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3) 고려초 삼필 -이환추·구족달·장단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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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최고 명필이 누구예요? 필자가 흔히 받는 질문이다. 전문가들은 흔히 통일신라 김생, 고려 탄연, 그리고 조선의 안평대군·한석봉·추사 김정희를 ‘5대 서가’로 부르기도 한다. 누구나 스타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집착하면 많은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 스타가 아니면 아류로 간주하는 태도는 위험하기까지 한데, 전환기나 개창기 문화는 전성기의 틈 속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기 일쑤다. 게다가 한자투성이의 서예는 요즈음 정체성 문제는 물론 중국아류 혐의까지 추가되어 있어 더욱 딱하다.
이를 실증하는 사례 하나. 최근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100대 민족문화 상징’이 그것인데, 민족고유 문화 콘텐츠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산업적 활용의 초석을 놓으려는 첫 시도라고 한다. ‘한석봉과 어머니’가 교육 분야 생활상징에 들어있긴 하지만 서예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붓글씨’가 예술상징이 될 수 없다면 퇴계·다산과 함께 민족예술 스타로 추앙받아온 추사나 김생 정도가 역사상징으로 포함됨직도 한데 없다.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서예는 민족 고유의 문화자산도 아니고 원형질도 없다는 말 아닌가. 이것은 고려청자·백자·분청사기·막사발이 미술상징에, 판소리·아리랑·거문고·대금이 음악상징에 중복되다시피 나열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공교롭게도 예술상징 어디에도 필묵문화 소산물인 그림·글씨는 찾아볼 수가 없고, 민화 정도는 그 흔한 생활상징에 포함됨직한데 없다. 알고 보니 서예는 애초 예술상징 카테고리에서조차 빠져 있다. 그러면 도대체 민족문화는 뭐고 또 원형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서예사를 거꾸로 돌려 현실과 역사가 모두 이름조차 외면해온 1,000년 전으로 가보자.
-필획과 짜임새, 이보다 더 굳세고 날카로울 수 없다-
우리 역사의 전환기는 7세기 말 신라 삼국통일, 10세기 초 고려 개국, 14세기 말 조선 개국이다. 작품에 녹아난 기운은 8세기 석굴암, 12세기 고려청자 같은 완성기의 전형미나 아취보다 도입기의 강건함으로 그 아름다움이 표출된다. 글씨 또한 시기마다 차이가 있지만 험경(險勁:굳세고 날카로움)하기로 치면 10세기를 전후한 나말여초보다 더한 때는 없다.
이것은 질박한 고신라나 장엄한 8세기 통일신라, 귀족적 아취가 물씬 녹아나온 12세기 고려와도 다르다. 937년에 이환추(李桓樞)가 쓴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명(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銘)’(그림 1)을 보자. 모진 점획의 험경함은 짝할 상대가 없고 균등한 글자의 짜임은 계율보다 더 삼엄하다. 더욱이 3,000여자를 시종일관 한 호흡으로 구사해 낸 데에서는 구도 일념으로 구사된 사경(寫經)을 방불케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구족달·장단열 등 작가가 생소한 것은 물론 처음 들어보는 선사탑비명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환추의 또 다른 작품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명’(939), 구족달의 ‘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명’(940)이나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명’(943), 장단열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명’(965)이나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명’(975), 한윤의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명’(977), 백현례의 ‘홍경사갈기’(1021), 민상제의 ‘칠상사혜소국사비명’(1060), 안민후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명’(1085) 등 숲을 이루는데, 사실 이 자체가 고려 글씨의 정화이다. 이 중 구족달이 쓴 943년의 ‘법경대사비명’(그림 2)은 더욱 더 험경하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의 표현을 빌리면 ‘도끼로 찍은 듯한’ 살벌함마저 감지된다. 다만 975년 ‘원종대사비’의 장단열의 글씨는 험경함에서 이들과 궤를 같이 하지만 날카로움이 빠지고 횡장(橫長)한 짜임새로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고려의 DNA가 이식된 구양순체-
그런데 이러한 점획과 결구는 모두 구양순(557~641)과 그의 아들 통(?~691)의 서풍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에 대해 추사 또한 ‘우리나라 서법은 신라와 고려시대 오직 구양순체만 익혔다’(吾東書法 羅麗二時 傳習歐體)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환추·구족달·장단열 글씨와 같은 고려 개창기 선사탑비명의 성격은 한눌유·요극일·최치원 등 통일신라 구양순체의 명가는 물론 백현례·민상제 등 11세기 고려 초 서가들의 구양순체 소화양태와도 다르다. 험경하기 또한 남북조시대 조상기의 필적이 연상되지만 조상기의 뛰어난 동세에도 불구하고 비정형의 결구가 아직 미완이므로 바로 비교될 수도 없다. 더욱이 이 시기는 이미 중국에서 구법이 시들해진 때다. 즉 구양순법에 반기를 든 안진경(709~785)의 혁신 서풍이 오대(五代)를 거쳐 소식(1036~1101), 황정견(1045~1105) 등 북송 명서가들에게 주도적으로 재해석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구법(歐法)이 당이 아니라 고려에서 꽃 피고 열매를 맺은 셈이다. 구법에서 신수를 얻은 청나라 금석학자 옹방강(1733~1818)조차 ‘홍경사갈기’(그림 3) 글씨의 아름다움을 ‘완전한 박옥 가운데 화씨구슬 윤택하니(璞完中有和璧潤)/ 달이 환하자 비로소 금물결이 원만하게 나타났구나(月滿始悟金波圓)’라고 읊었을 정도이다.
-개창기 고려왕조의 타임캡슐-
그러면 왜 이런 서풍이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는가. 한자 한자 매 순간 정신적 이완을 절대 불허하는 율법적인 서사행위 자체가 이미 선정에 들어간 것이지만 그 이유는 불교, 그 중에서도 선종에서 찾아진다. 선종은 8세기 경주를 ‘화엄불국토’로 만든 교종을 대신하여 ‘내 마음이 부처다’라는 한 마디로 나말여초 사상계는 물론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였다. 즉 보리달마에 뿌리를 둔 혜능의 남종선이 한반도에 들어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해 본격 착근되는 때가 이 시기다. 태조 왕건의 고려 개창(918) 또한 지방 호족세력에게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선종사상 수용과 직결된다. 다시 ‘진철대사비’를 보자. 왕건이 ‘항상 두 흉악한 무리 있어 호생지심(好生之心) 간절하나 점차 서로 죽임이 깊어가고 있다’고 하자, 진철대사 이엄(870~936)은 ‘왕은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는다’고 답할 정도로 태조의 정신적 지주이다.
이엄은 또 구산선문 중 하나인 해주 광조사 수미산문(須彌山門)의 개산조로 태조가 등극한 다음해 왕사로 초빙되어 후백제를 정벌하고 통일대업을 이루는 데 절대적 공로를 세운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이 비는 고려 개창 후 태조 왕건의 교명을 받들어 최언위(868~944)가 짓고 이환추가 쓴 최초의 선사탑비가 된 것이다.
요컨대 ‘진철대사비명’은 지금 고려왕조의 원형질이라 할 선기 펄펄한 개창기의 기운과 정신을 최고의 문장과 더 이상 험경할 수 없는 필획으로 담아낸 최초의 기념비이자 타임캡슐인 것이다. 새삼스럽게 필자가 ‘진철대사비’를 어루만지면서 ‘점 하나 획 하나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은 왜일까.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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