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장군의 영정 (충남 아산 현충사, 장우성 1953년 작품) >
1. 감도는 전운,
그러나 조정에서는 수군 폐지를 논하고...
전쟁이 일어날거란 소문은 1년전부터 있었다.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왜놈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유구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3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 <선조실록, 1591. 10. 23>
조정도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수군 폐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왜적들이 해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 오르기만 하면 민활하지 못하다고 하여
육지 방비에 전력하기를 주청하고
또 대장 신립도 수군을 철폐하자고 청하여..."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다.
"해적을 막는데는 해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결코 폐하여서는 안됩니다."
- <선묘중흥지, 이순신의 장계>
높아가는 전쟁 기운.
조정은 육군에만 주력하였고
이순신은 초조하였다.
"동헌에 나가 별방군을 점검하고 각 관아와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 1592. 1. 3
이순신이 맡고 있는 곳은 여수에 본영을 중심으로,
흥양, 보성, 낙안, 순천, 광양 5관과
방답, 사도, 여도, 발포, 녹도 5포였다.
1592. 2. 19.
이순신은 휘하의 포구 순시에 나선다.
여수 -> 백야곶 -> 이목구미 -> 여도 -> 흥양 -> 녹도 -> 발포 -> 사도 -> 방답순이었다.
"순시하러 떠나 백야곶의 감목관(말 목장 관리)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왔다.
산꽃이 피어 무척 아름다웠다."
- 1592. 2. 19
이순신은 9일간 순시를 했다.
각 포구의 군기와 방어 시설을 철저히 점검했다.
"여러 가지 전쟁 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에게 벌을 주었으며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 1592. 2. 25
"(사도자) 복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섬인지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 1592. 2. 27
이순신은 부하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또한 독려했다.
"방답의 병선 담당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 1592. 1. 16
"석수들이 새로 쌓은 해자가 구덩이가 많이 무너져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하였다." - 1592. 2.
"승군들이 돌 줍는 것이 성실치 못하므로 우두머리를 잡아다가 매를 때렸다." - 1592. 3. 4
이순신의 또 하나의 비책은 '거북선'이었다.
"오늘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1592. 2. 8
"신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 < 당포파왜병장>
여수 선소는 임란전 당시 전라좌수영의 조선소였다.
이순신은 전쟁 발발 하루전까지 거북선의 총통 시험 발사를 했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현자, 지자 대포를 쏘아보았다." - 1592. 4. 12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끙끙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1592. 3. 21
"식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파와서 하루종일 또 밤새 신음하였다." -1592. 4. 2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 1592. 4. 3
"아침에는 통증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 1592. 4. 4
"이순신은 일본의 전운을 감지했습니다.
사전 검열과 점검에 여러모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
눈앞에 다가온 전쟁, 부족한 전쟁 대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2. 결국 전쟁은 터지고!~
조선 육군은 무너지고!~왜군은 북상하고!~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申秀吉(풍신수길), 1536~1598.9.18) 는 왜군 20만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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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이 첫발을 들여놓은 부산의 피해는 처참한 것이었다.
최근 부산지하철 3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임란 초기 처참했던 전투를 보여주는 부산 동래읍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칼과 화살촉, 깨어진 투구들과 더불어
많은 유골들이 나왔다.
날카로운 칼에 매끈하게 잘려 나간 두개골을 비롯해
젊은 여자에서 늙은 여자, 10대 초반의 남자아이 등 다양한 연령의 인골들...
당시 전투에서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짐작케 하고 있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그날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동헌에서 공무를 본 후 활 15순을 쏘았다." - 1592. 4. 13
(화살 1순이 5발이니 75발을 쏜 것이다.)
이순신은 이틀후에 전쟁이 일어난 걸 알게 된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 1592. 4. 15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부산에서도 공문이 도착했다.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한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 1592. 4. 15
이순신은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첫번째 장계다.
전쟁 대비 상황 보고였다.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옵니다'(因倭警待?狀)
"신도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면서
겸관찰사 병마절도사 우도수군절도사 등에게 급히 공문을 띄우고
각 고을과 포구에도 동시에 공문을 돌렸나이다."
4월 18일.
더 심각한 전황을 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오후2시경 영남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 울산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서 성에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전황은 악화일로였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향을 계속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26.
충주전투에서 신립의 조선 육군마저 대패했다.
3. 전쟁 발발 20일만의 단독 출전!~
- 한산도대첩에서 부산포해전까지!~
4월 26일에서 4월 27일 사이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공식 명령을 내린다.
'물길을 따라 적선을 습격하라'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하라'
이순신은 휘하의 장수들에게
4월 29일까지 여수 본영으로 모이라 명령한다. -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그러나 4월 30일이 되어도 이순신은 출동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었다.
"신의 외롭고 단출한 객지의 군사들은
경상도의 물길이 험한지 평탄한지 알 수 없으며
또 신의 소속 전선은 모두 합해도 30척이 되지 못하므로 세력이 매우 약한 형편입니다.
비록 사정은 다급하지만 구원선이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전략을 의논한 후 출발하여 바로 경상도로 나갈 계획입니다."
이순신은 구원선,
해남을 지키던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순신이 부임해서 1년전부터 판옥선, 거북선을 준비했음에도
주력선, 판옥선은 25척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라우수사군과 합류하는 것이 군사력을 보강하는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4월 30일까지 전라우수사군이 출동할 기미가 보지지 않으니 출전을 못한 것입니다."
- 조원래 교수(순천향대학 사학과)
이억기부대는
4월 30일에 배를 보내겠다고 답만 보내고
실제로 오지는 않았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 첨사, 홍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으니 실로 의사들이라 할만하다." - 1592. 5. 1
5월 2일 남해도 순찰대의 놀라운 보고가 있었다.
"남해 현령,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이
왜적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지켜야 할 남해 수군은 도망쳤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는 오지 않았다.
5월 3일 일기에는 얼마나 이억기 부대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나타나고 있다.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아연함을 이길 수가 없다."
출동 준비를 마친 이순신이 이억기 부대만 기다리고 있을 때
녹도 만호 정운이 만나기를 청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한성 가까이 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수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녹도 만호, 정운
망설이던 이순신에게 정운이 출정을 촉구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출정을 결심한다.
다음날 새벽 단독 출정을 결심한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20일만이었다.
"곧 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들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하나라도 씻고자 합니다.
성공과 실패, 잘 되고 못 되는 것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리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 1592. 4. 30 부원경상도장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어선 46척.
전라좌수사군만의 출정이었고
불안한 출정이었다.
이순신의 배는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서 출발해
미조항 -> 당포 -> 한산도 -> 거제도(옥포)로 나아갔다.
5월 7일.
옥포에서 첫 해전이 있었다.
결과는 조선군의 압승이었다.
왜선 26척을 격침하고
2천에서 4천의 왜군을 수장시켰다.
다음날 5월 8일.
합포, 적진포 해전도 승리했다.
이순신은 세 번 싸워서
40여 척의 왜선을 격침하고 대승리를 했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자 없고 부상자 한 명이었다.
이순신은 자신감을 얻었다.
"적들은 일거에 무너져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는데 뒤떨어질까 겁낸 것 같았습니다.
왜적이 만일 배를 타고 본도로 나타난다면
신이 나가서 수전으로써 죽기를 작정하고 막아낼 것입니다."
- 1592. 5. 10 옥포파왜병장
미처 준비되지 않은 전쟁.
임진왜란!
이순신은 조정의 출정 명령을 받고
1주일을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를 기다렸었다.
이순신도 단독 출정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옥포해전 이후 자신감을 얻었고 승승장구 전승하게 된다.
전쟁 초기 단번에 무너진 조선 육군의 실체는 조선 수군을 더 불안케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전승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순신의 철저한 전쟁 준비 덕분이었다!
이순신의 탁월한 전략, 전술 덕분이었다.
임란초 이순신은 바다를 막았다.
이것은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200석을 실은 배 한 척이 평양에 도착하면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3일 동안 그것으로 먹고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만약 부산에서 육로로 운반하려면 말이 500마리 필요하고
그리고 운반할 500명과 호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 나카니시 다케시(역사연구가)
이에 도요토미 특명을 내린다.
"세 장수 연합 군대를 꾸려, 먼저 조선 수군을 쳐라"
진해는 왜군의 수군 전진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진해 웅천왜성에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의해
쿠키 요시다카, 가토, 와키자카 부대 등이 모여 들었다.
와키자카는 거제도 견내량 북쪽에 상륙하였고
이순신의 일기는 이 시기 1592. 6. 10~1592. 8. 24일까지 누락되어 있다.
조정에 보낸 장계를 통해 보면
이순신의 50여 척의 배는 와키자카의 70여 척과 대적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7월 6일에 여수에서 이억기 부대와 합류하고
노량에서 원균과 합쳐 당포를 지나 7월 8일 한산도에 이른다.
이순신은 특별한 작전을 구사한다.
"견내량의 지형은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서로 부딪혀서 싸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왜적들은 만약 형세가 궁해지면 바다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가겠기에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완전히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순신은 5~6척의 판옥선을 내보내 적을 유인하게 한다.
나머지 함대는 섬 그늘에 매복해 있었다.
이순신의 작전은 적중했다.
적들은 추적해왔고...
이순신은 즉각 학익진 전법을 짰다.
이것이 7월 10일까지 이어진 한산도대첩이다.
"여러 장수들이 학의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의 진형을 이루어 일제히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리니,
각각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쏘아대어 먼저 적선 두 세 척을 깨트렸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
적선 59척이 격파되었고, 왜군 9천명이 전사했다.
이틀후 이순신 함대는 안골포에서 또 왜군과 마주한다.
안골포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지형이 좁으며
왜적이 포구 깊숙히 숨어 있어 판옥선이 들어가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순신은 7월 11일부터 7월 12일까지 끈질기게 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한다.
"안골포 성 안팎으로는 흘린 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왜적들의 사상자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 견내량파왜병장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으로 거제도까지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히데요시의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려진 해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계속 되지만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는 이순신의 승리였습니다."
- 조원래 교수(순천향대 사학과)
임란 3개월만에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으나 이순신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1592년 8월 24일 4차 출전을 한다.
"오전 4시쯤에 배를 출발시켜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진 뒷 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목적지는 왜군의 본거지 부산이었다.
왜군은 육로를 따라 부산에서 양산, 조령, 한양을 20일만에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고 있었으나,
이순신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 당하자 후퇴하여 부산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부산포의 왜군을 격멸시키면 전쟁이 끝낼 수 있을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조선 육군의 지원이 없었습니다.
수륙 양면으로 공격했다면 왜군을 격멸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일본군의 저항도 거셌습니다."
- 조원래 교수(순천향대 사학과)
"왜적들은 총을 잡고 활과 화살을 옆구리에 끼고 모조리 산으로 올라가서
여섯 군데로 나누어 진을 치고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총알과 화살을 쏘아대는데 마치 비 오듯 우박이 쏟아지듯 했습니다.
때로는 큰 철환을 쏘았는데 그 크기가 모과만 했으며
또 굵은 자갈이 날아왔는데 그 덩어리 크기가 사발만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 부산파왜병장
조선 수군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6명 전사에 22명이 부상을 당했다.
특히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한다.
정운은 이순신의 무과 6년 선배로
이순신이 가장 아끼고 신뢰했던 선배였다.
이순신은 애통해한다.
그의 사당을 지어줄 것을 선조에게 요청한다.
"배를 돌릴 무렵 탄환에 맞았는데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부질없이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지극히 애통한 일입니다."
부산전도 압승이었다.
적선 470여 척중 120여 척이 격침되었다.
왜 수군 전투력의 1/4이 격퇴된 것이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치밀한 전략과 전술, 그리고 결단력!
이순신의 승리였다!
한산해전과 부산해전으로 임진왜란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이후 왜구들은 남쪽으로 가서 성을 쌓고 길고 긴 농성에 들어간다.
4. 부하들의 희생을 가슴 아파한,
조선의 장수 이순신!~
이순신은 절대 열세의 전황을 역전시켰다.
왜의 침략 야욕을 꺽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순신 개인의 아픔과 고통은 적지 않았다.
이순신.
그는 장수이기 이전에
한 여인의 아들이었고
지아비였으며
아버지였다.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
희생된 부하 장수에 대한 애틋한 마음,
호령하던 장수 이전에 예민한 감성을 지녔다.
이순신은 정운의 제사를 직접 지낸다.
"녹도 만호(정운)의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 1592. 2. 22
"그간 세 번 싸워 이길 때 매번 앞장 섰고
부산의 큰 싸움에서도 몸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잊어버리고
앞장서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 하루 종일 싸웠는데 힘껏 쏘아 댔기에 적들은 꼼짝도 못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 청 정운 추배리대원사 장
이순신은 직접 제문을 썼다.
"믿고 의지했던 것은 오직 그대였는데 앞으로 어이하리!
진중의 여러 장수들 원통해하기 그지 없다오!
백발의 늙으신 부모님은 장차 그 누가 모실지!
황천까지 뻗친 원한 언제 가서야 눈을 감을런지!
아 슬프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잔 술 바치니 아 슬프도다!~"
이순신은 엄격하고 무서운 장수였다.
군율을 어기는 부하는 가차없이 사형과 곤장을 쳤다.
그러나 부하들 희생앞에서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으나
정작 나라가 아무것도 못해줄 때
이순신은 스스로 부하를 챙겼다.
부하의 부상을 낱낱이 장개에 밝히고
심지어 노비라 하더라도 소속과 실명을 밝혔다.
특히 전사자 대우는 각별했다.
"시신은 배에 싣고 돌아가서 장사 지내주게 하고
그 처자들은 달리 구휼하는 법에 따라 구휼해주도록 지시하고
부상자들은 약물을 나누어주어 충분히 치료해주도록
장수들에게 각별하게 엄하게 지시하였습니다."
- 부산파왜병장
"이순신!
저 강인한 이순신에게
저렇게 인간적인,
저렇게 섬세하고 여린 부분이 있었구나!"
- 신병주 교수
가족에 대한 걱정도 일기에 절절하다.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피난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 1593. 8. 2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른 데다가..." - 1593. 8. 2
"아들 울이 학질을 앓는다는 소식도 들었다." - 1593. 8. 23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보냈다." - 1594. 8. 27
<난중일기> 첫 시작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이순신의 정성은 지극했다.
이순신은 4형제 중 셋째였다.
두 형은 여섯명의 조카를 남기고 일찍 죽어
어머니께 이순신은 버팀목이었다.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 1592. 1. 1
"아산 어머니께 문안드리려고 나장 두 명을 보냈다." - 1592. 2. 14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홀로 객창 아래 앉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 1592. 2. 14
전남 여수 웅천동에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가 있다.
전쟁중 어머니를 가까이 모신 것이다.
"종 목년이 해포에서 왔는데 이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답장을 써서 미역 다섯 동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 1592. 5. 18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이다." - 1593. 6. 1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 1594. 1. 1
5. 새로 발견된 을미일기 32일치!~평범한 인간 이순신
이순신 종가에 전해오던
이순신에 관한 책은 크게 10권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총 7권,
서간집 1권,
장계 1권,
그리고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 1권.
이순신 일기는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임진일기>에서 <무술일기>까지 7권이다.
임진년 1월 1일부터 ~ 무술년 11월 19일 전사하기 이틀전까지,
2천 5백 3십 9일간의 기록,
13만 여자의 방대한 기록으로
조선의 장수이자 한 인간의 기록이다.
이순신 사후
197년이 지난
정조때 <충무공이순신전서>를 엮으면서,이 7권의 일기를 <난중일기>라 묶어 이름 붙인 것이다.
최근 <난중일기> 가운데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을미년 32일치 일기가 <충무공유사>에서 더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충무공유사'는
17세기말 이충무공의 이야기를 발췌하여 엮은 책으로,
9장으로 되어 있는데,
새로이 1595년 <을미일기> 32일치가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을미일기>에는 인간 이순신의 일상과 개인 감정 토로 등,
장수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내면의 고뇌와 심경이 솔직히 담겨 있어
그의 진면목을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순신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도 있다.
"꿈에 아버님이 나타나셔서
13일 혼례를 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
비록 4일 뒤에 장가를 보내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
말씀하시는 모습이 평소와 같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것을 홀로 앉아서 회상하노라니 아주 눈물을 금치 못한다." - 1595 1. 12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적나라한 감정도 표현되어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 1595. 11. 1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효심도 드러난다.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 못하니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 - 1595. 6. 4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고음천에 도착하였다." - 1595. 1. 11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 1595. 6. 9
그리고 건강과 건강상의 기록도 보인다.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 1595. 3. 3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溫白元) 4알을 먹었다." - 1595. 6. 4
충무공 이순신!
우리 역사상 이처럼 추앙받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장수도 이순신처럼 긴 전란에 이긴 이는 없었다.
가장 내밀한 일기를 쓰면서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기를 쓰는 순간은 자신과 가장 깊숙히 만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숱한 생각과 고통을 정리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정제하여 나갔을 것이다.
자신을 던져 나라와 백성을 구한 이순신.
그러나 그는 부하의 희생 앞에서 울었고
가족 걱정에 잠 못 이룬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독했던 조선의 장수였다.
한 개인의 7년간의 일기이자 전란 기록.
난중일기!
이 기록이 있었기에
박제화된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우리를 더 매료시키고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여기게 한다.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진중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못 이루는 밤
새벽달이 들어와 활과 칼을 비추네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 한국사전 정리 (좋은 가을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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