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300년만에 나타난 두 권의 화랑세기 필사본!
"(김경자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부산시 문화재 위원한테 갔다 보였어.
부산시 문화재위원이 보니까 자기로서는 감당이 안될 정도인기라.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역사가 뒤집히는 일인데.
- 이태길(번역자, 광복회부산지부장)
역사속에만 남아있던 한 권의 책,
삼국 통일 직후 700년쯤 신라 학자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그 책이 1,300년만에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화랑세기라!~
어떻습니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는 조금 낯설지만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책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
지금까지 그 책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책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년만에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잖습니까?
화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관창입니다.
신라 화랑 관창은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과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를 따르면
관창은 어린 나이에 삼국 통일 전쟁에 참가했다가 백제군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그러나 계백 장군이 그 기상을 가상히 여겨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관창은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하고
이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마침내 백제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관창은
그래서 화랑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관창 뿐만 아니라 화랑의 활약상은 다른 역사책 속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화랑들의 조직이나 계보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사랑, 알력, 음모와 같은 아주 개인적인 생활도 담겨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 필사본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것이라면,
신라사는 물론이고 고대사까지 다시 써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부산의 한 가정집에 소장되어 있었다.
취재팀은 소장자를 어렵게 만나볼 수 있었다.
필사본의 소장자인 김경자씨,
책은 남편이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다.
지금은 <성수학명(星壽鶴鳴)>이라고 씌여져 있다.
첫 장에 화랑세기(花郞世紀)라고 씌여있는 책은 모두 16장.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 즉 대표화랑들의 이야기다.
화랑의 기원은 물론 계보, 그리고 그들의 출생과 활동 등 사생활까지 담고 있다.
첫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에서부터 열다섯번째인 김유신까지,
화랑의 족보인 것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충북 청원 출신의 박창화.
박창화는 김씨의 남편 김종진씨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책은 죽기전에 물려준 것이라 한다.
"화랑세기가 어떤 책인가 알아보니까 이 책이 없어진 걸로 되어있더라구요.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하고,
만약에 진본으로 밝혀진다면 우리나라 신라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안 되겠나,
그런 생각도 들어서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 김경자씨(필사본 소장자)
화랑세기 필사본(筆寫本)은
1989년 2월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었다.
책 제목만 알려지던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1,300년만에 '필사본'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필사본을 가장 먼저 검토한 사람은
부산의 한문학자인 이태길 선생님.
"(김경자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부산시 문화재 위원한테 갔다 보였어.
부산시 문화재위원이 보니까 자기로서는 감당이 안될 정도인기라.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역사가 뒤집히는 일인데.
그래 나한테 연락을 해서 갔는데
그때는 이미 복사를 다 해놨더라고,
이게 32면밖에 안되거든 16장인데.
그래서 일단 있는 그대로 신문에다 번역을 해서
신문 공간이 허용하는대로 빨리 세상에 알리자 했지"
- 이태길(번역자, 광복회부산지부장)
그런데 그로부터 7년 뒤인 지난 1995년.
또 하나의 화랑세기 필사본의 소장자가 나타났다.
소장자는 박인규씨,
첫번째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의 손자였다.
"이게 할아버지께서 쓰신 필사본입니다."
필사본은 소중하게 한지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책은 많이 헐어있었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았다.
두 번째 필사본은 162장,
네 번째 대표화랑부터 서른두 번째까지,
총 스물여덟 명의 대표화랑 이야기다.
전체적인 구성은 첫 번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기록된 대표화랑들의 숫자가 많고 그 내용이 훨씬 다양하고 풍부하다.
이렇게 두 권의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박창화.
그는 1899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62년 사망한 한학자, 역사가였다.
그는 이 책을 1930~1940년대 썼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마디로 말해서 보통 사람과 좀 다른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어요.
어려서부터 글공부, 학문에만 열중하시고, 사교성이라든지, 명예라든지, 돈이라든지,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염두에 두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셨어요."
- 박인규(박창화 손자, 前 초등학교 교장)
그렇다면 두 권의 필사본은 무엇이 다를까?
첫번째 발견된 필사본은
두번째 것을 요약발췌한 것으로 추정된다.
1세부터 15세 대표화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뒷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필사한 시기도 빠르고
내용도 풍부해 모본으로 보이는 두번째 필사본은
4세부터 32세 대표화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앞부분이 없다.
따라서 뒷부분이 없는 첫번째 필사본과
앞부분이 없는 두번째 필사본이
합쳐져야 완전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되는 것이다.
2.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을 꺼렸다?
"김춘추는 부인 보랑(보라)가 있었는데 아름다웠고
딸 고타소를 낳아 몹시 사랑하였다.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이것은 삼국 통일에 주역이었던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 영정입니다.
두사람은 형제지간처럼 아주 절친했습니다.
그 중에서 김유신은 화랑 출신으로서
그 용맹성에 대해 많은 일화가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유신은 물론이고
김춘추도 대표화랑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유신은 15세 풍월주였고,
김춘추는 18세 풍월주였습니다.
'十五世庾信公(십오세유신공)'
'十八世春秋公(십팔세춘추공)'
새로운 사실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책은 김춘추의 결혼에 대해서도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김유신과 김춘추는 처남, 매제 사이였습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 두사람을 결혼 시키기 위해서 가장 애를 쓴 사람은 김유신이었습니다.
두사람의 친분 관계를 생각할 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의 결혼을 한동안 꺼렸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고,
뜻이 있었고, 행동이 법도가 있었다."
- 화랑세기 필사본
이 같은 김춘추의 풍모를 알아본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그는 김춘추와 동생 문희를 결혼 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우선 김춘추를 집으로 초대해 동생과 관계를 맺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동생이 임신을 하자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며 불에 태워 죽이려는 연극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결혼을 망설였는데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었다.
필사본에 따르면
김춘추에겐 이미 아름다운 부인과 딸까지 있었다.
"종전에 초혼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또 한편 학계에서는 김춘추가 아마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문희와 결혼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김춘추의 원래 부인이 있었다,
보라부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맞추어 볼 때
김춘추가 선뜻 결혼을 하지못하고 망설인 이유가
어느 정도 규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도학 박사(한양대 강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구한 것은 '선덕여왕'이었다.
때마침 김유신의 집앞을 지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책망한다.
그런데 화랑세기엔 선덕여왕이 '선덕공주'로 나온다.
이것이 더 정확한 기록으로 보인다.
왜냐면 이 사건은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엔 문희의 언니 보희도
김춘추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이것은 두 신흥 세력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3. 화랑의 기원은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나라에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냈다.
처음에 여자로 원화를 삼다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
필사본은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 집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필사본에 의하면
신궁이 제사 집단에서 화랑이 기원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그리고 또 화랑이 처음엔 여자였는데 남자로 바뀐다는 어떤 성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화랑의 성격, 조직의 커다란 변화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종전에 우리는 화랑하면 전사 집단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종교적인 제사 집단으로써의 가능성을 새롭게 모색해보게 되었습니다."
- 이도학 박사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
도인을 만나 무예를 익혔다는 경주 건천읍 단석산.
원래 제사 집단에서 비롯되었다는 필사본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화랑 김유신이 이곳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한 것이 명백해진다.
김유신은 여기서 단지 무예만 연마한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고 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랑이 본격적인 무사 집단으로 변한 건
본격적인 삼국 통일 전쟁을 치루면서였다.
새로운 사실은 이 뿐이 아니다.
이 책에선 화랑이라는 명칭이
첫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에서 비롯되었다고 쓰고 있다.
'화랑'의 명칭에 대한 기원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4. 위작 논란 <하나>,
화랑들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성생활 - 마복자 풍습
"아내가 임신하면 화랑가문에 들어가고
총애를 얻으면 남편이 사함(재물)을 올린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면
다시 들어가 세함을 바치고
총애를 받으면 물러난다"
"화랑이 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든든하고 체계적인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의견도 아주 강력합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껴쓴 것이 아니라
김대문이 쓴 것처럼 꾸민 가짜책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필사본에 대한 진위 논쟁이 지금껏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 때문에
한 권의 사서에 대한 논란이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걸까요?
자, 이쪽을 한 번 보시죠.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으로
김대문이 필사본을 쓴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향음(鄕音), 신라어로
화랑에 대해 기록하셨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불초 자식이 공무여가에
화랑 집단에 크고 작은 일들, 옳고 그른 일들의 기준을 적어서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이렇게 이 책의 저자가 김대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필사본이 진본이라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이 또한 위작의 근거가 된다는 논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필사자가 이 가짜책을 만들어놓고
마치 김대문이 쓴 것처럼 일부러 이 내용을 만들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필사본은 10년째 진위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송출정가'라는 향가다.
526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당시
전쟁에 나가는 화랑 사다함에게 미실이 바치는 향가다.
이것은 필사본이
화랑세기보다 후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를 참조했다는 의심을 받게 한다.
"필사본에서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데
향가는 13세기에 씌여진 삼국유사에서 마지막으로 수록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향가가 지어지지도 못했고 해독되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다시 해독된 것은 1929년입니다.
이점과,
필사본이 삼국유사를 참조하였다는 것을 연결시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1929년 이후에 창착되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 노태돈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그렇다면 필사본에 있는 향가는 위작을 만들 당시 창작된 것일까?
전문가를 찾아 알아보았다.
송출정가(送出征歌)
이것은 틀림없는 신라의 향가였다.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 당시 향가 해독 수준으로 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분이 필사를 할 당시는 일제 말기인데
그 시기에 우리나라 향가 연구가
향가 작품을 겨우 읽어나가는 해독의 수준이었습니다.
양주동 박사가 겨우 전체를 해독했고,
나머지 전문학자들은 겨우 한두 줄, 두세 줄 정도 읽어나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읽어나가기 바빴던 그 시절에
하물며 작품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신라 당시 향찰로 표기된 것을
후대 일제 말기에 필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김학성 교수(성균관대 국문학과)
필사본에 나오는 화랑들의 자유분망한 성생활도 진위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마복자(摩腹子)'라는 용어다.
마복자란, 화랑이 임신한 부하의 아내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도화 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마복자라 한다.
실제로 이런 관계가 가능했던 것일까?
"마복자란 신라 사회 성적인 문란으로 이야기 하는 분도 있지만
실제 마복자는 그 이상의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처왕의 경우에는 '마복 7성'이 있었고,
법흥왕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마복자와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하고의 관계는
정치, 사회적인 후견자와 추종자 관계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필사본은 마복자 풍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낭도의 아내가 임신을 하면
자신이 모시는 화랑에게 총애를 얻는데
이때 남편이 재물을 바친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또 다시 들어가 총애를 받고 재물을 바친다는 것이다.
"화랑세기에서 주목되어왔던 것이 '마복자 풍속'입니다.
마복자 풍속은 사회적 강자가 약자의 성을 유린하고 공인하는 그런 풍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장기화된다면 사회 기본 구성 단위인 가족이 유지될 수 있을까 반문합니다.
심지어 조정 대신들까지도 마복자 풍습에 노출되어있다면 가족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 노태돈 교수
신라 시대 토우를 보면
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자유로웠음을 볼 수 있다(장경호(長頸壺)).
여성들도 자유분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다함에게 향가를 지어준 미실의 경우,
남편이외 여섯명의 정부가 있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 성생활이 문란하지요.
기마 유목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이야깁니다.
예컨데 남녀 관계 뿐만 아니라, 계모, 형수, 처제, 등
그들은 종족이 단절되는 것을 막는다는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입니다".
(신라 김씨왕족은 북방 기마 민족 흉노의 후예)
- 이종학 소장(서라벌 군사연구소)
5. 위작 논란 <둘>,
필사본은 왜 일본식 장지와 일본식 종이에 씌여졌을까?
"왕립도서관에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자기가 거기에 여러가지 제약을 받으면서 십여 년 동안 있었는데,
그 속에 서적들 중에 한국에서 훔쳐간 책들이 있는데,
그걸 또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는 거예요,
그렇게 잘라서 자기네 것이라고 하며 보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간다고 가르쳐 주겠느냐 이거예요,
- 김준웅씨, 가정교사였던 박창화에게 들은 이야기.
"자, 이 책을 한 번 보시죠.
이 책은 모본으로써, 이 책의 매듭을 한 번 주목해보시죠.
보통 우리나라의 책은 그 매듭이 다섯 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필사본의 매듭은 넷입니다.
이렇게 네 개의 매듭을 사용하는 책은 주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사본에 사용한 종이 또한 한지가 아닙니다.
빨간색으로 금이 그어진 이 인쇄용지는
1920~30년대 일본 정부에서 사용한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화랑세기 필사한 이 책이
왜 일본식 장지와 일본식 종이에 씌여진 것일까?
혹시 이것이 어떤 단서를 알려주는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화랑세기를 필사한
박창화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씨는 1899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학과 역사학에도 아주 밝았고 한때 교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인테리였지요.
그런데 이 박창화씨는 어떻게 화랑세기를 필사하게 된 것일까요?"
박창화의 고향.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박창화 생가.
.
그는 1899년 이곳 박씨 집성촌에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천재라구, 하늘이 낸 천재라구,
한 번 들으면 잊지를 않는다구, 이런 보통 사람들하고 틀린다고 했지,"
- 박세규(86세, 마을주민)
박창화 자필이력서.
박창화는 1922년부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엮어 남겨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소설가 김팔봉씨의 회고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영동보통학교 교사를 엮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
"내가 11세때 충청북도 영동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했을 때
담임선생님이 박창화(朴昌和)이었는데
조선어, 일본, 체조를 가르쳤다."
그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화랑에 대해서, 젊은이들이 계곡에 다니면서 수련하고
제가 잊어버려서 그런데 그 시작도 이야기하시더군요.
그리고 화랑 제도라는 것이 쇠퇴하는 과정도 말씀을 하셨어요.
그 당시 화랑하면 그냥 바람둥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을 통해서 화랑의 본질이 고귀한 정신에 있는거구나 배웠어요."
- 임량재(前 중앙대 교수, 청주사범학교 근무시 박창화 제자)
해방후 같이 청주사범학교에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90세, 서울대 명예교수)도 만나볼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최기철 선생은 주목할만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이라도 해볼려고 중국을 갔는데,
국경을 넘어서 중국 안동이라는 곳에 갔대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대요.
독립운동을 한다면 치고 받고 야단이 났는데 정중히 모시더래요.
선생님 소원이 뭡니까? 묻길래,
'역사공부'라고 그러니까,
그러면 이제 좋은 수가 있습니다 하더래요.
우리가 역사공부를 실컷 할 수 있도록 그런 장소로 안내를 할테니까 안심하고 오십시오.
해서 간 곳이 황실도서관이라고 해요."
박창화와 일본 황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
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만두신 곳이 충북 괴산 공립여중고입니다.
단기4283년 1월, 서기로 1950년입니다."
그런데 이 교육청 이력서에도
'일본 국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1933년부터 12년 동안이었다.
일본 궁내청 서릉부(일명 왕실도서관)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겨우 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사적목록>이었다.
- 왕현철 PD특파원(KBS 도쿄총국)
우선 목록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는지 확인해봤다.
하지만 <화랑세기>나 화랑에 관련된 책은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들 뿐이었다.
일본 궁내성에서 박창화의 기록을 볼 수 없었던 취재팀은
다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40년대 일본 궁내성 직원록을 발견했다.
그 중 1935년 직원 명부에 '박창화'의 이름이 보였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수입 85엔이었다.
41년 명부에서는
박창화가 '소원창화(小原昌和)'로 이름이 바뀌어있다.
10여 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해방 직전 귀국했다.
해방 직후 그는 정부 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자신이 알고 있으니
자신이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테니 목록을 적어보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다.
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김준웅씨는 그 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왕립도서관에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자기가 거기에 여러가지 제약을 받으면서 십여 년 동안 있었는데,
그 속에 서적들 중에 한국에서 훔쳐간 책들이 있는데,
그걸 또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는 거예요,
그렇게 잘라서 자기네 것이라고 하며 보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간다고 가르쳐 주겠느냐 이거예요,
거기서 근무하면서 몇 층 어느 구석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여기서 간다고 일본이 주겠느냐 하셨어요."
일본왕립도서관엔 천황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도 미공개 도서로 이곳에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현재로서는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곳 왕실도서관에 미공개 도서로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에 사서였다는 것은
이 진위를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빼앗아간 많은 조선의 도서들이
이곳 왕실도서관에 있을 거라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랑세기>도 이곳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곳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연구하고 있던 박창화는
한학은 물론이고 역사학에 많은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선지 자신이 소장한 책도 많았고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창화의 소장한 책이나 저술한 책이
필사본의 진위를 밝혀줄 또 다른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박창화의 저서들과 소장한 책들은 그의 손자가 가지고 있다.
우선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보기로 했다.
박창화가 직접 쓴 한문소설들이 눈에 띄었다.
<어을우동기(於乙宇同紀)>, <홍수동기(紅樹洞記)> <도홍기(桃紅기)> 등
모두 남녀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었다.
역사학자인 그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의외였다.
박창화의 창작 능력은 그의 제자 김팔봉이 쓴 신문 컬럼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2학년 1학기부터 우리들한테
<막동이>라는 소년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크면서
조금씩 이루어간다는 성장담을 3년 동안 계속했는데도 끝이 안 났으니
이거야말로 춘원의 <무정(1917년 매일신보)보다도 앞섰던 장편 소설이 아니었던가 싶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박창화라는 분은
대단히 많은 독서를 했고 대단히 많은 저작물을 남겼습니다.
박창화씨의 제자 소설가 김팔봉씨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1910년대 이미 <막동이>라는 소설을 네 권이나 저술을 했고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박창화의 유작들을 살펴볼 때 운문식의 시들도 남아있습니다.
박창화의 여타 저술들을 살펴봤을 때
이 사람은 비록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대단히 노력하고
상당한 수준의 문필력과 창작력을 지닌 사람으로 파악되어집니다."
- 노태돈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박창화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 영토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필이력서에도 강역 연구를 이십년 동안이나 했다고 나온다.
소장 도서의 대부분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 어떤 단서가 있는 것일까?
그 중 한 책에는 광개토대왕을 '영락대제(永樂大帝)'라고 표현해놨다.
그런데 또 다른 책에서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용어 사용에 일관성이 없어보인다.
따라서 각각 다른 책을 보고 그대로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 대한 여러 개의 책들 저본을 보고 그냥 쓰신 걸로 보입니다.
일치하지 않는 책이 있다는 자체는,
이분이 의도적으로 편집하려는 것보다는,
자기가 본 것을 단지 필사만 했다는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 김용만, <고구려 발견> 저자
그런데 소장한 책들 중에 주목되는 문서가 있다.
만력(임진왜란)이전 조선고간본 사료.
일본 정부가 사용하던 용지에 초서로 흘려쓴 것이었다.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전문가를 찾아 알아보았다.
임진왜란 이전 간행한 조선의 도서를 기록한 목록이었다.
대부분이 국내에 있는 책들이었다.
화랑세기나 화랑에 관련된 책들도 찾아봤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전에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책의 목록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우리 유가의 경적도 있고, 문학적인 책도 있고, 불경도 있는데,
화랑세기에 관련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 허호구 전문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소)
또 하나 주목할 것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정리한 계보도.
역시 일본 정부에서 사용한 종이에 쓰여진 것으로
박창화가 왕실도서관 근무할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위작하기 위해 만든 계보도가 아닐까?
"화랑세기에 나오는 400여 명의 인물들 모두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또 20세 풍월주였던 예원(禮元)의 경우에 그 아버지는 7세 풍월주 보리(菩利)공입니다.
그런데 예원의 형인 원광(圓光)으로 잘못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보 자체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보도만 가지고 화랑세기를 위작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소장 문서 중에 가장 유력한 단서였던 계보도.
그 또한 필사본의 정체를 밝혀주진 못했다.
6. 위작 논란 <셋>,
금석문과 화랑세기 필사본의 희미한 관련성...
"일본 왕실도서관도 찾아보고
박창화의 소장 도서와 저서를 살펴보았지만 필사본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진위를 밝혀줄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필사본의 출저를 확인해도 그 진위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이 책의 내용을 하나씩 분석하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돌이나 비석에 새긴 글자를 '금석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금석문의 글자를
<화랑세기 필사본>을 비교해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금석문은 다른 사서들과 달리
당시 사람들이 직접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인물들이
만약 이 금석문에도 나타난다면
이 필사본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지난 1970년대에 발견된 천전리 암각화입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 이 글자는 법흥왕 때 씌여진 글자입니다.
'지몰시혜비애자사(只沒尸兮妃愛自思)'
'지몰시혜비', 이것은 법흥왕의 동생, 입종의 부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애자사, '스스로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연결하면
'부인이 남편 입종이 먼저 죽어서 그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면 법흥왕보다 그 동생 입종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법흥왕이 살아있을 때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은 지금까지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와 비슷한 기록이 나옵니다.
5대 대표화랑을 역임했던 사다함전입니다.
'法興崩而立宗亦薨(법흥붕이힙종역훙)'
그런데 법흥왕보다 그 동생 입종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면 천전리 금석문과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암각화의 금석문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암각화에는 화랑들에 대한 아주 풍부한 기록들이 남아있고,
또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많은 금석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에 발견된 천전리 암각화는
신라사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 유적이다.
특히 이곳엔 다양한 화랑의 이름이 등장한다.
울주군 강동면 천전리
우선 귀에 익은 '영랑(永郞)'이란 화랑의 이름이 보였다.
'충양랑(忠陽郞)이란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필사본엔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문첨랑'
이 또한 화랑세기엔 없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있는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발견되었다.
관랑.
필사본엔 '무관랑'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동일 인물로 단정할 순 없다.
천정리 암각화엔
'성강랑, 정광랑, 성림랑, 천랑, 선랑, 사랑, 법민랑, 충양랑, 문첨랑, 영랑, 관랑' 등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과 일치하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글씨는 아주 큰글씨부터 작은 글씨까지 있는데요,
탁본하지 않고서도 실명 정도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과 일치하는 인물이 있나 애를 써서 찾아봤는데
현재까지는 동일 인물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박홍국 박사(포항공대 강사)
화랑세기 필사본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금석문에선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만 보이는 백 수십 명의 인물 가운데
단 한 명의 사람도 금석문에선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입증받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만 나오는 백수십 명의 인물 중
한두 명이라도 확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이 모두 가공의 인물이 아닐까 의심해볼만 합니다."
- 권덕영 교수(부산외대 사학과)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과 유사한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989년 4월 영일만에서 발견된 영일냉수리비(포항시 신광면사무소).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에 발견된 것이다.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갈문왕은 즉위전 아버지나 왕에게 주는 호칭이다.
따라서 '지도로갈문왕'은 지증왕이 즉위전 불리워진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것과 비슷한 이름이 나온다.
필사본엔 '부군(副君)'이란 호칭이 나오는데
이것은 냉수리비의 갈문왕과 비슷한 호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과
금석문의 내용이 어느정도 일치한다는 증거가 된다.
7. 포석정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사당?
"금석문과 일치되는 부분이 몇몇 확인되기는 했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는 아직도 가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금석문과 비교하는 작업은 아직도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포석정입니다.
신라 왕과 귀족들이 술 마시며 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 포석정과 관련된 글자가 나옵니다.
'김춘추가 이곳 포석사에서 길례 즉, 결혼식을 올렸다'
'행길우포사(行吉于鮑祠)
신라왕과 귀족들의 놀이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니 좀 이상하지요?
또 이곳 포석정을 '포사'라고 씌고 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 '문노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畵像于鮑石祠(화상우포석사)'
"이곳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
또 포석정을 포석사라고 씌고 있고
이곳에서 뭔가 성스러운 일이 행해지고 있음을 씌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포석정과는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지난 5월 13일. 포석정의 비밀을 밝혀줄 획기적인 유물이 발견되었다.
포석정 근처에서 '포석'이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명문 기와는 가로 5.5cm, 세로 8cm.
'포석'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포(鮑)'자를 '포(砲)'자로 다르게 새긴 것은
기와 제작자의 편의를 위한 관행이었다.
포석정은 9세기경 창건되어 100여 년간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포석정 명문기와들은 7세기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는 이미 7세기에 포석정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화랑세기가 씌여질 당시 포석정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와가 출토될 당시 유구층이라고 그럽니다만,
그 유구층에서 삼국 시대까지 올라가는 유물들과 같이 혼재되어서 나왔기 때문에,
아마 이 포석정의 존속 연대를
8~9세기보다 훨씬 올라갈 수 있는 증빙 자료가 이번에 나온 것 같습니다."
- 김성범 실장(경주문화재연구소)
그렇다면 포석정의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 포석정은 신라왕과 귀족들의 놀이 공간으로 알려져 왔다.
<삼국유사>에
견훤이 음력 11월 쳐들어왔는데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 삼국유사 김부대왕편
그렇다면 정말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오는 위기속에서,
그것도 한겨울에 포석정에서 놀았던 것일까?
"견훤이 쳐들어온 것은 음력 11월이구요,
영천까지 쳐들어왔다는 것은 한 25킬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더라구요.
옛날로 봐도 25킬로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가 아닌데
신라땅까지 쳐들어와서 적이 바로 코 앞에 와 있는데 거기서 논단 말이죠,
적어도 상식적으로 안맞고.
그 다음에 음력 11월에 밖에서 잔을 물에 띄워놓고 논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죠
남쪽이라 하더라도 음력 11월이면 굉장히 추운텐데 말입니다."
- 강돈구 박사(정신문화연구원, 종교학)
<삼국유사>에 나오는 '遊鮑石亭(유포석정)'에서
'遊'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놀다'가 아니라, '갔다'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나 사기를 기록한 사람들이
그 당시만해도 신라가 왜 망하고 고려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느냐
말하기 위해서는 약간 좋지 않은 의미로 쓸 수밖에 없었는데,
신라가 왜 망했는냐, 적이 쳐들어오는데도 놀다가 망했다 이런 의미죠.
제가 보기에 기록자의 의도를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놀러갔다'라고 생각하고 썼을 수도 있고,
또 하나 기본 텍스트가 있다면
'놀러간 것'이 아니라, '그저 갔다' '갔다'는 의미죠.
그런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강돈구 박사(정신문화연구원, 종교학)
또 다른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유상곡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석정에서 지어진 시는 한편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포석정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췄다. 왕만이 홀로 봤다."
- 삼국유사
이렇게 보면 포석정은 신과 관련된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원래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청송산, 피전, 우지산, 금강산 등 4영지에 둘러싸인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산은 최고 신성한 산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므로 남산 기슭에 위치한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일 가능성이 있다.
"화랑세기를 보면 포석정 안에 문노의 화상,
삼국통일이 문노로부터 시작됐다고 화랑세기에 나오기도 하는데,
문노의 화상이 그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경애왕과 그 일족들이 포석사에 가서
견훤을 물리치고 신라를 지킬 수 있기를 빌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석정은 하나의 사당으로써,
그 안에 신라의 왕이나 통일에 공을 세웠던 화랑들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화랑세기 필사본에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는 기록은
포석정이 사당이었음을 처음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8. 경주 월성 발굴 '해자'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구지'!~
지난 84년부터 94년까지 십여 년간 경주 월성 발굴 작업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방어를 위해 성 주변에 인위적으로 만든 해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필사본에 해자와 비슷한 단어가 나온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색을 밝혀 무관랑과 살았는데
화랑들이 흉을 봤다.
그러자 무관랑이 성벽을 넘어 도망가다 구지에 빠졌다."
도랑과 못이 이어진 '구지(溝池)'가
바로 해자와 유사하다.
"사다함의 친구였던 무관랑이
금진에 의해 불러가서 산 곳이 어디냐 이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다함의 어머니였던 금진은
진왕에 의해서 궁중에 불러들어가서 '조화방부인'이란 명칭을 부여받으면서
궁중에 산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궁중이 어느 궁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겠는데
대체로 진왕이 살았던 현재의 월성, 신라 시대에는 '대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안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화랑세기 필사본은 월성 해자가
신라 시대 '구지'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무관랑이 사다함의 어머니와 살았다는 경주 월성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무관랑이 빠졌다는 월성 해자인데요,
이곳이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구지'라면은,
당시 신라인들은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을 때 인위적으로 쌓은 물길인
이 해자를 '구지'라고 불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화랑세기 필사본은
이렇게 화랑은 물론이고,
당시 신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제작진을 진위 여부를 알아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진짜 필자한 것인지 아닌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1,300여 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 화랑세기 필사본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김춘추의 이야기라든지, 포석사라든지, 구지처럼,
뭔가 새로운 사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늘 평안하세요!~~~)
출처 조선왕릉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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