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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예가 열전](13) 조선중기 -석봉 한호(下)

회기로 2011. 3. 1. 00:51

[서예가 열전](13) 조선중기 -석봉 한호(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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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_ 한호(韓濩, 1543~1605), ‘구인당(求仁堂)’, 경북 옥산서원 소재.
작년 초 ‘光化門(광화문)’ 편액교체 건으로 논란이 있었다. 다행히 문화재청이 편액을 복원키로 하고, 그 기준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 필적의 ‘光化門’ 유리원판(일본 도쿄대 소장, 1916년경 촬영)으로 삼는다는 방침이 결정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일로 그동안 무관심했던 서예, 특히 편액글씨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즉 논란은 편액교체의 정치적 의도 유무에서 교체 타당성이나 시기까지 번졌고, 현역작가를 두고 왜 집자(集字)를 하며, 한글은 왜 안 되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흔히 얼굴을 간판이라 하지만 사실 건물과 편액은 사람 눈이나 얼굴같이 불가분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원 시기는 건물 복원과 동시여야 한다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복원(復元)’이 말 그대로 ‘원래대로 다시 만드는 일’이라면 현역작가 글씨는 ‘집자(集字)’의 차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집자를 궁여지책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집자문화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집자는 역사 속 글씨를 현재화시키는 일이자 거기에는 글씨에 대한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특별한 심미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비’가 김생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군위 인각사 ‘일연선사비’가 왕희지 글씨이듯이 실제 궁중이나 사찰현판, 비석에 명필글씨가 집자되는 예는 역사적으로 적지 않다.

그리고 문자선택에 있어서도 조선의 궁중편액이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복원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한글이 한자에 우선될 수도 없다. 이것은 경복궁이 한글창제 산실이고, 당시 ‘정문’을 ‘광화문’으로 명명한 것이 세종조이기 때문에 한글집자나 현재 한글 ‘광화문’현판으로 가야 된다는 일각의 주장과는 사안이 다른 성격이다.

#편액글씨의 기준 또한 석봉의 ‘대자천자문’

그런데 이번 논란에서 아쉬운 점은 정작 편액글씨의 서체원류와 조형적 특징에 대한 논의가 복원 관점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욱이 한석봉은 삼척동자도 알지만 그의 대자 글씨풍이나 그 토대가 된 설암(雪庵) 글씨가 조선편액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을 요즈음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석봉이 쓴 편액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575년(선조 8년) 어전에서 쓴 ‘陶山書院’(도산서원)이다. 이 필적은 방정(方正)하면서도 근골(筋骨)이 강하다.

반면 같은 석봉의 글씨인 옥산서원의 ‘求人堂’(구인당, 그림1)은 비후(肥厚)함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두 편액글씨를 짜임새 면에서 보면 양자는 같은 경향을 띤다. 이에 대한 이유는 석봉의 또 다른 대자 필적의 교과서인 ‘대자천자문’(그림2)을 보면 짐작이 간다. 이 글씨의 점획을 보면 모서리나 파임이 강한 근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긴밀한 짜임새나 세로로 긴 글자형태가 특징인데, 고려말에 전해진 원나라 승려 설암의 ‘춘종첩’ 또한 이와 같은 서풍을 띠고 있다.

이러한 석봉의 대자 천자문은 조선후기 안진경·유공권의 필적집자 유행과 때를 같이하여 묘갈명 전면에 흔하게 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봉서(石峰書) 기사중하(己巳仲夏) 남한중간(南漢重刊)’의 대자 천자문 간기가 말해주듯 왕실이 아니라 병영(兵營)인 남한산성에서 간행된 것이 특이한데, 앞서 말한 경복궁 훈련대장 임태영 필적의 ‘광화문’이 이 글씨 풍을 토대로 하고 있음은 물론 조선시대 궁중편액의 주류가 이러한 서풍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석봉은 해서·행초서·대자서 등 당시 일상의 한자 글씨에 대한 모든 서체 표준을 조선식으로 세웠던 셈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해서천자문’ ‘초서천자문’ ‘대자천자문’이 증명한다.

#송설체에서 왕희지체로 조선중기 서풍변화를 주도한 석봉

석봉의 해서는 사자관답게 ‘선무공신유사원교서’ ‘서경덕신도비’ ‘천자문’ 등 각종 공신교서, 비갈명, 법첩이 진적이나 간본형태로 다양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필적을 통해 석봉은 왕희지 소해인 ‘황정경’ ‘악의론’을 토대로 하면서도 고려말 이래 당시까지 유행했던 조맹부 송설체의 연미함에서 탈피하여 엄정 단아한 조선화된 서풍을 만들어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봉의 행서와 초서 또한 그가 지향했던 왕희지체를 재해석한 양태가 농후하다.

특히 작은 글씨가 그러한데 ‘석봉필결’에 등장하는 ‘난정서’ 중심의 고법이나 “지금 왕희지의 ‘산음계첩’의 진본을 전수하고부터는 전에 익힌 것을 모두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한 글자를 쓰고, 내일 열 글자를 배워(今日書一字 明日學十字) 달마다 연습하고 해마다 터득하니 세월 가는 바를 깨닫지 못하였다. 비록 왕희지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조맹부보다 못하지는 않았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은가?”라고 한 석봉 자신의 일종의 작가노트가 이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석봉은 초서에서 왕희지 ‘십칠첩’을 중심으로 왕헌지 지영 당태종 장욱 회소 장필 등에게 폭넓은 관심을 두었다. 작은 글씨에서 고법을 그대로 쓰는가 하면, ‘초서천자문’과 같은 데에서는 석봉체의 전형이 구사되기도 하고, 대자(그림3)에서는 이것과도 다른 개성적인 필치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자관에서 예인으로

그림1_ 한호(韓濩, 1543~1605), ‘구인당(求仁堂)’, 경북 옥산서원 소재.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하면 63세(1605년)로 생을 마감한 석봉은 40대 중반까지는 왕희지법이 토대가 되면서 사자관으로서의 정법을 구사하였고, 그 이후부터 석봉의 해·행·초 전형이 한 작품에 뒤섞여 나오면서 석봉만의 글씨가 새롭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혼서(混書)경향은 54세(1596년)작품인 ‘용호장자가’나 62세(1604년) ‘검명’, 절필인 ‘광한전백옥루상량문’ 등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그리고 노년으로 갈수록 이러한 혼서는 물론 점획 결구 장법 전반에서도 곡직(曲直)·장단(長短)·소밀(疏密)·대소(大小)의 변화가 극심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마음의 흥취가 손끝에서 발휘되는 경계로 사자관의 잣대로는 석봉의 예술이 잘 포착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요컨대 석봉은 진대(晉代)고법의 이상을 사자관으로 실천하면서 말년에는 고격(古格)을 토대로 자기세계를 열어갔던 사람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선조는 필사업무에 지친 말년의 석봉을 한가한 곳에 나아가 오직 서예에만 잠심하도록 가평군수에 제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선조는 ‘필시 너의 글씨를 구하는 사람은 필법을 후세에게 전하려 할 것이니 게으르게도, 촉박하게도 하지 말고, 기운이 피곤할 때는 쓰지도 말라’고 예인의 길을 주문하였다. 동시에 선조는 석봉에게 ‘醉裏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크게 취한 가운데로 우주가 내 품에 안기니 붓으로 그 조화를 담아냈구나)라는 어필을 하사하였다. 이것은 이미 선조가 석봉을 사자관이 아니라 대 예술가로 대한 것이자 그의 ‘호중천(壺中天)’의 예술경계를 한마디로 일갈한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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