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남씨 정일재 남회, 1391년(공양왕3)-? 호는 정일재(精一齋)
필자가 정일재 남회를 안 것은 우연이었다.
교과서나 역사책에도 없고 인터넷의 인물정보 코너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역사인물에 대해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인사동 고미술품 수집가의 사무실에서 한 장의 무과급제 교지를 본 적이 있었다. 색이 바랜 합격증서는 진품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과거에 급제해 내리는 합격증서는 ‘교지(敎旨)’라고 쓰여 있는데 거기에는 ‘왕지(王旨)’라고 되어 있었고, 영락(永樂) 18년(1420년, 세종2) 3월 22일이라는 기록이 말미에 있었다. 지금부터 585년 전인 세종대왕 당시의 일이다.
필자는 당시 세종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사람의 합격증서 원본을 본 셈이다. 소유자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 왕조실록에서 관련 자료를 찾다가 깜짝 놀랐다.
세종27년(1445)에 국왕이 강원감사에게 이르기를 “동해 가운데 요도(蓼島)가 있다고 한 지가 오래고 그 산의 모양을 보았던 자도 많다. 내가 두 번이나 관원을 보내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는데, (중략) 남회가 말하기를, ‘연전에 동산현(洞山縣) 정자 위에서 바다 가운데 산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현리(縣吏)에게 질문하니 대답하기를 ‘이 산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라고 하기에, 그 아전을 시켜 종일 관찰하게 하였더니 구름이 아니고 실제가 산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경(卿)은 남회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해서 찾으라”고 하였다.
놀랍게도 세종은 현재의 독도 존재를 듣고 심증적으로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다만 남회만은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관리까지 동원했다. 강원감사가 그러한 사실을 조정에 알렸고 이에 국왕의 명으로 그 섬을 찾게 했다.
이제 남회에게 그 일이 떨어진 것이다. 실록은 그 결과를 이렇게 쓰고 있다. “남회가 바다를 전부 둘러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요도가 있다는 말은 허망한 것이다. 정말 바다 가운데 있다면 눈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볼 터인데 어째서 남회만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가.” 독도 탐색은 그 당시 이쯤에서 ‘말도 안 되는 일’로 종결되었다.
세종이 ‘요도’라고 말한 독도를 지칭한 명칭은 성종실록에도 보인다. 무릉도(茂陵島) 북쪽에 요도가 있다고 했다. 1997년 해양수산부에서 펴낸 독도자료총람에서도 남회가 요도를 발견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사료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남회가 독도로 추정되는 요도라는 섬을 발견한 때는 그가 무과에 급제한 25년 뒤의 일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경주에서 부친을 따라 울진으로 왔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사람으로 바다를 이해하고 관료로서의 보고 체계나 행정 절차에 식견이 있던 이였다.
그런 그가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왕명을 받들어 실사를 했을 정도로 확신했다면, 분명 독도를 발견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독도 발견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하고 그의 삶은 끝났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의 삶에 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못하다. 다섯 고을의 수령으로 산 이력 이외에는 관직이나 심지어는 죽은 해까지도 미상이다.
그는 1391년에 태어나 26세 때 생원이 되고 30세 때 무과에 급제한다. 기록에 의하면 생원이 된 이후 줄곧 문과에 응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꿈을 이루지는 못했고 어느날 방향을 틀어 무과에 응시해 단번에 급제한 것이다. 세간에는 ‘남정승터(南政丞基)’ 등 그가 제주목사보다는 상위 직급에 이르렀다는 구전이 있다.
13대 종손인 남유주(南有柱)가 간략하게 정리한 연보(年譜)를 보면, 조선 태조 등극 1년 전에 태어난 사실과 81세 때까지 살았던 사실을 적고 있으며, “옛 문헌에는 90세 가까이 사셨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하게 어느 해에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어 한없이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여전히 몰년(沒年)은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연보상으로는 생원이 아닌 진사에 합격한 것으로 적고 있고, 또 왕조 실록에까지 올라 있는 세종20년(1438) 4월 21일에 울릉도 순심경차관(巡審敬差官)으로 임명되어 그 공으로 의복 1벌을 하사받은 기록까지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그도 정일재와 관련된 문헌을 널리 수습하지 못한 듯하다.
정일재는 무과 출신이지만 유학자의 삶을 선택하고 실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청백함이다. 그의 이력은 항상 청백이나 애민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그리고 동년배인 점필재 김종직과의 교유(南公 吾詳知, 남공은 내가 잘 안다)도 그러하다. 또한 그가 증산현감, 정의현감, 낙안군수, 창성부사, 제주목사 등 다섯 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하면서 보인 업적이 그 증거다.
그는 제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단지 대나무 몇 그루만을 이삿짐에 넣었다. 그는 대나무의 군자다운 실상을 좋아해 고향 정원에 심었다. 울진 지방에는 지금 대나무가 도처에 우거져 있다. 그때까지 울진에는 대나무가 없었다 한다. 울진의 대나무는 제주목사를 지낸 남회가 처음으로 심었다는 것이 야사에 전해 온다.
유학자로서의 모습은 동주계(同舟契, 1416, 태종16)를 결성한 것으로 두드러진다. 동주계는 그가 중심이 된 9개 성씨(10개 본관) 11명의 선비들이 서울에서 영남으로 내려오면서 서로 우의와 선비정신을 갈고 닦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동료 선비들과 같이 초시(初試)에도 합격하기 전인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었다. 여기엔 제주목사에 이른 그를 비롯하여 영의정 남재(南在)의 손자로 의령 남씨 직제학공파의 파조(派祖)가 된 남간(南簡) 등 여러 훌륭한 인물이 참여했다. 직제학의 후손 중에 대제학이 네 분이나 나왔다 한다.
동주계의 지명도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그 지역의 이름난 학자요 정치가였던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 발문으로 기렸고 남재명(南濟明), 남형대(南衡大), 조술도(趙述道), 강필효(姜必孝), 남일우(南一祐), 남정환(南廷煥), 김규묵 등의 서발(序跋)이 줄을 이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이 계안(契案)이 조선 시대에 대표적 것으로 알려진 우향계(友鄕契, 徐居正 序文)보다 무려 62년 전에 동일한 정신과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만 우향계의 경우 지금까지 528년(2006년 현재)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에 비해 동주계는 그 계승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독도를 발견했던 남회의 업적을 재조명함과 아울러 동주계의 복원도 차제에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계의 복원은 원래 지향했던 계의 정신인 보인(輔仁, 어진 행동을 서로 하게 함)과 책선(責善, 착한 일을 서로 권함)의 정신을 함께 되살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부조리와 비리가 끊이지 않는 우리 시대에 계승해야 할 소중한 전통 가치이기도 하다.
정일재는 사후 향리인 울진읍 박금리에 부인인 풍산 류씨와 함께 모셔졌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문집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고(逸稿)가 종손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