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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예가 열전]한국성에 세계성까지… 18~19세기 최고 書聖

회기로 2011. 3. 1. 00:43
추사는 18~19세기 동아시아 서예사의 최고 작가라고 말한다. ‘입고(入古)’와 ‘출신(出新)’ 기준으로 볼 때 추사야말로 모든 비·첩 서예고전을 가장 완벽하게 혼융하여 재해석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자(漢字)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한·중 서예 역사는 이념형을 대체로 같이한다. 즉 시대·작가·서체 측면에서 왕희지 재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가 전서에서 예서로 변천되었고, 이것이 왕희지를 통해 해서와 행·초의 전형으로 확립되면서 서체변천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진대 이후 당·송·원·명에 이르기까지는 왕희지 재해석의 역사였는데 이 경향은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원 전후 한자가 전래되고, 삼국시대의 한예와 위진남북조시대 해서의 재해석풍이 유행한 이래 통일신라 김생, 고려 탄연, 조선의 이용, 한호 등에 의한 왕희지 복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청대에 들어와서 서예 이념형(理念型)을 왕희지, 즉 진당고법 이전의 은·주·진 등의 전서와 한예에서 찾아냄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서예역사가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비파계열의 글씨혁명이다. 작가로 보면 기존 첩파계열에 조선에서 윤순·이광사·이삼만·신위 등이, 청에서는 유용·옹방강·완원·포세신 등이 있었다면 비파계열로는 김수증·이한진·유한지 등이 전자이고, 정섭·등석여·이병수·조지겸·오창석 등이 후자다.

그러나 추사체의 경우 기존의 첩파나 비파로 구분하기 어렵다. 추사체의 형성 과정을 보면 초기 가학(家學)이나 사승관계를 통해 습용된 조선전래 글씨나 미불, 동기창 등 조선후기 유행서체, 옹방강은 물론 구양순·저수량·안진경이나 그 이전의 진대고법의 재해석에서 보듯이 연행 이후 20대 중후반과 30, 40대까지 첩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전형의 자기부정이나 파괴로서의 추사체의 큰 특질 하나는 이런 정법의 첩학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특히 추사체의 완성기의 특질을 보면 운필과 용묵에 있어 방원(方圓:둥글고 모가 남)과 윤갈(潤渴:기름지고 마름)의 혼융, 점획에 있어 태세(太細:굵고 가늘기) 정단(長短) 측도(測度:기울기)의 대비, 결구에 있어 비정형(非正形) 구조, 장법에 있어 글자 대소대비, 서체에 있어 비학과 첩학의 각체가 혼융되어 있다. 그런데 추사체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반대의 이질적이고 극단적인 조형 요소를 한 화면에서 조화롭게 만들어낸다는 데 가치가 있다. 요컨대 추사학예의 결정체로서의 추사체는 시기적으로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강상(江上:서울 용산)과 북청시절을 거쳐 과천에서 완성을 보았고, 서예사적 맥락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서예사의 지류나 큰 강줄기를 하나로 모은 바다인 것이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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