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天 金氏 昇平府院君 金유(순천 김씨 승평부원군 김유) [종가기행 41] 12대 종손 김석연(金錫淵) 씨 충신·열녀 배출한 명문가, 묘소 손수 돌보며 선대 유업 계승 효심으로 30여 년간 부모 봉양… 유물 보존에도 남다른 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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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선 중기 인조반정 1등 공신인 북저(北渚) 김유의 12대 종손이다. 북저는 김여물 장군의 맏아들이기 때문에 종손은 김여물 장군의 13대 종손이 된다. 김여물, 김유, 김경징으로 이어지는 혁혁한 조상을 위로 받들고 있는 순천 김씨의 대표적 인물의 종가와 종손과 첫 대면했다.
봄날 저녁 무렵 안산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자마자 뜻밖의 이야기부터 말했다. “제가 사실 우리 문중의 김승연 교수님의 소개가 아니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문서 자료도 보여주지 않겠습니다.” 키가 크고 준수한 호남형의 종손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았다.
북저의 종가에는 공신녹권을 위시해 초상화 등 수많은 고문서 자료가 쌓여 있었다. 자연히 연구를 빌미로 이들 자료에 접근하려는 사이비 학자와 교수들이 많았는데, 자료가 유실되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물론 이는 전국 대부분의 종가들이 겪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저명한 교수들조차 그 동기야 어떻든 간에 가져간 자료를 반환하지 않아 후손 가에 피해를 끼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신축 아파트 단지 내의 종가로 자리를 옮긴 후 종손에게 사정사정 하여 귀중한 고문서 자료를 보았다. 보관 상태가 양호해 그간 종손이 얼마나 선친을 잘 모셨으며 세전(世傳) 문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목록상으로만 보았던 정사공신 교지 원본도 포함돼 있었다.
고색창연한 그 교지는 문화재로 등록조차 안 된 인조반정공신 교서였다. 1등란의 첫머리에 김유가 올라 있고, 그 다음으로 이귀(李貴), 그리고 두 명의 성함은 검게 지워져 있었고 다음이 신경진(신립 장군의 아들), 이서, 최명길, 구굉, 심명세 순이었다.
종손은 검게 지워진 부분을 가리키며 “이것은 나중에 반역을 저지른 사람들을 지운 흔적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종손은 당시 상훈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한 철성군(鐵城君) 이괄(李适)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金自點)과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심기원(沈器遠)이 그들이다. 이괄은 2등 공신의 수위(首位)에 올랐었다.
인조반정 공신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이들 주도세력에 오성 이항복의 제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지천 최명길, 조암 이시백 등이 대표적이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은 2등에 책록되었는데, 1등 공신 이귀의 아들로 후일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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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길쭉하고 귀가 큰 게 특징이다. 종손은 “제 부친이 승평부원군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며 “우리 종가에는 후손들이 수를 해요, 조부가 80세, 부친(金商億, 1905-2003)이 99세에 세상을 떠났고, 고모 세 분도 모두 90수를 누리셨어요”라고 말했다.
종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8년간 고향에서 중고자동차 매매업에 종사했다. 95년 이후 줄곧 안산 시흥지부장 직을 맡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성실함을 알 수 있다. 선대에 대해 물었다.
“저는 우리 조상에 대해 18대까지는 휘자나 간단한 이력을 그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마 자기 조상이라고 해도 휘자를 그대로 알기는 어려울 거예요.” 이는 예전에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희소한 예가 되었다. 예전에는 자기 조상은 물론 나라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인물 등의 집안 내력을 아는 것은 행신의 기본이 되었다.
과거시험 답안지에도 기본으로 적는 것이 자신의 조상과 외조상이었다. 그리고 선비들은 평소 팔고조(八高祖)를 찾아 적어보는 열성도 보였다. 사실 자신을 중심으로 위로 올라가 여덟 분의 고조부를 적어보면 어지간한 주변의 족보를 알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자신의 조상의 휘자를 외우는 방법은, 항렬이나 돌림 글자를 먼저 이해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종손은 5남매의 막내로 외동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 살아 영등포초등, 대신중, 동도공고를 졸업했다. 평생 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종손은 묘소를 돌보는 일만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실제로 종가의 산소는 그 규모가 만만하지 않다. 처음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종손은 외동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소분 성묘 일에 동참시켜 교육의 장으로 삼는다고 한다.
종손은 스스로 자신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인조반정 1등공신인 선대 조상에게는 적지 않은 사패지가 내렸을 것이고 그곳이 현재의 경기도 안산이다. 재산으로 따진다면 막대한 규모라 자수성가와는 어째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저희에게 선대 토지 약 40만 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연유로 그 대부분이 없어져버렸어요. 장자 상속의 전통은 형제 간의 상속으로 변질되기도 해 그렇게 된 것이죠. 제게는 물려받은 땅이 거의 없지만 단 한 평의 땅도, 그곳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도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종손의 안타까움과 결연한 의지를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종손이 꺼낸 자료 가운데 북저집(北渚集)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목판본 문집에는 하단부가 불룩했다. 그곳에는 페이지 번호가 붙여져 있었는데, 이는 영인본으로 제작할 때 장치한 것이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문중 일에 열심이었던 작은아버지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당시 300부 한정판으로 제작한 책 중 한 권을 십여 년 전에 헌책방에서 구한 적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북저 종가에서 본 페이지 번호가 붙어 있었다.
종손은 효심도 남달랐다. 79년 고향으로 내려온 이후 30년 가까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종손은 경주 김씨(1953년생)와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차종손은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했으며 두 딸은 대학에서 영문학과 아동학을 전공했다.
종가의 가슴 아픈 이야기
사세충열문(四世忠烈門)이 서 있는 집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오랑캐에 욕을 당하느니 죽는 편이 옳다는 생각으로 강화도 앞바다에 몸을 던진 김여물 장군의 부인 평산 신씨, 그리고 며느리인 북저의 부인 진주 류씨, 그리고 손부인 고령 박씨, 증손부인 진주 정씨의 4세들이 그 주인공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에 있는 충열문은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
김유 1571년(선조4)-1648년(인조26)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인조반정 1등 공신… 대제학 지내 '문무겸전'
인조반정1등 공신, 대장 김유. 무인(武人) 출신 내지 무인기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긴다. 실제로 실록에 보면 ‘성품이 강건하고 악을 미워했다’고 되어 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옹립해 왕위에 오르게 한, 성공한 유혈 혁명. 그때 북저의 나이는 53세였다.
1623년 3월 12일 아들 김경징 및 신경유, 조흡, 이성연 등과 함께 창의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간 것이 반정의 대미였다. 반정 이후 모든 수습책과 제반 군무는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반정 직후 그는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맡았고 그해 겨울 정사공신1등에다 승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북저의 일생을 보면 그런 이미지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북저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 이는 그의 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을 쓴 동명 정두경과 백헌 이경석이 내린 객관적 평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충주전투에서 신립 장군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 투신 자결한 김여물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절의 피를 타고난 셈이다. 22, 23세 때 부친과 모친상을 잇달아 치르는 비운을 떨치고 26세에(선조28·1596년) 정시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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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이후 이귀 등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고 마침내 북저는 맹주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반정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후일의 인조대왕인 능양군(선조의 손자)이 북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의 집에는 능양군이 선조의 어전에서 그렸던 말 그림 한 폭이 오성 이항복에 의해 전해져 있었고, 북저의 부인인 진주 류씨가 극진하게 대접해 능양군을 감동시켰다.
마치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삼형제의 고사를 떠올리며 객주(客主)의 예를 행했다고 하니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인조반정은 실패할 위기가 있었지만 그의 임기응변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했다. 반정 후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그는 병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이란 임무를 띠고 수습에 나섰다. 두 직책은 문과 무에 정통해야 수행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오직 인재를 발굴하고 붕당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했다.
“대신은 체면을 중시해야 한다. 체면이 한번 무너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혁명 이후에는 논공행상과 사회 질서를 둘러싸고 잡음이 있기 마련이다. 공신들에 의해 주도된 죄인들을 잡아 다루는 일은 자칫 저항과 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는 그것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양관 대제학과 정사공신 1등에 승평부원군으로 봉해진 것도 인조반정이 단행된 그해였다.
양관 대제학은 문신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이다. 인조는 그를 특별히 신임해 대궐 밖 가까이 이주하게 하여 반정 이후의 남은 불씨를 끄도록 명했다. 인조는 1634년 3월 북저(64세·좌의정 겸 도체찰사)와 이귀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술이 절반쯤 되었을 때 세자와 대군을 돌아보고, “너희들은 이 두 사람을 마치 부형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3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하루에도 두 번씩 북저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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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정축년에 한양으로 돌아온 북저는 두 가지 나쁜 일을 당했다.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고, 북저 자신도 인조반정 3등 공신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때 부총관 직을 맡은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 1587-1646)의 상소로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
그러나 인조는 “이번에 성을 지킨 것은 김 아무개(김유를 지칭)의 힘이었다”고 비호했고, 거듭된 신하들의 주장으로 문외로 송출했다가 이듬해에 특명으로 예전의 직책으로 서용했다.
거듭된 공신들의 반역으로 더욱 심란해진 인조는 결정적으로 1등 공신이었던 심기원이 인조22년(1644)에 반역을 꾀하자 “공이 높고 덕이 많으니 광제(匡濟)의 책임을 경을 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라며 영국공신(寧國功臣)에 봉함과 아울러 영의정을 내렸다.
이때 북저는 8번이나 차자를 올려 극력 사양했다. 국왕 또한 승지를 보내 간곡한 말로 전교를 내려 직에 나오도록 하였지만 북저는 20여 차례에 걸친 사직으로 끝내 직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인조는 공훈 훈적 삭제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74세의 원로대신과 국왕은 무승부를 이루었다. 이듬해 북저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북저의 일생을 한마디로 평하면 뭘까. 반정 1등 공신이 먼저 떠올랐으나 어쩐지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그의 졸기를 읽다가 ‘일대종신(一代宗臣)’이란 단어가 눈에 번쩍 띄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한 시대를 대표한 신하’라는 의미다. 더할 수 없는 칭찬이다. 신하라는 의미의 조신(朝臣)에서 출발하여 공신(功臣), 중신(重臣)을 거쳐 최고의 경지가 종신(宗臣)이요 고굉지신(股肱之臣, 임금의 팔과 다리같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하)이다.
북저의 자료를 보면서 문무겸전의 연원이 궁금했다. 그는 우계 성혼의 문인이며 귀봉 송익필에게도 사사를 받았다. 우계의 학문과 귀봉의 시적 소양을 유감없이 받은 것이다.
또한 그는 서경(西坰) 유근(柳根, 1549-1627)의 사위였다. 서경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예조판서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국왕을 호송한 공을 세운 당대의 대표적 정치가였다. 그의 딸이 북저의 부인인데, 시집오기 전 내훈은 물론 유가의 경전과 의서 등을 익혀 후일 인조반정 과정에 내조의 지혜를 발휘했다. 그의 문집을 보면 시와 차자, 상소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북저는 글씨에도 뛰어났다.
우암 송시열은 그를 중국 최고 명필들인 종유와 왕희지에 비견할 만한 경지라고 높였다. 북저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소차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25년간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다섯 번이나 상부(相府)에 들어갔고 세 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문필을 총괄하는 명예로운 자리인 대제학을 지냈다는 경력으로 볼 때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기조어(苔磯釣魚)라는 시는 문집 1권 머리에 올라 있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日日沿江釣 날마다 강가에서 고기를 낚다
呑釣盡小鮮 낚시에 걸리는 건 모두 피라미
誰知滄海水 뉘 알리 저 푸른 바다 속에는
魚有大於船 배보다 더 큰 고기가 있는 줄.
초년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시로 웅대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젖을 떼고 밥을 먹을 적에 이미 문자를 지을 줄 알았는데, 그 구법을 본 사람들은 벌써 그 비범함을 알았다’고 할 정도의 천재성을 가졌던 이가 북저다.
21세 때는 향시에 장원을 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그의 마음 저편에는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었던 듯하다. 그의 문집에는 야좌(夜坐), 유회(有懷), 감회(感懷) 등의 시제들이 자주 보인다. 어리적 꿈꾸었던 배보다 더 큰 고기를 잡았다고 생각되는 그에게도 시련과 아픔이 있었기에 이런 시를 남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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