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학예일치의 경지는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추사 문예론은 한마디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다. 이것은 학문과 서화예술의 일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런데 추사의 학예일치론은 시론(詩論)분야에서 보다 분명하다. 추사는 예술 전반에 걸쳐 법을 중시했다. 법의 전수를 통해 서예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근원과 역사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없이는 서예의 완성을 기약할 수 없다고 여겼다.
시문학에 있어서도 추사는 같은 생각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도달하기 위해 명·청대부터 금·원대와 송대를 거쳐 오르는 시의 학습을 주장한 것이 단적인 예다. 추사는 이 경로를 거쳐 두보의 시법이 전수되어왔다고 인식했다.
또한 추사는 예술에 있어 개성을 매우 중시했다. 추사는 작품 제작과 감상에 있어 각기 자신의 성령(性靈)에 맞는 것을 추구하라고 했다. ‘완당전집’에는 ‘무릇 시도(詩道)는 광대하여 구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웅혼(雄渾)도 있고 섬농(纖濃)도 있고 고고(高古)도 있고 청기(淸奇)도 있으므로 각기 그 성령(性靈)의 가까운 바를 따르고 일단에만 매이고 엉겨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다. 여기서 추사가 예로 든 웅혼·섬농·고고·청기 등은 문예의 다양한 풍격을 제시한 것이다. 각기 자신의 성령에 맞는 것을 추구해야 하며, 어떤 하나의 풍격으로 남을 평가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추사가 시 글씨에서 주장한 법이나 성령 겸수는 전통의 전수, 즉 법이나 문학적 개성 또한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글씨 그림은 물론 시론의 핵심으로 수립하여 법으로 개성의 남용을 막았다.
성령설 추종자 중에는 문예를 유희의 도구로 여기며, 개성적 시 세계를 과시하기 위하여 기괴함으로 빠져들어 가던 부류가 많았는데, 추사는 그 위협적 요소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9,999분(分)은 인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나머지 1분(分)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도 인력의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라는 경계가 그 단적인 예이다. 석파 이하응에게 준 ‘사란론(寫蘭論)’과 같이 이러한 추사의 서화론은 시론과 어우러져 예술과 학문의 영역이 하나의 길로 통합된다. 여기서는 또 추사가 시문학에는 말로 설명할 수도, 의도적으로 불러들일 수 없는 신명(神明)의 영역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도 간취되는데, 소동파와 황산곡의 시집을 천번 만번 읽는 학습을 통하여 신명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추사는 70평생 동안 ‘열 개의 벼루와 천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하였다(磨穿十硯 禿盡千豪)’고 그 독실한 노력을 자신의 친구 이재 권돈인에게 회고한 바 있는데 이것은 학문과 예술이 별개가 아님을 스스로 자신의 문예론을 통해 입증해 보인 것이다.
이와같이 추사의 문예론은 인력의 힘, 즉 공부를 최우선적으로 강조했다. 이것은 귀족 취미나 탈속의 추구 이전에 당시 고루함으로 세계성을 상실한 조선 문예계의 당면 과제에 대한 추사의 절체절명의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와 해답, 그리고 그 방법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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