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19) 조선 후기 - 원교 이광사(下) | ||||
-‘서결’ 통한 서예비평… 미학적 이상 제시-
필자는 최근 어느 잡지에 ‘지금, 한국미술의 현장’이라는 제하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서예 분야가 유독 다른 분야에 비해 작가나 비평가 교육자 전시기획자 등의 역할구분이 안되어 있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서단이 처한 현실이라 어쩔 수 없지만 실제 국제적인 행사까지 작가가 전시기획이나 비평도 하고 작가 선정을 하다보니 객관성이 떨어지는 일이 왕왕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옛 서예가들을 만나면서 정말 작가가 비평을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고만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현대와는 달리 적어도 전통시대에서 만큼은 이 말이 꼭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뛰어난 비평가는 그 이전에 훌륭한 작가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특히 시·서·화나 문·사·철이 종합되어 있는 서예의 경우 작가이자 비평가는 한 몸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모든 작가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이 있다고 해도 전문저작이 없고 편지나 시, 문집의 서문이나 발문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작가이자 비평가인 원교 이런 가운데 우리 서예비평의 역사에서 추사 김정희나 표암 강세황의 존재는 단연 우뚝한 존재이고, 옥동 이서나 원교 이광사 또한 익히 아는 바대로 각각 ‘필결(筆訣)’과 ‘서결(書訣)’이라는 전문적인 서예이론서이자 비평서까지 남기고 있다. 특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우리 서예의 비평문화에서 당시 글씨 역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귀중하다. 특히 원교는 ‘필결’을 통해 자신의 서예철학이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예를 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예컨대 원교는 우리나라 서예가 비평에서 통일신라 김생을 종장(宗匠)의 반열에 놓고 있다. 즉 “지금 김생의 진적이 거의 전하지 않으나 탑본 또한 기위(奇偉: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움)하여 고려 이후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글씨이다…. 신라 승려 영업글씨는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함이 취할 만하고, 고려 승려 탄연은 오로지 ‘성교서(聖敎序)’만을 따랐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비루한 획을 계몽시켰다”고 하였다. # 비평의 척도로서 왕법
봉래 양사언에 대해서도 “봉래의 초서는 호탕하여 장지나 왕희지보다 낫지만 재능만 성해 그림자만 얻고 뼈를 잃은 격으로 특별히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고 혹평하고 있다. 이것은 백하 윤순이 “봉래는 역시 초서만 잘 쓰지만 역시 가장 훌륭하다”고 치켜세운 것과 달라 주목된다. 즉 원교는 서평의 기준을 고법(古法)이 녹아난 글씨의 굳센 기세에 두면서 우리나라 역대 서가 중 왕법을 기본으로 했던 김생, 영업, 탄연, 석봉을 최고로 꼽았던 것이다. 이러한 원교의 품평 잣대는 옥동의 예에서 보듯이 이미 송설체에 대한 반발로 왕법으로 복귀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작용되었음은 물론이다. # 근골과 질박함이 구비된 글씨 그러면 이러한 비평의 잣대를 들이대는 원교의 글씨이 대한 이상이나 화두는 무엇인가. 원교는 특히 글씨의 고질(古質)과 연미(姸媚)에 대하여 말하면서 “상사(上士)가 도(道)를 들으면 근실하게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어버리니, 웃지 않는 것은 도로 삼을 만하지 않다”고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교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는 것은 결코 글씨가 아니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글씨는 근골(筋骨:근력과 뼈대)을 바탕으로 삼아야 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예의 고박하고 변화 있는 필의를 통해 험경(險勁)함과 소탕(疏宕)함을 동시에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옥동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인데 그래서 원교는 당 이후의 글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이며, 동기창의 말을 인용하여 수미(秀媚)한 자태가 글씨의 병폐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원교는 왕희지·왕헌지도 장지·종요에 비해 질박(質朴)하지 않다고 하면서 연미하거나 공교(工巧)보다 험경하고 졸박한 글씨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이에 원교는 이왕을 거슬러 올라가 종요와 장지를 따르고, 더 올라가 한나라 예서와 주나라 전서의 예스러운 필의를 배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한 ‘서결’ 지금까지 ‘서결’을 통해 본 대로 원교는 위진필법과 전예중비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당대 이후 중국서풍에 대해 비판일변도 시각을 보였다. 그리고 조선의 명서가의 우열을 논하면서도 주관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서결’을 통해 전예고비의 중요성과 공력(功力)의 가치를 일깨운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원교의 서결은 당시 조선후기 시대적 관심사와 사대부들의 미학적 이상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원교는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글씨가 비록 작은 도이지만 ‘반드시 먼저 겸손하고 두터우며 크고 굳센 뜻(謙厚弘毅之意)’을 지닌 뒤에라야만 원대한 장래를 기약 할 수도 있고, 성취할 수도 있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고 ‘서결’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공모전을 통해 자격증을 따듯 작가가 속성으로 배출되고 있는 요즈음에 더욱더 크게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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