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고려시대 묘지명 320개 여성사·글씨연구의 寶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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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묘지명은 320여개가 남아있는데 주인공이 관리, 여성, 승려 등으로 다양하다. ‘고려사’ 열전에 소개된 인물이 100여명 정도이니 묘지명이 고려 사람, 특히 여성사 연구 자료로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묘지명의 서체 또한 육조 시대와 당나라 시대의 해서, 사경체 등으로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다. 시기도 12세기를 정점으로 고려 전후반에 고루 분포하고 있어 당시 글씨 변천연구의 보고이다.
묘지명은 3~4세기 위진 시대에 지상의 비를 제한하자 축소판 묘비를 땅속에 묻게 된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5세기 남북조 시대에 이미 양식에서 완성을 보고 수·당대에도 유행하였다. 우리는 위진·남북조 시대 이미 불교전래 등의 활발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나말 여초까지 만들어진 묘지명은 백제 무령왕릉 지석을 빼면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중국에서는 당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천남산 묘지명,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나 부흥군대장 흑치상지 묘지명이 출토된다는 것이 특이하다.
고려 묘지명 중에는 흥미로운 사실도 많다. 현존실물 최고(最古)는 1024년에 만들어진 귀화인물 ‘채인범묘지명’, 가장 긴 것은 2,600여자를 담은 ‘이제현묘지명’, 가장 나이가 어린 것은 이규보의 아들 ‘이법원묘지명’으로 불과 13세이다. ‘해동천자’로 자부한 복녕궁주 왕씨묘지명, 남편이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쓴 ‘염경애묘지명’ 등도 주목할 만하다.
현존유일의 향리계층의 것인 ‘낙랑김씨묘지명’을 빼면 묘지명의 주인공 또한 모두 귀족관료이고 그것도 개성 주변에서만 수습된다. 고려 귀족들의 장례는 고려말 성리학의 보급 전까지는 불교식 화장이 보통이고, 유골은 골호나 조립식 석관에 묻었다. 석관은 천장 바닥, 네 벽면의 안팎에 사신도·비천상·북두칠성 등의 장식을 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불교나 도교적인 내세관을 볼 수 있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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