감돌고 내려온 물이 월정교(신라시대 위쪽의 일정교와 짝을 이룬 다리)를 지나 최 부자집 앞을 가로 지르고 가는 목성수는 반월성 뒤로 해자를 통하여 내려온 물과 만나 청룡방 45도 각도에서 합수하여 집 앞을 흐르다 백호방45도 방향으로 비주하곤 사라진다. 이렇게 생각한다. 재론하는 것이지만 평양지의 물로서 조응하는 듯 한 목성수로서 보고 해자의 물과 합수하여 집터를 전체적으로 감돌고 가니 역시 환포하는 모습이라 생각 되는 것이다. 크게는 지도를 통해보면 반월성의 물이 형산강 하류로 이동하면서 크게 휘감아 돌고 있는 형세이니 이를 범인의 눈으로 보지 못함은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최 부자 집의 전체가 대지2000여 평에 후원이 10000여평이었다는 점을 상고하여 보면 대략 물이 감돌고 있는 공간이 바로 최부자의 집터인 것이다.  첨언하고자 하면 이 터의 목성수는 물이치는 형국으로 볼 때 재물이 빠져 나가는 것인 바 최부자 집의 적선과 베풀음의 양(이러한 행위가 선한일이라 할지라도 재물은 나가는 이치인 것이다)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 地理는 人事와 다르지 않다고 하지 않는가 안산이 조응하여 재물을 주고 이를 잘 받아 보유하여 물이 치는 만큼 잘 사용을 하니 그 만석지기를 오랜기간 유지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가?.재물을 모으기만 했다면 그토록 오랜기간 유지를 못하였을것임은 자명한 일인것이다.


向 ---

미확인


총체적인 풍수적 감평


최부자집은 첫째, 풍수적 眞穴證은 다분히 미약하나 그 실체를 잘 들여다 보면 용에 있어서 충분히 맥세가 내려오고 있고, 그 맥세를 위해 뒤의 허한 부분을 비보림으로 조성 보호 하고 있으며 집중심처에 있어서도  낮게 집터를 조성하여 앞을 가로 지르는 목성수가 보이지 않으니  脫殺水이며, 향교가 반월성의 등을 막아주고 있는 藏風局의 형세를 갖추었다고 본다. 더욱이 토금체의 안산이 뚜렷이 조응을 하니 부를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하고 물에 있어서도  목성수라는 점이 아쉽지만 집터를 크게 휘돌아 감고 돌며  평지라 완만히 흘러들다 돌아가니 입조하는 형세의 수세로써 나눔의 미덕속에 대양의 물처럼 朝進水로써 보아야 하며 평양지의 조진명당으로 볼 수 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최부자집에서 볼 수 있는 풍수적 裨補林과 터를 낮추어 장풍국을 만들고 이 터를 위해 친구지관을 통해 자리를 선정 한 점, 주변과의 마찰을 피하여 건축한 점 등등을 볼 때 인간적 노력의 중요성을 간과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설명을 하여도 음택발복, 양택의 발복을 떠나서 풍수의 본질인 孝 思想과 積德思想을  우리 현시대 사람들이 이 터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최부자 1대조의 우국충절과 애민사상, 그 뒤를 이어 선조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가훈인 육연과 처세를 잘 지켜 내려와 마지막 12대 문파 최준선생의 대에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나라와 교육사업에 헌사 한 점 등은 세계역사상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12대 문파 최준 선생대에 재물을 다 소진하여 끝난 것이 아니라 최 부자집의 만석은 우리국민의 가슴과 마음속에 영원한 부자가 되도록 하였으니 아직도 최부자집의 정신과 재물은 영원하다 하겠다. 마지막(?) 최부자의 용단은 지극한 孝心의 진수가 되었으니 정무공 선조이래 그 후손들의 효심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積德思想으로 積德之家에 必有餘慶이란 말이 이토록 맞는 집이 어디 있겠는가?  임진란 후에 창고를 헐고 솥을 걸어 빈민을 구제하고,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이가 없도록 하며, 당시엔 힘든 소작료제인 병작제를 실시 하고  신 농법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풍요롭게 해주어 지금도 실천하기 힘든 사회복지보장경영을 실시 한 것, 독립자금을 보낸 점,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기증한 점 등은 참으로 대단하고 그 후로 누구도 실현하기 어려운 적덕사상의 실천이었으니 이러한 최부자집이라면 정통적 풍수의 이론에 맞지 않는 땅에 거주한다 하여도 필시 하늘이 그 만백성의 마음을 받아들여 그 음복을 후손에 영원토록 내려줄 것이라 믿는 바이다.



                      전국풍수지리학회 淸園 安甲秀 쓰다.

                                                       2009. 2. 1

출처 : 까꿍의 블로그
글쓴이 : 까꿍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