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서법이론·평론서 ‘書訣’
‘서결’은 전 후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전편은 원교 60세(1764년)에 완성한 것으로 ‘서결’의 근간이자 실마리인 ‘위부인필진도(衛夫人筆陣圖)’와 ‘우군제필진도후(王右軍題衛夫人筆陣圖後)’의 원문과 자신의 해설을 가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지필묵연, 집필과 용필, 점획과 결구, 삼과절(三過折), 초서와 전서, 팔분과 고예, 고비(古碑)의 학습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후편은 64세에 아들 이영익이 초고를 쓰고 원교 자신이 교정한 것이다. 내용은 전편의 보충설명인 상편과 오체일법(五體一法)을 시작으로 이왕서(二王書)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서가의 필법에 대한 논평인 하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서결’은 서법이론서와 평론서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 또 서예 역사나 서체, 글씨의 품격이나 서풍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교 서학(書學)의 전모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인용된 고결(古訣)의 진위문제, 여러 가지 전·예 비석이나 왕희지, 당송의 명서가에 대한 원교의 인식에서 후대 비평자들로 하여금 옹호와 비판의 빌미가 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서결’의 인용 고결인 ‘필진도’의 저자가 위부인인지 왕희지인지를 놓고 역대로 문제가 되어 왔다. 이에 대해 원교는 “오늘날 나도는 ‘필진도’는 피할 길 없는 위작이다. 가로로 곧은 필획이 산가지 같고, 짜임새도 모든 글자가 똑 같다”고 하면서 위작임을 인식하고 있음과 동시에 학습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원교는 그 문장에 대해서는 의심 없이 당대 저록에 보이는 원문을 모두 ‘서결’에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필진도’는 위작여부와 관계없이 당 이후 역대서법과 서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원교는 해행초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전·예중비의 학습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데, 그런 만큼 이들에 대한 언급도 ‘서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원교의 전예는 해서나 초서보다 낫다는 평이 있을 정도인데, 자신도 주문(●文)과 소전, 한위예비에 대한 우열의 감식과 학습을 중요시하였다. 원교는 “석고문과 예기비, 수선비 등 한예를 배워 심획(心劃)을 정한 뒤에 후대의 첩을 임모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옥동 이서나 백하 윤순과 같은 전대 서가는 물론 당시 사람들과 같이 원교는 글씨의 목표를 왕희지에 두었던 만큼 여러 차례 모각을 통해 원형과 멀어진 ‘낙의론’이나 ‘동방삭화상찬’등 왕희지체의 작은 해서나 행초의 법첩을 독실하게 배웠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글씨가 속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 추사는 그 원흉을 ‘서결’에 두고 신랄한 논박을 가하였다. 즉 추사는 진나라 사람들의 해서를 배우려면 왕희지에 가까운 당나라 해서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교는 정작 추사와는 반대로 당·송인들의 서법에 대해 결구가 ‘방판일률(方板一律:천편일률적으로 모가 남)’이고 점획 또한 속되어 서법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서결’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교 서예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서결’ 찬술 동기는 정작 자신이 볼 때 고려 말 이후 우리나라 서가들이 고인의 정통필법을 모르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즉 원교는 자신이 평생 터득한 서법을 세상에 전하고자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아들 영익과 함께 완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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