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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흉노와 훈족은 모두 고조선의 삼한 중 신한의 후예이다. -검자-

회기로 2011. 3. 1. 19:26

* 흉노와 훈족은 모두 고조선의 삼한 중 신한의 후예이다. -검자- 

 

세계사의 돌풍 흉노와 훈족(3)
동서양의 대격변을 일으킨 흉노-훈족

崔秉鉉·李鍾宣 두 학자들이 말하는 흉노계 기마집단의 신라 유입 경로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김씨 왕족들이 흉노계라고 보는 데서는 일치하고 있다. 崔교수는 흉노 기마군단의 급작스러운 경주 진출을, 李원장은 흉노계 민족의 단계적인 이동을 想定하고 있다.

흉노족은 지금의 몽골고원에서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중국의 晉이 내부 권력투쟁으로 분열하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 등 다섯 유목민들은 南侵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胡16國 시대를 연출한다. 이런 유목민족 대이동의 흐름을 타고 일단의 흉노계 부족이 경주에 나타나 토착정권을 장악한다.

이 흉노계 신라 지배층이 삼국통일을 주도하여 오늘날 한민족으로 불리는 정치·문화·역사 공동체를 건설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라가 唐과 결전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할 수 있었던 정신적 힘-정체성, 자존심 같은 것도 출신성분이 漢族과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연유한 바가 클 것이다.

흉노족이 가진 특성은 모든 유목민족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민·용맹하며 자유분방하고 親자연적이고 정직하며 당당하다. 개인적이고 오기가 세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섭게 뭉쳤다가도 그런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도 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흉노계의 특성을 점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민족에게 알맞은 경영방식은 무엇인가, 왜 신라 김씨가 삼국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등등의 話頭를 세워볼 만하다.

훈·흉노·신라는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주는 기마민족의 띠이자 말의 길이다. 말이 가진 기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같은 시기(4~6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과 동쪽 끝에서 같은 흉노(훈)족에 의한 일대 격변으로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는가를 알기 힘들다. 붙박이 농경민족의 눈으로는 눈부시게 기동하는 기마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흉노족에 대한 연구는 민족사를 세계사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각의 일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우리를 보는 시각의 재정립이기도 할 것이다.


유목민족의 종착지 辰韓

중국의 晉나라 사람 陳壽가 3세기에 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馬韓·辰韓·弁韓의 三韓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람이 이곳을 여행하여 남긴 기록으로서 한국인의 조상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史實이다. 이 기록과 삼국사기, 그리고 고고학적인 발굴을 종합하면 신라의 지배세력은 동북아시아를 서북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즉 대각선으로 이동해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東夷傳에 따르면 辰韓의 왕이 항상 馬韓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양대 인류학과 金秉模 교수는 『이는 신라의 前身인 辰韓 사람들이 토착민인 지석묘人들과는 경제방식이 다른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 辰韓의 외래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東夷傳의 기록을 본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에 따르면 옛날에 秦나라 사람들이 괴로운 勞役을 피해 韓으로 들어왔는데 마한은 그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떼어 이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城柵(성책)이 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 다르고 秦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秦은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그 秦이다. 秦은 중국의 서부 감숙·섬서성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다수 주민들은 유목민들이었다. 戰國시대 7雄 중에서 秦만이 유목국이었고 나머지는 농경국이었다. 서기 전 221년에 秦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秦의 시황제는 蒙恬(몽염)의 지휘하에 만리장성을 쌓고, 함양에 궁궐을 짓는 등 백성들을 혹사했다. 이때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秦人들이 지금의 경상북도 지방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辰韓은 秦韓이라 쓰이기도 했다.

東夷傳은 이어서 이렇게 썼다.

<동방 사람들은 자신들을 阿라고 부르는데 樂浪郡의 사람을 阿殘이라 부른다. 낙랑군 사람들은 자신들의 殘余이므로 「阿殘」이라 부른다>

문맥상 東夷傳의 著者인 陳壽는 「辰韓사람들이 도망쳐 온 중국의 秦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낙랑군 주민 출신이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앞에서 李鍾宣 관장이 단정했듯이 고조선과 낙랑군(평양 부근)의 住民들은 흉노족이었다. 이 흉노족 중에는 秦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이 다시 경주로 옮겨가서 살고 있는 상황을 陳壽는 다소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갈래의 흉노족 流入

삼국사기에는 또 서라벌의 산과 계곡 속에는 기원 전 2세기 古朝鮮이 망한 뒤 그 유민들이 들어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條에는 또 辰韓 토착민들과 섞여 살던 秦人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적혀 있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고조선을 친 것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서기 전 2세기. 서기 1세기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자 낙랑 사람 5000명이 신라로 투항해 와서 6部에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낙랑사람들도 漢族이 아니라 낙랑의 귀족인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晉나라 사람 陳壽가 쓴 三國志의 「魏志」 東夷傳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2세기 신라땅에는 대강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지석묘(고인돌)에 묻혔다. 남방계가 많았을 것이다.

2. 서기 전 3세기 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

3. 서기 전 2세기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遺民들.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4. 서기 1세기 낙랑에서 투항해 온 5000명. 이들도 고조선이 망한 뒤 낙랑에 남아 漢族지배下에서 살던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東夷傳의 기사를 분석하면 중국 서북쪽(秦)에 살던 흉노족이 여러 차례의 흐름을 타고 고조선·낙랑지역인 평양 부근을 징검다리로 삼아 경주 지역으로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지만 文武王이 스스로 자신의 碑文에서 『나는 金日(김일제)의 후손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金日가 바로 秦나라 땅에 살던 흉노왕의 아들이었다. 文武王의 발언과 東夷傳의 기록, 그리고 고분 발굴 결과는 같은 맥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120년간의 흉노계 麻立干 시대

한양大 金秉模 교수는 남방계통인 농경민족을 북방흉노계 민족이 올라타는 식으로 신라종족이 구성되기 시작했는데 북방계가 권력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6세기 신라왕이 麻立干으로 불리던 시절의 金氏 왕족들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북방 초원문화, 즉 로마-스키타이-알타이로 연결되는 서방문화를 溫存해가면서 독특한 묘제(積石목곽분)와 금관·금팔찌·금귀고리·금허리띠들을 남겨 고고학자들을 놀라게도 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3세기에 쓰인 陳壽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騎馬부대를 지휘하였던 이 집단은 3세기 이후에 경주지역에 들어온 새로운 흉노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金秉模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쪽 끝으로서 초원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기마민족들이 팽창할 때는 거의 반드시 한반도에 진입·침입·정복의 과정을 밟았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기 이전의 고대에는 이런 북방민족의 진입이 여러 루트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흐름의 민족이동을 보면 하나의 분명한 차별성이 눈에 띈다.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夫餘系,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金閼智는 알타이 사람

그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金氏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金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金氏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瑞鳳塚(서봉총)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角杯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角杯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金氏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金氏의 조상 金閼智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脫解이사금 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始林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金秉模 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金이란 뜻이다. 金閼智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 昔脫解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金秉模 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系인 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0. 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살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氏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金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金은 여진족의 完顔部(완안부) 부족이 세웠다. 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金函普(金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金函普는 경순왕이 고려 王建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金渭顯·「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金의 皇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淸제국의 皇族들은 性을 愛新覺羅(애신각라)라고 했다. 「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金」이다. 이들은 淸이 망한 뒤 金으로 性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東아시아에서 金氏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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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민족회의
      글쓴이 : 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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