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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예가 열전]⑤고려후기-이암

회기로 2011. 3. 1. 00:46

[서예가 열전]⑤고려후기-이암



청평산문수사시장경비(淸平山文殊寺施藏經碑) 제액(題額), 개인소장.


청평산문수사시장경비(淸平山文殊寺施藏經碑) 부분, 개인소장.


‘해동명적’(海東名迹) 전집(前集), 판본(板本),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
이암과 관련한 에피소드 한 가지가 있다. 올 봄에 열린 ‘데라우치문고’전은 조선시대 왕실기록화, 16세기 시인·도학자, 임진·병자 양란 때 충신의 희귀 육필자료의 발굴로 큰 주목을 받았다. 마침 일제 반출문화재 환수가 사회이슈화하면서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보물을 10년 전 경남대가 반환해 올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먼저 문고의 존재를 안 것은 사실 고성이씨 문중에서 행촌 이암(1297~1364)의 글씨를 찾아 나서면서부터다. 아무래도 당신 글씨를 매개로 ‘묻혀있던 우리 역사를 찾도록 하라’는 계시가 후손들에게 전해졌던 모양이다. 보통사람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이암의 보이지 않는 손

이암은 보통 고려 말의 최고 명필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필자는 공민왕 때 수상인 문하시중을 지낸 그가 지금 학계에서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단군세기’의 저자라는 사실에 우선 눈이 간다. 당시 소지한 것만으로도 참형에 처해졌다는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李陌·1455~1528) 또한 그의 고손자인데, 이 책은 삼신오제·환국·신시·고려국 등 우리 고대사 전체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이암이 지은 단군조선 부분만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선대의 유업을 이었던 듯하다. 더욱이 1911년 ‘한단고기’가 계연수에 의해 편찬될 때 감수자이자 ‘태백일사’의 소장자인 이기나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독립운동을 한 이상룡도 고성이씨인 것을 보면 ‘우리 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소명이 집안내림임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글씨를 보자. 이암은 한마디로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를 그대로 터득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먼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송설체가 아니라 조맹부다. 그는 송 황실 자손인데도 원나라 조정에 나아가 출세한 사람으로 32세에 원 세조 쿠빌라이에게 발탁되어 무려 5대에 걸쳐 녹을 먹었다. 요즈음 척도로 보면 일정(日政)에 가담한 변절자인 셈이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명나라 동기창도 조맹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조선의 이황 같은 도학자들도 송설체를 버리고 왕법(王法)으로 복귀하였다. 그렇다면 왜 원 간섭기에 ‘단군세기’를 지을 만큼 자존의식이 강한 이암이 송설체를 배웠고 이것이 여말 선초에 국서체가 될 정도로 유행했을까.



-전환기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인식-

모종의 곡절이 있음직도 한데 원을 두고 벌어지는 고려나 송의 속사정을 알아보자. 당시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이 몽골에 항복하면서 원의 부용국시대(1260~1392)로 접어든다. 자주권을 상실한 당시 지식인의 화두는 고려의 자아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점. 이 처지는 송도 마찬가지였는데, 문제는 원이 무력으로 한족을 지배했지만 실상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송의 한족이 주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급한 문화를 가진 이민족의 지배는 한족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 창조보다 복고에 치중하게 하였고, 그 복고의 중심에 왕희지를 들고 나와 송설체를 완성시킨 조맹부가 있었던 것이다.

-송설체를 통한 왕희지 복고와 그 정통성-

요컨대 이암의 자아 찾기는 복고풍 송설체를 통한 우회적 탐색이었던 셈인데, 여전히 고려문화가 송과 일맥상통한 바 이것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기화의 기회로 삼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 중심지는 원 세조의 외손인 충선왕이 연경에 설치한 만권당(萬卷堂). 당시 충선왕은 만권당에 조맹부, 요수, 염복 등 한족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제현, 이암, 이색 등 고려 학자들에게 성리학이나 글씨 등 중국 문화의 진수를 직접 전수받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314년 28세의 이제현이 원에 가서 당시 61세의 조맹부와 6년 동안 교제하며 남긴 시의 한 대목에서 확인된다. ‘풍류는 영화의 봄을 생각케 하고(風流空想永和春) /글씨로 남긴 자취 일백번 변해도 새로워라(翰墨遺종百變新) /천년 뒤 요행히도 참모습을 만났는데(千載幸逢眞面目) /더구나 집안에 위부인 있단 말 듣는구나(況聞家有衛夫人)’.

시에서 ‘영화의 봄’이란 왕희지가 ‘난정서’를 쓴 영화 9년(353)을 말하고, 마지막 구절은 왕희지가 위부인의 서첩을 놓고 글씨를 배웠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맹부에 대한 이제현의 언설이지만 여기서 송설체의 진원지가 왕희지라는 점, 그리고 조맹부에 대한 고려 학자들의 흠모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송설체의 유행이 어느 정도인지도 ‘충선왕이 귀국 시 문적과 서화 만점을 싣고 와 조맹부 글씨가 우리나라에 퍼졌지만 그의 필법을 얻은 자는 행촌 한 사람뿐이다’(‘필원잡기’)라고 한 서거정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암은 송설체를 판박이로 구사하지 않았다. 송설체는 소식·미불·황정견 등 송나라 서가들의 방종미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는데, 왕법을 바탕으로 세련미를 추구한 결과는 고려의 탄연체와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이암은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이 본대로 송설의 유려함과 탄연의 근력(筋力)을 동시에 추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래서 이색이 ‘묘지명’에서 ‘행촌의 필법은 묘(妙)의 극치를 이루었는데 송설 조맹부와 겨룰만하다’고 했던 것이다.

-유려함과 근력을 겸한 이암의 글씨-

그 예는 이암이 31세(1327) 때 쓴 ‘문수사시장경비’(그림 2)에서 확인된다. 이 비는 행서체로 탄연의 ‘중수문수원기비’와 고려 글씨의 자웅을 다툰다. 왕희지의 ‘집자성교서’를 많이 따랐지만 이것보다 점획과 결구에 있어 균제미와 무게감이 더 보인다. 이것은 또한 이암이 보통 송설체의 유려한 외형미에 치중하다 근골(筋骨) 없이 늘어지는 병폐를 극복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 비의 전액(그림1) 또한 당시 복고주의 문예사조 변화를 읽어내는 데 있어 간과할 수 없다. 진나라 소전(小篆)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전액에서 고려중기 탄연류의 해·행서와 달리 통일신라 전통을 다시 보게 된다.

이암 필적은 신공제가 돌판에 새겨 찍은 ‘해동명적’에서도 확인된다. 수춘군 이수산(?~1376)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시고(그림3)를 보면 서풍은 ‘장경비’와 같지만 필법과 자형에서 훨씬 활달한 변화의 폭이 감지된다.

그러면 이암은 어떤 사람일까. 대나무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이암은 글씨 못지않게 시·그림도 뛰어났는데 염제신 소장 ‘풍죽(風竹)’에 대한 이색의 제시에서도 확인된다. ‘행촌 마음 대를 닮아 텅 비었는데(杏村心似竹心虛) /깨끗하고 단정하기 대보다 낫구나(瀟쇄端莊兩有餘)’. 또 ‘노죽(露竹)’에서는 ‘(이슬 맞은 푸른 대) 행촌과 꼭 같으니(分明如杏村相似) /곧은 절개 누구라고 속된 눈 허락할까(直節誰容俗眼着)’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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