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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희빈장씨의 죽음..스스로 사약을 마셨을까? 옛 드라마 처럼 물동이 채 먹여졌을까..

회기로 2011. 3. 1. 15:17

희빈장씨의 죽음의 순간까지 아들의 생식기까지 망가트리고 왕이 내린 사약을 내던지는등 악하게 그려진 이유가 뭐일까?

 

조선왕조실록 속에는 희빈장씨가 스스로 자진 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숙종실록은 장희빈을 악녀로 그리고 있는데 그 죽음까지 왕이 나서서 사약을 억지로 먹일 정도이고, 세자인 아들의 성기를 망가트릴 정도의 죽음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역모를 일으킨 역적들도 왕이 내리는 사약은 북향사배를 하고 죽음을 맞이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실록속 희빈장씨의 죽음에 대한 사신들의 비난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1988년 MBC'조선왕조500년 인현왕후 편' 희빈장씨역 전인화

 

 

1995년 SBS '장희빈' 정선경

 


2003년 KBS '장희빈' 김혜수

 

 

2010년에 방영중인 '동이' 희빈장씨 역 이소연

 

 

그러나 그간의 희빈장씨의 죽음은 왕이 내린 사약과 왕이 내린 교지까지 발로 차며 왕이 내시를 시켜 문짝을 떼어내여 가슴팍을 두르고 물동이채 먹이는둥 억지 설정이 많기는 했다.

 

그러면 이런 희빈장씨의 죽음 마져도 악행으로 그려진건 언제부터일까

 

희빈장씨의 역사가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은
1961년 '장희빈' 김진규, 김지미,김동원 주연
1968년 영화 요화장희빈
1971년 만들어진 드라마
1981년 MBC '장희빈' 이미숙 주연
1988년 MBC'조선왕조500년 인현왕후 편' 강석우 전인화 박순애 견미리 주연
1995년 SBS '장희빈' 임호,정선경,김원회 주연
2003년 KBS '장희빈' 전광렬,김혜수,박선영,박예진 주연

그리고 지금 2010년에 방영중인 '동이'

 

필자는 위에 나열된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대한 영화 드라마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뭐,.역사를 너무 좋아해서라고 해둡시다.

어쨌던..

 

위 드라마나 영화중에 장희빈을 곱게?! 죽여준 드라마는 '동이' 뿐이다.

 

그러면..실록을 찾아보자.

희빈장씨의 죽음의 기록에 대해 말이다.

 

숙종 27년 신사(1701) 9월23일 (정미)
대행 왕비를 무고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다
밤에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禧嬪) 장씨(張氏)는 비단 한번도 기거(起居)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中宮殿)’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閔氏)’라고 일컬었으며, 또 말하기를, ‘민씨는 실로 요사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선당(就善堂)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婢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祈禱)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것을 참을 수가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제주(濟州)에 유배(流配)시킨 죄인 장희재(張希載)를 먼저 처형하여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행 왕비(大行王妃)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입시(入侍)하니, 왕비가 하교(下敎)하기를,
“갑술년에 복위(復位)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을 봉공(俸供)하는 등의 절목(節目)을 운위하면서, ‘마땅히 여러 빈어(嬪御)들과는 구별(區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궁중(宮中)의 사람들이 모두 다 다 희빈에게로 기울어졌다. 궁중(宮中)의 구법(舊法)에 의한다면 빈어에 속한 시녀(侍女)들은 감히 대내(大內) 근처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희빈에 속한 것들이 항상 나의 침전(寢殿)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窓)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너무나도 한심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崇]가 있다.’고 한다. 궁인(宮人) 시영(時英)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告)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다만 나는 갖은 고초(苦楚)를 받았으나, 지금 병이 난 두해 사이에 소원(所願)은 오직 빨리 죽는 데 있으나, 여전히 다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여 이처럼 병이 낫지 아니하니, 괴롭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巫蠱)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外間)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追慕)하여,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告)하였다.”
하였다.

희빈장씨의 죽음에 앞서 오빠인 장희재가 사사된다.

 

그리고 2일후 희빈장씨에 대한 숙종의 발표 또 몇번의 사사교지가 내려졌다.

 

숙종 27년 신사(1701)  9월25일 (기유) 
장 희빈을 자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리다
밤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옛날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구익 부인(鉤弋夫人)을 죽였으니, 결단할 것은 결단하였으나 그래도 진선(盡善)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만약 장씨(張氏)가 제가첩이라는 운명을 알아 그와 같지 아니하였다면 첩을 정실(正室)로 삼지 말라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히고 법령(法令)으로 만들어 족히 미리 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구익 부인에게 한 것과 같이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죄가 이미 밝게 드러났으므로 만약 선처하지 아니한다면 후일의 염려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니, 실로 국가를 위하고 세자(世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다. 장씨로 하여금 자진(自盡)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 27년 신사 (1701)  10월 8일(신유) 
희빈 장씨를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 죄로 자진하게 하라고 하교하다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내전(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대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 아! 세자의 사정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 만약 최석정(崔錫鼎)의 차자의 글과 같이 도리에 어긋나고 끌어다가 비유한 것에 윤기(倫紀)가 없는 경우는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겠지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춘궁을 위하여 애쓰는 정성을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다시 충분히 생각한 결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처분을 버려두고는 실로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나의 뜻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유시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이 비망기 희빈장씨는 살짝 무시는 한다.

 

실제 희빈장씨가 죽음을 맞은 것은 숙종 27년 신사(1701) 10년  10일 (계해)의 일이니까 말이다.

 

한..보름정도를 버틴 셈이다. 희빈장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아들이 훗날 왕위에 오를것이고, 죽음을 거부할 이유는 분명하고 단호하기는 했을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신료들과 유생들이 끝없는 상소를 올리고 세자도 나서 석고대죄를 올리는등 희망을 가지고 버텼을것이다.

 

그리하다가


숙종 27년 신사 (1701)10월 10일(계해) 
예조로 하여금 자진한 장 희빈의 상장의 제수를 참작하여 거행하라고 하교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씨(張氏)가 이미 자진(自盡)하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장(喪葬)의 제수(祭需)를 참작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결국 이리 파란만장한..궁인에서 중전까지 세자를 낳은 모후로 왕에 버금가는 권세와 왕의 사랑을 받았지만 사랑한 왕으로 사랑을 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결국 남편에게 버림받고 죽음을 맞는다.

 

단지 왕의 어머니인 후궁의 사사 사건을 조금더 흥미위주로 각색하여 재미를 더하려 했을뿐  사서속 야사속 그 어디에도 위의 사진들 처럼 그러한 죽음은 없었다.

 

사사된 희빈장씨는 두어번의 천장(이장)을 거쳐 숙종과 인현왕후의 곁인 서오릉에 잠들어 있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지 기ノ인 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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