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년 신라는 대방고지에서 당나라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당시 신라군의 손실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대아찬 효천․사찬 의문․사찬 산세․아찬 능신․아찬 두선․일길찬 안나함․일길찬 양신등 여러 고위급 장수들이 전사한 것으로 봐서 신라측의 손실도 상당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이 전투이후 당나라에 사죄사를 보낸 것으로 보아 중앙군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전투 이후 신라는 김유신장군의 건의에 의해 대당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된다. 김유신장군은 당시 다음과 같이 건의하게 된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유신에게 물었다. “군사가 이렇게 패하였으니 어찌하랴?” 유신이 대답하였다. “당인들의 모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지대를 지키게 해야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까지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김유신장군의 전략은 한마디로 말해서 ‘宜使將卒’, ‘各守要害’ 즉 要害방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의 패잔병을 이용해서 고구려 고토에서 당나라군대를 공격하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연무와 신라 설오유의 압록강을 넘은 연합작전과 한성에 근거한 안승을 이용해서 당군을 상대하는 전략을 썼으나 안승의 한성이 무너지고 신라로 투항한 이후에는 더 이상 고구려의 부흥군을 이용해서 당군을 상대하는 전략은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또한 당군과의 평야에서의 대규모회전은 대방고지 전투에서의 패배로 무모한 전략임이 들어난다. 김유신장군의 말에도 나타난 것처럼 당시 신라군부도 당군의 전투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군과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패전한 고구려부흥군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결과일 것이다. 이 이후 신라군은 군단의 재배치와 산성축성에 주력하게 된다.
672년 8월에 한산주 주장산성이 신축되었고 동년 전반에는 장창당이 신설된다. 672년에는 5주서를 신설하고 2개 계금당이 신설되었고, 2개 외삼천당이 신설되었다. 673년에는 서형산성, 북형산성을 축조하였고 중간 거점방어를 위해 삽량주 골쟁현성, 소문성, 이산성등을 축조하였다. 북방방어거점으로는 사열산성, 국원산성, 수약주 주양성이 축조되었다. 서방 방어거점으로는 달함군 주잠성, 거열주 만흥사 산성등이 축조되었다. 673년 9월이후에는 성채축조와 군단신설이 종료되고 있다. 이는 최고사령부의 일괄된 전략에 따른 방어전략의 완료라고 볼 수가 있다. 이후 전투양상은 연속된 전투와 유인 소모전의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특히 주목해 볼 것은 한 전투에서 여러번의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ㄱ.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호로․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당 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
ㄴ.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당 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 필의 전마를 얻었다.
위 전투기록들을 보면 당군과의 전투는 일회성의 전투로 끝나지를 않고 여러 대소규모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는 신라군이 한번의 회전에 대규모의 군사를 투입하지 않고 연이은 소모전으로 전투를 이끌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적목성, 석현성, 아달성, 매초성전투등 평지전보다는 대부분 산성전을 중심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신라군이 당군에게 불리하고 신라군에게 익숙한 산성전을 유도했다고 생각된다.
허나 당군에게 산성전과 소모전이 전혀 낯선 전투는 아니었다. 이미 고구려와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에서 소모전과 산성전을 경험할 만큼 경험한 적이 있는 당군이다. 3차고당전쟁에서 당나라군은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작은 성을 지나치고 大城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고구려를 공략한 바가 있다. 3차고당전쟁당시 신성과 부여성전투를 보면 큰성을 공략하면 그 일대의 작은 성들은 저절로 항복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당군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당군은 이후 각 주요성들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나오게 된다. 하지만 당군이 한 가지 간과한게 있었다. 즉 만주의 평야에 위치한 고구려의 방어체계와 한반도의 근간을 둔 신라의 방어체계가 분명달랐다는 것이다. 고구려나 신라나 산성에 기반을 둔 방어체계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체계가 종심이 좁은 긴 전면을 가진 체계였다면 신라는 이와 정반대로 긴 종심을 가지고 전면이 좁은 방어체계였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중심성이 떨어지면 그 주변성은 기능을 상실했던 것 같다. 아마도 지성들은 본성에 그 보급을 의존했던 것 같고 주요길목의 본성이 뚫려 적군이 후방으로 밀려들면 지성들은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김유신장군이 수립한 전략에따라 축성된 방어성들은 이와 다르다. 즉 고구려의 방어성들이 거리를 두고 적군의 진격로에 긴 띠처럼 가로로 이어지고 그런 방어선이 연이어 있는 형태라면 신라의 방어선은 주요도로를 따라 종심 깊이 방어성들이 연이어 이어진 형태인 것 같다. 만약 이런 방어선이라면 도로를 따라 거점성을 함락시켜도 오히려 점점 적군 깊숙이 빠져드는 형국이 되고 만다. 실제로 매초성전투에서 당군은 산성에 가로 막히고 보급이 끊어져 더 이상의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회군했던 것 같다. 김유신장군이 수립한 방어전략을 통해 신라는 당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대방고지에서 상실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게 된다. 또한 이 전략은 이후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한반도국가가 대륙의 북방유목국가를 막아내는 기본전략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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