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15) 조선중기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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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조락의 계절이라 했지만 올해는 유독 주위의 큰 어르신들이 세상을 버렸다. 시속에 따라 각종 예법이 바뀌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조문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고인을 생각할 겨를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냉정하고 주위 분위기도 빠르고 편리해져 간다는 것이다. 소시적 꽃상여를 붙들고 산 넘고 물 건너 통곡하며 뒤따르던 상주들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기억 속의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한 망자의 생각은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형식이 정신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예를 차리지 못한 것 같아 갈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시속을 근 3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보자.
# 우암·동춘당- 미수와의 예송 논쟁
조선의 글씨가 당색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우암 송시열(1607~89)과 동춘당 송준길(1606~72)을 논하면서 뺄 수 없는 것은 미수 허목과의 예송(禮訟)논쟁이다. 즉 1659년 효종의 급사와 1674년 인선왕후 별세 때의 복상(服喪)문제로 야기된 2차례의 논쟁이 그것이다. 요컨대 남인의 영수인 미수는 3년설을 주장하였고, 서인(노론)의 영수 우암과 동춘당은 기년설(朞年說·1년)을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왕실 예법에 대한 철학적 배경차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반인과 다른 특수성이 반영된 미수의 고전예학(古典禮學)과 보편적인 우암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그것이다.
결국 이것은 16세기 말부터 조선정치사 골격은 당쟁사라고 할 정도로 사림정치가 크게 변질되어 노론(老論)일당 전제와 세도정치로 나아가게 한 요인이 되었지만 글씨에서도 당시 남인과 서인은 서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미수는 88년 평생 삼대고전(三代古篆)의 재해석으로 일관하였고, 우암과 동춘당은 이이에서 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서인의 적통으로서 한석봉체를 토대로 안진경체를 가미한 소위 양송체(兩宋體·그림 1)를 구사하였던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양송체는 서인 세력의 인조반정 성공 후 17세기 진경시대를 풍미하게 되었고, 윤순과 이광사를 통해 완성되는 소위 동국진체의 한 가지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 글씨는 심획(心劃)이다
글씨에 대한 미학적 입장 또한 동춘당과 우암은 창고(蒼古)함을 추구한 미수와는 뚜렷이 차이가 난다. 즉 동춘당과 우암은 글씨를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간주하면서 기교가 아니라 마음수련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글씨를 도학(道學)연마의 연장으로 보는 이황이나 이이 등과 같은 입장이다. 실제 우암은 이황의 서첩을 보고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하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글씨에 대한 인식은 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자의 서예관과 궤를 같이한다. 즉 주자는 글씨를 쓰는데 있어 제일 먼저 뜻을 바르게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뜻이 바르지 않으면 글씨가 거칠어지게 되고, 글씨의 아름다움만 추구하게 되면 이로 인해 글씨에 미혹해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 우암이 되살아 나온 ‘刻苦(각고)’라는 대자서
그러면 글씨를 심성수양으로 간주한 우암과 동춘당의 작품은 어떠하였을까. 우선 대자서로 쓴 ‘刻苦’(각고·그림 2)를 보자.
이 작품은 제자 유명뢰가 ‘刻苦’라는 두 글자를 공부하는 자로서 제일 먼저 마음에 새기려 글을 청하자 우암이 써준 것이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라는 도학자들의 글씨에 대한 명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해행으로 구사된 장중한 필획, 확고부동한 안정된 짜임새에 절의에 찬 우암의 성정과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특히 장지바닥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필의(筆意)가 글씨의 생동감을 극대화하는 지점에서는 우암을 생면(生面)하는 감흥까지 자아낸다.
더욱이 ‘느긋하게 되는 대로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배우는 자의 가장 큰 병통이다. 만약 이러한 병통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비록 높은 재주와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다 해도 결단코 성취할 가망은 없는 것이다. 刻苦라는 두 글자가 어찌 이러한 병통에 꼭 맞는 훌륭한 처방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우암의 제자 권상하의 발문을 보면 글씨 자체가 곧 선생님이 되어 목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글씨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데, 서예가 단순한 기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정신이 투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죽어도 굽힐 수 없는 절의정신
그렇다면 우암의 절의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 단면을 우선 ‘송자대전’에서 보자. 김수항이 요동에서 얻어온 숭정황제 어필 ‘非禮不動(비례부동)’을 간행하여 보내준 데 대해 우암이 손 모아 절하고 발문을 달았다.
‘…문정공(청음 김상헌)은 한 몸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부둥켜 세워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오랑캐들도 공경하여 복종하고 존경하고 사모하게 하였으니 어필을 간행한 뜻이 남달리 돈독하다…여기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어필에 대한 의인화된 태도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효종과 독대로 북벌(北伐)을 통해 청을 도모하고자 한 우암으로서 당연하다. 이러한 우암의 정신은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의리론(義理論)을 전수받으면서부터 배태되었고, 후에는 이와 같이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정통론으로 천명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암이나 동춘당의 글씨가 중요한 것은 그 조형적인 특질이나 후대 영향력으로 차지하는 조선중기 서예사에서의 비중도 비중이지만 사약을 받아 죽을지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절의정신이 글씨 속에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 올해가 동춘당 탄생 400주년이고, 내년이 우암의 400주년이 되는 해이니만큼 두 분이 400년 만에 이 땅에 다시 온 뜻을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되새겨 실천해 볼 일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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