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 서한정 1407년 (태종7)-1490년 (성종21)
"우리는 공신(功臣)의 후예가 아니라 충신(忠臣)의 후예다."
이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이 말은 실제로 새내 서씨들의 강한 자긍심이 깃든 말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 행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그를 부정하고 단종을 위해 절의(節義)를 지킨 집안이기 때문이다. 입향조인 돈암 서한정(1407-1490)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했다.
사실 돈암은 세조의 계유정난 당시 벼슬을 하고 있던 관료는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시골이었던 경북 달성 화원 출신이며 성균관 진사 신분으로 유학 중인 일개 선비였다. 그러나 47세 되던 해 계유정난을 당하자 단종과 명운을 함께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고 믿었고 그 길을 의연히 걸었다.
그는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를 펼쳐보고 싶은 꿈을 접고 고향을 떠나 당시 '반역의 고을'로 낙인찍힌 소백산 산중 오지인 순흥(順興) 땅을 찾았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러한 돈암의 속내를 알지 못했고, 자신도 세상에 그 뜻을 드러내 이름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속 깊은 선비들과 학식이 있는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돈암의 선택이 조선판 백이숙제와 다를바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침내는 계룡산 숙모전(肅慕殿)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는 곳에 여러 지사들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이 지역에서도 서원을 세워 그의 고결한 얼을 기리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학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등에 의해서도 기려졌다.
돈암이 남긴 시 가운데 신거(新居)라는 시가 있다.
어느 곳에 이 몸 감출 별천지 있을까
늦게서야 퍽 좋은 터를 택하고 보니
온 세상 모두들 효자촌이라 부르네.
왕실의 정통성을 뒤엎고 수많은 충신을 죽인 세조가 세상의 중심에 서서 버젓이 통치하고 있는 현실, 그러한 잘못된 현실을 돈암은 인정할 수 없으니 말하기조차 싫었을 것이다. 마치 중국의 만고 충신인 백이숙제가 수양산을 찾는 심정으로 그도 아무도 찾지 않을 심산유곡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기탁할 장소를 찾았다.
고향도 버리고 한양도 떠나 택한 오지 마을엔 자신의 속내를 헤아려 줄 안동 권씨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참으로 효자였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하고 사는 마을이라 여겨 비로소 자신이 살 곳임을 알고 터전을 마련했다는 게 이 시의 내용이다.
단종 복위를 위해 의거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이웃 마을인 순흥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거사에 실패하자 그 마을은 참혹한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돈암은 도리어 이곳을 선택해 살 곳으로 삼았다. 자신과 후손들이 현실적으로 감내해야
할 지역적 불리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곳을 택한 것이다.
전국에 마을 노래가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새내 마을의 동가(洞歌)는 실제로 주민들에게 교육되고 생활 속에서 불려지는 살아 있는 노래다. 이 노래는 서정순 씨가 산파역을 맡았다. 오백년 역사가진 고향이라네 아름다운 산천을 자랑하오며 행복을 찾아서 굳세게 나가세 학가산 바라보는 우리 사천리 죽계수 맑은 물은 흘러서 가네 향기로운 향토를 더욱 빛내며 희망을 찾아서 씩씩이 나가세 돈암 서한정을 배향한 서원이다. 조선 고종 때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구고서당(九皐書堂)이라는 현판으로 바꿔 달았으며, 서원 복설을 하지는 못했으나 현재 사당인 상절사(象節祠)를 세덕사(世德祠)로 삼아 춘추로 향사를 이어오고 있다. 당초 이웃 마을인 구구리 도인봉 아래에 건립되었으나 훼철 이후 퇴락해지자 종택이 있는 새내로 남은 건물만을 옮겨 세웠다. 구고서원 현판과 여러 부속건물의 현판은 책실(冊室)에 보관했다가 근래에 소수박물관에 위탁해 보존하고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석간(石澗) 샘이다.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샘으로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식수 또는 생활용수로 활용되고 있다. 음양천은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겨놓아 누구라도 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 유래가 있다. 전통대로 유사를 정해 일 년에 한 번씩 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 후기 문과에 급제한 서재무(徐在懋)가 지은 음양천 중수기문(重修記文) 일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맑고 뿌연 것 반으로 갈렸네 맑은 것은 거울과도 같고 뿌연 것은 하늘의 구름인 듯 휘저어도 서로 섞이지 않고 담으면 고운 무늬가 생기네 한여름엔 얼음처럼 서늘하고 엄동에도 온기가 스며있다네 물 맛 조금도 변하지 않으니 샘 근원 깊고도 멀어서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