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21)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上) | ||||||
입력: 2006년 12월 15일 15:45:50 | ||||||
작품 감식에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안목과 혹리(酷吏:세금을 걷는 가혹한 벼슬아치)의 손을 요구한 추사 같으면 그 자리에서 답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도 못한 필자는 아무 말도 안하는 액자를 자꾸 곁눈질하며 물러나왔다. 기실 병풍이 아니면 액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 추사체(秋史體)는 카멜레온이다. 사정은 다르지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을 두고 벌어지는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추사만 나오면 따라다니는 문제가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동에서는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한 것을 주워(?) 횡재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수업료로 집을 날린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면 왜 추사작품이 이렇게 어려운가. 필자 생각으로는 실제 가짜도 가짜지만 추사의 작품 제작 태도가 워낙 변화무쌍한 데에서 진위를 오판하는 측면도 크다고 본다. 결국 알고 보면 둘 다 진짜인데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추사의 학예인생의 화두를 말한 것이자 여러 절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간송미술관 소장 ‘유애도서겸고기(唯愛圖書兼古器:오직 도서를 사랑하되 옛 기물도 아우르며) 차종문자입보리(此從文字入菩提: 또 문자를 가지고 큰 깨달음에 든다)’만 해도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네 종이 전한다. 서로 다른 종류의 예서작품이 있는가 하면 해·행서가 있다. 그것도 쓴 시기가 다르다. 게다가 보통 작가들한테 이런 작품제작 예는 아주 드물게 발견된다. 그리고 경험상 이런 동일 글귀 작품이 일괄로 한자리에서 공개되지 않는다. 즉 몇 십 년을 두고 서로 다르게 우연히 발견되니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력이 아니라 작품의 전모를 보지 않고 추사를 말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이 없는 것이다.
동일 시기 작품 또한 서체에 따라 다르다. 같은 서체라도 정색을 하고 쓰기도 하고, 감정을 있는 대로 담아내기도 한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을까 눈을 의심케 한다. 그러니 누구든지 추사 앞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정법(正法)의 자기부정(自己否定)으로서 기괴(奇怪)와 고졸(古拙) 그러나 추사체는 마구 변화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관조해보면 일관된 변화 원칙이 있다. 시기별로 보면 추사체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격한 정법을 토대로 하고 있다. 연행 이후 부터 30대에 옹방강을 통해 정법을 익혔다면 40대에는 바로 옹방강의 토대가 된 구양순법을 체득하면서 정법의 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서예사에서 ‘당법(唐法)’이라 함은 바로 해서의 전형을 두고 한 말인데 그중에서 구법(歐法)을 최고로 쳐왔다. 해배 이후 과천시절에 무르녹아난 추사체의 기괴(奇怪) 고졸(古拙)함의 미학은 첩·비가 혼융되면서 바로 정법의 자기해체나 파괴의 결과물인 것이다. # 리듬에서 구조로, 추사체의 현대성 그리고 조형 그 자체로 보면 엄격한 음양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글자의 점획이나 짜임새, 글자간의 배치를 문제 삼는 장법 등에서 서로 다른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추사 공간경영의 제1차적인 특질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정법의 자기부정으로써 고졸함과 구축적인 공간구조로써 추사체의 정신적 경계는 무엇인가. 추사의 작품으로 보면 과천시절에 만들어진 ‘불이선란도’나 ‘판전’과 같은 경지다. 과천시절 추사체는 불이선란도 제시(題詩)에서 ‘성중천(性中天)’이 ‘불이선(不二禪)’과 하나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유·불·선 회통의 고도의 이념미(理念美)를 필묵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추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듯 아무도 범접 못하는 관념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 늘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고도의 관념미마저도 추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필묵 하나로 시 서 화에 담아내고 있다. 요컨대 선(禪)이 일상 속에 내려와 들어차 있는 것이 추사인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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