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왕의 명령,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라!
일제 강점기.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관청.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우리 역사를 송두리째 쥐고 흔들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잔재가 우리 역사 곳곳에 남아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올바른 우리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 놓은 역사를 극복하는 게
오늘의 우리의 과제다.
역사스페셜의 취재진들이
두어달에 걸쳐 끈질지게 요청하여,
일본 정부 기록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공문서관>에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라는
한반도 침략의 주범인
요시히토(嘉仁ㆍ다이쇼), 히로히토(裕仁ㆍ쇼와) 일왕의
옥새가 찍힌 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기관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식민지 지배자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조선사편수회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이와는 전혀 다른 방침을 가지고 임할 것입니다."
- 나카미 다츠오 교수(도쿄외국어대학 동양사 전공)
"1925년부터 1937년에 이르기까지
16년이라는 기간을 필요로 하였고
그동안 사업비는 무려 100만 엔의 거액에 달했다."
- <조선사편수회 사업 개요>
경기도 과천 중앙동 한국사 관련 자료를 연구, 조사하는 <국사편찬위원회>에는
<조선사편수회>가 제정한 <조선사 35권> 원본이 있다.
<조선사 35권>은
<조선사편수회>위원들이 일일이 꼼꼼하게 손으로 적은
2만 4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일본인이 쓴 우리의 역사서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내용을 보면 연대순, 사건, 사건 배경, 등
단순히 모든 시대를 다 통틀어서 기술한 '통사(通史)'가 아닌
중국측과 일본측의 방대한 사료를 첨부한 '사료집(史料集)'이다.
2. 왜 일제는 거액의 돈을 들여 <조선사편수회> 조직했을까?
<조선사편수회>는
일왕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조직했으며
내각에서 구성원을 직접 임명하고,
조선총독부 직속의 기관으로
조선총독이 관리하여
한국의 역사를 식민지 지배자 입장에서 기술했다.
"본 조선사 수사사업은
총독부의 역대 수뇌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인데
이 사업의 완성으로 조선의 정치, 문화, 사회 등 여러 모습 밝혀지게 되었다."
- <조선사편수회 사업 개요>
"조선인에게 일본의 혼을 심어줘야 한다.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면 큰일이므로 영구적, 근본적 사업이 필요하다.
이는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
- 데라우찌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후
조선의 입법, 행정, 군사 전권을 장악한 식민 통치의 최고 권력자였으며
무단통치(헌병경찰제도)로 폭압적 식민지 정책을 펼친 장본인이다.
야마구치시는
일본 정부를 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일본 근대화 개혁)의 중심지이며
이토 히로부미 등 조선 침략의 실세들을 여럿 배출했고,
일본내 강경 우익을 대표하는 아베총리의 고향이기도 하며
데라우찌의 탄생지로
하라가와 마을에 데라우찌의 탄생 기념비가 있다.
<조선사편수회> 구성원은
대부분 도쿄 제국대학 출신의 일본학계 최고의 수재들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도 대거 참여했으며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등의 친일 인사도 참여했지만 그들은 들러리였다.
회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ㅣ
ㅣ --- 고문
ㅣ
위원 -- 간사 -----수사관
ㅣ
수사관보
<조선사편수회>의 회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며,
이는 조선총독부가 이 사업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이 조직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관제역사관을 의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인물로는 일본 최고 두뇌라고 할 수 있는
구로이타 가쓰미, 이나바 이와키치, 이마니시 류 등 세 사람이 있다.
왼쪽부터 구로이타 가쓰미, 이나바 이와키치, 이마니시 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1847~1946)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 교수로
일본 사학계의 거두이며
<조선사편수회>를 처음 조직하고 고문을 맡은
일제 식민지배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400년 전통의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나가사키 하사미 출신으로
이곳은 임진왜란때 도공들이 강제로 끌려와 정착한 곳이며
그의 가문은 이 지방 사무라이 출신 명문가이므로
임란때 참전하여 조선 도공들을 끌고 오는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본다.
"구로이타 집안은 상당히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
규슈에 정착한 후 오무라 가의 무사가 되어 계속 이어져 내려왔으며
충성심이 깊은 가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시구치 사또시 위원(하사미 문화재보호심의회)
그는 일본 고문서학을 체계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서,
일찌기 서구 열강에 열중하여 2년간 직접 시찰하며,
이집트, 그리스 문명이 그들을 지배했던 서구 열강에 의해 발굴된 것에 주목,
식민지 유물과 유적이 식민 통치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체득하여
<구미문명기(歐美文明記)>를 쓴다.
구로이타 중심의 <한국고적조사사업>
그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식민사관 정립에 앞장서
<한국고적조사사업>을 진두에 서서 지휘하며
<조선사편수회>를 계획하고 완성하는 단계까지 헌신한다.
"(구로이타는 귀국후)
사적의 보존 또는 박물관 건립, 고문서관을 세우는 것에 대해 여러 제안을 합니다.
여기에는 유럽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바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 연구 및 고고학 연구가 (그 지역의)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 이성시 교수(와세다대학 문학부)
"<조선사편수회>는 구로이타가 일본에서 <사료편찬소>를 만들 때의 구상,
즉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통치할 때
'사료편찬'이라는 시스템을 한국에서 이용하고자 만든 조직입니다."
- 나카미 다츠오 교수 (도쿄외국어대학 동양사 전공)
"한국은 반도로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 놓여 있다.
그 결과 항상 세력이 있는 나라에 지배를 당해 독자적 역사는 있을 수가 없었다."
- <매일신보, 구로이타 가쓰미 >
"이는 식민사관으로써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여
식민 지배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과거 그렇게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왔으니까
한국 입장에서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게 이상할 게 없고 정상적이다는 논리입니다."
"과거 중국이나 만주의 정복적, 야만적 지배에서
일본의 온정적이며 문명개화의 지배를 받아
한국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이 가능하다는
식민사관을 정당화하는 주장입니다."
-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야마구치시 현립대학에는 <데라우치 문고>에는
데라우치가 한국에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한국은 물론 중국의 사료까지 모아 일본으로 반출한 방대한 책들이 있다.
"1994년경에 한국에서 방문했습니다.
경남대학교에서 와서 기증(?)받고자 하는 자료를 선정하여
해당 자료를 기증(?)했습니다."
- 데라우치 문고 관계자
동국통감(東國通鑑), 퇴계문집(退溪文集), 고려사(高麗史),
여사제강(麗史提綱),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데라우치 문고>에는 우리의 고서, 희귀본이 많으며
1994년 경남대에 일부 반납했다고 하나
그것은 전체의 1/10도 안되는 것이었다.
이바나 이와키치(1876~1940)는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이며 실무책임자로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식민사관의 대변자였다.
그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속
<만철지리역사조사실>에서 일하며
'만선사관'을 개발하고
<조선문화사연구>을 저술한 인물이다.
'만선사관(滿鮮史觀)'이란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독립시키고,
한국사를 만주사에 합쳐서 그것을 하나의 역사로 규정,
거기 존재했던 역사상 여러 국가들을 모두 만주사에 귀속하여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정하며
일제 식민통치 합리화로 도배를 한 사관이다.
"한국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원천이기 때문에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해 병합된 것이며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다."
- 이나바 이와키치
"한국사는
한사군(漢四軍) 이래로 중국의 식민지였으며
한일병합 당시 가족제도 발달 정도로 볼 때
씨족국가에 머문 정체된 사회다."
- 이나바 이와키치
"일본보다 천 년 뒤떨어져 있는 낙후된 조선이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화 될 것이며
일본이 그 조선을 이끌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조 광 교수(고대 한국사학과)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는
기후현 이케다가 고향으로
광복전까지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강의했으며
한국 사학의 거두 이병도(李丙燾)는 그의 수제자였다.
그는 한국고대사에서 '실증주의'를 강조해
고대사 현장 발굴에 열중하며
<신라사연구> <백제사연구> 등
한국고대사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썼는데
결국 한국고대사를 이론적으로 가장 왜곡하는데 기여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李丙燾 1896∼1989)
1927 '조선사편수회'로 국사 연구 시작
1934 진단학회 창설, 대표
1945∼62 서울대 문리대 교수
1955∼82 국사편찬위원
1960 문교부 장관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仁村) 문화상, 5·16 민족상 수상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와 신라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데 앞장섰다.
* 백제 B.C 18년 건국 ---
* 신라 B.C 57년 건국 ---
-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신라는 내물왕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와 신라의 400년의 역사를 부정하여 지워버린다.
"한국사 왜곡의 전도사들입니다.
조선 민족에 대해 올바른 평가보다는 부정적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허무주의, 열등의식을 조장하는 식민사학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 조 광 교수 (고대 한국사학과)
"근대 신학문을 들어서
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석, 이해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삼국사기>를 너희들이 전에 믿었는지는 몰라도,
근대 학문연구 방법론을 도입해보니
다 허구더라고 계도하는 것처럼 말해서,
한국인의 자존심, 민족에 대한 자부심, 애국심, 독립에 대한 열정을
전부 말살시키려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이도학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3. <조선사 35권>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제 1편은 신라 통일 이전인데
단군의 고대사를 삭제하고
신라 혁거세를 시조로 출발하고 있다.
한국고대사 서술에
일본측 사료를 중심으로 하고
그 다음 중국 것으로 입증하면서
한국측 사료는 신빙성이 없어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단군조선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사의 독자성이나 주체성, 독립성을 부정하고
중국역사로부터 한국사가 출발했다든가
또는 고대국가시대 일본의 영향을 강조한 것입니다."
- 박걸순 수석연구원(독립기념관)
각 시대 분량도 불균형하다.
1편 신라통일이전 3권
2편 신라통일시대 1권
3편 고려시대 7권
4편 조선전기 10권
조선중기 10권
조선후기 4권
"전체적으로 배분 자체가 엄청나게 불균형합니다.
우선 조선 이전의 역사가 10여 권, 조선 이후가 24권입니다.
조선시대가 비중 많고
특히 조선의 당파성이 강조된 것은
결국 조선 왕조의 멸망을 합리화시키고
그들의 식민지배를 합리화 하기 위한 것입니다."
- 박걸순 수석연구원 (독립기념관)
조선사는 통사지만 사료집 성격으로 엮어
방대한 양의 일본측 중국측 사료를 인용하여
역사 왜곡의 극대화 전략을 노리는 고도로 계산된 의도였다.
"사료로 하여금 역사 설명하게 해서
자기네 유리한 사료만 뽑아 갖다붙여 설명하며
이 거대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대단히 영리한 방법으로 기록을 인용하며
한국 역사를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죠."
- 이선무 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전 국사편잔위원장)
4.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훼손된 우리 문화재들
일제는 1915~1920년 사이
고적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조선고적도보 15권>을 만든다.
식민지를 알아야 식민지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의도였다.
훗날의 조선사편수회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석굴암과 고려청자의 발굴(?)들이 이때 이루어진다.
이들 고적조사는
보통 유적 발굴 하나에 4~5년 걸리는 데 반해
몇 일만에 끝내곤 했다.
그것은 일제가 동원한 비전문가들에 의한
'마구잡이 보물찾기식 조사'였고
발굴(發掘)이 아닌 '도굴(盜掘)'이었다.
우리의 유물들은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地)>는
신라 문무왕때 창건한 대표적 호국사찰로
최근 일제 이후 77년만에 새로 발굴되고 있는데,
일제때 발굴로 원형이 엄청나게 훼손되어 발굴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춧돌들은 원래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거의 없고
유물은 거의 소실되었으며,
보고서 한 장 없으며
일제는 사찰의 강당지를 통과해서 철길을 내어
원형을 더욱 알 수 없게 해버린 것이다.
일제는
문무왕(文武王)의 화장지인,
<능지탑> 상단부를 허물어
철도공사의 석재로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철도공사에 신라 고분도 훼손했다.
오늘날 <서봉총(瑞鳳塚)>은 비석만 남아있고
봉분은 모두 평평하게 깍여 있다.
<서봉총> 발굴은
1926년 일제에 행해진 최대의 발굴로 금제 유물이 다수 나왔는데,
일제는 이 서봉총 발굴을
고고학자이기도 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에게
이미 발굴한 유물을 다시 묻어서 직접 발굴할 기회를 제공해줌으로써
우리의 유적지를 일제의 외교적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그후 서봉총 봉분의 흙을
일제가 행하는 철도공사에 이용함으로써
보고서 한 장없이 서봉총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금관총(金冠塚)>도 마찬가지다.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굴된
고대 신라 특유의 양식인 돌무지무덤(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 )으로
신라 금관과 더불어 금제귀걸이, 팔찌, 허리띠꾸미개 등 출토되었다.
일제는 유물만 수습하여 4일만에 발굴을 끝내고
거액을 들여 최고급 영문보고서를 만들고 칼라사진까지 첨부한다.
이것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문화적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국제사회를 겨냥한 선전도구였다.
"유물을 직접 서울로 가져가서
그 당시 획기적인 영문 설명서까지 곁들여 최고급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이는 서구 열강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해외 선전용으로 삼은 것입니다."
- 한순섭 학예연구장(국립경주박물관)
"고분 발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상부 봉분의 축조방식, 구조문제입니다.
하지만 당시엔 시간에 쫓겨 일을 했기 때문에
이 큰 고분, 봉분의 흙들을 별다른 조사없이 마구잡이로 파헤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적석목곽분의 봉분이 흙과 돌로 되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쌓았다는 것을 우리 손으로 발굴하기전까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 차순철 전문위원(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33년 함북 동관진 구석기 유적> 발굴 역시 일제의 식민사관과 연관이 있다.
일제는 그동안 우리나라엔 구석기시대가 없고,
신석기와 청동기시대가 같이 나타나는
'금속병용기(金石竝用期)'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는데,
동관진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자,
이를 인정할 수 없음에 발굴을 중지시키고 연구를 금지한다.
<경남 김해 패총>은 일제 강점기에 총 6회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일제가 이 발굴에 거듭 열중한 이유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4세기경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임나일본부라는 외교부를 두고,
그후 200년 가까이 한반도 남부 즉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다는 학설로
역시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김해 패총에서
일본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자
서둘러 발굴을 중지했으며,
같은 의도로 대가야 왕과 왕족의 무덤인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을 무더기 발굴하기 시작해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트럭 두세대분이 되었는데
일본으로 모두 가져갔으며 현재 어디 있는지 모르며
성주, 고령, 창녕, 진주, 함안 김해, 김천 등 가야의 고분을 마구 파헤쳐졌다.
일제는 이런 식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을 정당화 하기 위해
우리의 전 국토는 유린했고 도굴했으며
그 엄청난 유물들은 일본은 물론 전세계로 유출되었다.
<도쿄대박물관>에는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백제 전(塼)과
중국 길림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전(塼)
그리고 신라 금제 귀걸이와 통일신라 기와 등,
이마니시 류가 기증한 보물급 우리 문화재가 다수 소장되어 있는데
'연구'를 핑계로 반출하여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서봉총 유물 발굴 마지막 날은
평양박물관장 고이즈미가
일본 기관장들을 불러 술판을 벌이면서
평양 기생들에게 금관과 금허리띠, 금목걸이로 치장을 하고
술접대를 시키는 기막힌 추태까지 자행된 게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1936년 6월 1일 부산일보신문, '금관의 파문 - 국보를 기생의 노리개로'
마지막 단계로
일제는 마구잡이식과 주먹구구식의 발굴로
그들의 의도에 맞게 왜곡한 역사를
대중화 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먼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충남 부여에 주목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9호)를 비롯하여
능산리고분(사적 제14호), 백마강, 부소산성, 낙화암, 고란사, 무량사 등을,
<부여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백제구도고적명승사진첩>을 출간하여
백마강 관광코스로 개발, 적극적인 홍보를 한다.
이때 백제산성인 부여 월명산의 청마산성(靑馬山城)을
<일본서기>를 갖다붙여 득이산성(得爾山城)으로 규정하며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즉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의 일환으로 주입한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역사왜곡, 식민사관이다.
"10월에 370인을 보내어 득이신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와줬다."
- <일본서기, 흠명천황 9년>
<낙화암(落花-巖)>도 멋대로 재해석해서
백제 궁녀 뿐만 아니라
백제에 와 있던 일본 부인들도 함께 몸을 던졌다고 주장하면서
함께 원혼을 추모한다는 의미로 '백화정(百花亭)'을 세우게 했다.
날조한 것을 정설처럼 조선민에게 교육, 세뇌시키는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백제말 <고란사(皐蘭寺)>도 재해석하여
<일본서기>를 들어 3명의 일본 여승이 고란사에 왔다고 주장하며
지어낸 이야기를 고란사 벽화로 남겨두기까지 했다.
"불법을 배우기 위해 시마메, 도요메, 이시메
3명의 여승을 백제로 보냈다."
- <일본서기 숭준천황 원년>
부여에 대한 일제의 적극적인 관광 개발은
일제가 행한 '내선일체'의 식민사관 의도와 계획이었음이
<부여고적보존회> 관계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일제는 식민사관으로 중무장해서
조선총독부라는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식민지 조선민에게 대중화의 작업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삼충사>라는 부여신궁을 건설하며
전국적으로 1,100여 개의 일본신사(日本神社)를 건립한다.
일본신사(日本神社)가 무엇인가?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일본인 고유의 신앙 대상인 신(神),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사당(祠堂) 아닌가!
일제는 그 일본신사에 조선 백성이 일제히 머리 조아리게 했다!
1910년대 무단통치(헌병경찰제)에서
1920년대 문화통치(보통경찰제)로,
1930년대 병참기지화에서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말 사용 금지에서
일본 이름으로 개명, 징용제, 징병제, 학도병제, 공출, 정신대...
일제는 이 철저한 식민 지배를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정당화했다!
조선의 역사를 타율성(타율성), 정체성(정체성), 당파성(당파성)으로 규정,
조선민에게 자국의 역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일본이 우월하다는 왜곡된 역사를 도입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가 정당한 것이며,
나아가 일본이 전봉건적인 조선을 근대사회로 이끈다는
식민사관을 선전, 주입한다.
타율성(他律性)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정체성(停滯性)은
한국사가 왕조 교체 등 제반 사회적·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구조에서는 아무런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봉건사회를 결여했다는 주장으로,
19세기의 조선은 일본의 10세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이며,
당파성(黨派性)은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정치형태인 붕당정치를 일컫는 것으로
조선의 정치는 고질적인 당파성과 분열성을 조장해
조선을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본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미래가 없다.
축적된 역사를 모르면 야만인으로 남고 경쟁력이 없어진다.
우리 의식과 생활 전반에 역사는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을 꽤뚫어보고 미래를 예측케 하는 긍정적인 힘, 지혜가 될 것이다.
- (고두심의 역사스페셜 정리, 모든 분들 복된 나날 이루소서!~~)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조선 공주실록 (0) | 2011.02.28 |
---|---|
[스크랩] "내가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 - 이순신 (1부) (0) | 2011.02.25 |
[스크랩] `참고 참아 하늘만 부르짖었다` - 혜경궁 홍씨, <한중록> 1부 (0) | 2011.02.25 |
[스크랩] 세 여인 이야기 - 선덕여왕, 천명부인, 선화공주 (0) | 2011.02.25 |
[스크랩] 조선의 여성 CEO - `제주평민` 김만덕 (0) | 2011.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