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힌들 김유신장군이 신라의 대고구려전에서 공을 세운 건 청년기 때 부장으로 출전한 낭비성전투와 평양성에 군량수송이외에는 특별히 고구려전에서 공이 없다고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장군 열전에 보면
○<摠章>元年, <唐>皇帝, 旣策英公之功, 遂遣使宣慰, 濟師助戰, 兼賜金帛. 亦授詔書於<庾信>, 以褒獎之, 且諭入朝, 而不果行. 其詔書傳於家, 至五世孫失焉.
총장 원년에 당 나라 황제가 영공의 전공을 책명하고 바로 사자를 보내 그를 위로하는 동시에 군사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그리고 황금과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황제는 유신에게도 조서를 내려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또한 입조를 하라고 유시하였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조서는 그의 집안에 전하여 오다가 5세 손 때 잃어버렸다.
라는 구절을 보면 668년 즉 고구려 멸망당시 김유신장군에게 조서를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본기에 따르면 김유신장군은 풍병을 앓아 서울(서라벌)에 있었는 데 무슨 공이 있어 당고종이 조서를 내렸을까?
이와 관련해서 김유신열전에 주목해 볼 기사가 있다.
六月十二日, <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摠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摠管右{左}相檢校太子左中護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奉皇帝勅旨, 與宿衛沙湌<金三光>到<黨項津>
6월 12일, 요동방면 안무부대사 요동행군 부대총관 겸 웅진 방면 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태자 좌중호 상주국 낙성현 개국남 유 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 사찬 김 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 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우로 그를 맞게 하였다. 이 날, 우상 유 인궤는 약속을 끝내고 천강으로 떠났다.
여기서 사찬 김삼광은 김유신장군의 장자이며, 유인궤는 당시 패강도 총관이었으며 패강도라는 단어를 보아 당항성과 천강을 중심으로 당수군을 이용해서 패강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김삼광이 도착한 당항진은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목이고 신라수군의 중심기지이다. 즉 김유신장군의 장자 김상광은 668년 당시 패강도총관 유인궤의 패강침공을 측면지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 이 작전을 배후에서 총지휘한 인물은 아무래도 김유신장군으로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즉 김유신장군은 장자인 김삼광을 앞세워 신라수군을 배후에서 지휘하여 당수군의 패강진공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와 같은 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661년당시 김유신장군의 원정로에 동행했던 양도가 바닷길로 신라로 귀국하면서 고구려의 수로를 완전히 파악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고종이 김유신장군에게 전공을 포상하고 있는 것도 고구려침공당시 신라수군을 총지휘한 김유신장군의 공을 기렸기때문일 것이다.
또한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 김유신장군의 평양성원정에서 회군하면서 고구려군 1만명을 격살하고 장군 아달혜를 사로잡은 부분이다.
여기서 아달혜(阿達兮)는 阿達-兮로 분석된다. 즉 아달혜는 아달성의 장군으로 분석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달성은 현 강원도 안협지방으로 짐작된다. 즉 안협지방일대의 군단을 격파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안협지방은 신라의 고구려원정당시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冬十月二日, <英公>到<平壤城>北二百里, 差遣<尒同兮>村主大奈麻<江深>, 率<契丹>騎兵八十餘人, 歷<阿珍含城>, 至<漢城>移書, 以督兵期, 大王從之.
겨울 10월 2일, 영공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영공은 그 곳에서 이동혜 촌주 대내마 강심으로 하여금 거란 기병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경유하여 한성에 이르러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그 편지는 군사의 동원 기일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대왕이 이에 응하였다.
위 사료에서 아진함성은 아달성으로 짐작된다. 즉 아달성이 당나라와 신라간의 주요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짐작하기로 신라군의 평양진공도 이 지역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유신장군이 안협일대의 주요 고구려군단을 격파하여 안협지방을 제압했기에 나당간의 연합작전이 가능했고, 신라공의 고구려영내 진격시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평양까지 일사천리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庾信>等行抵<楊隩>,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營<楊隩>,
유신 등이 양오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을 만나 여러 가지 상황을 물었는데, 노인은 적국의 소식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유신은 노인에게 포백을 주었는데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버렸다.
라는 기록을 보면 이 때 고구려내에 신라에 협력하는 세력까지 포섭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김유신장군에의한 사전정지작업이 있었기에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킬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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