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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형사취수(嫂爲弟妻 自古之例也) (남당유고 유례이사금 9년 - 11년 기사)

회기로 2011. 3. 1. 20:45

九年 正月 奈宗伊伐飡 道明稟主

9년(A.D.358) 정월 내종(奈宗)을 이벌찬, 도명(道明)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帝以倭寇如鼠竊 欲滅其國而除根 弘權諫 曰 “彼地遠 莫預度 吾人不習於水 不可遠征 况夫余多詐乎” 乃止

2월 왕이 왜구(倭寇)가 쥐새끼와 같이 도둑질하니, 그 나라를 멸망시키어 뿌리 뽑기를 원하였다. 홍권(弘權)이 간하여 말하기를 “저 나라의 땅은 멀고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으니 원정(遠征)을 하는 것을 불가합니다. 더군다나 부여(夫余)는 속임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쳤다.


≪비교≫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2년 기사

12년 봄에 왕이 신하에게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서불한 홍권이 “우리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모험삼아 원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 밖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백제는 사술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병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옳다”고 말하였다.


仙帝與休禮奈勿祀花林 見奈勿進退得其節奠 薦合其儀 而贊之 曰 “朕有孫也” 乃賜龍天釰 命學于末仇 末仇曰 “聖人用光 良將用威 常夫用刃 吾兒欲學其何” 奈勿曰 “願聞其由” 末仇曰 “用光則可以祀上帝理萬民 用威則可以鎭三軍制勝敗 用刃則可以蔽身敵人也” 奈勿曰 “害人而圖已 非吾願也 願學活人之道” 末仇大悅 敎以用光之學

선제(仙帝, 미추)가 휴례(休禮), 내물(奈勿)과 더불어 화림(花林)의 제사를 지냈다. 내물이 나아갔다가 물러남을 보고 제사예절을 알고 있음을 알았는데, 제사의식(儀, 예절, 법도)을 통합하기를 천거하자 (미추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짐에게 손자가 있음이로다.”라고 하고 이에 용천도(龍天釰)를 내리며 말구(末仇)에게 (쓰는 법을) 배우라고 명하였다. 말구가 말하기를 “성인은 빛으로 사용하고, 좋은 장수는 위엄으로 사용하며, 평범한 사내는 병기(刃)로 쓴다. 우리 아이가 배우려하니 장차 어찌할까?”라고 하였다. 내물이 말하기를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말구가 말하기를 “빛으로 쓴다는 것은 상제(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에게 제사지내고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요, 위엄으로 쓴다는 것은 삼군(三軍)을 따르게 하여 승패를 만들어내는 것이요, 병기(刃)로 쓴다는 것은 몸을 가리고(蔽身) 다른 사람과 겨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물이 말하기를 “사람을 해치게 하는 것이라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배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말구가 크게 기뻐하며 빛을 쓰는 학문을 가르쳤다


五月 行黃馬祭

5월 황마(黃馬=戊午)제를 행하였다.


六月 末仇角干以暑痢疾篤 密召大西知 傳其秘藏 曰 “吾疾而父帝已老 可信者唯汝 吾死汝其妻吾妻 而子吾子 以紹花林大統” 命休禮與大西知同枕而誓 先是休禮愛末仇兵官好臨 密與相通 故欲以好臨爲繼夫而托 以月事而沮之 後數日末仇竟不起 休禮悲歎 與奈勿禱于靈 末仇長子冬九郞常慕休禮之美 自以爲當爲休禮繼夫 不謹禱事 而反戱于休禮 曰 “父死吾當爲汝夫 何歎之爲” 休禮鄙其人 而不與之酬應 及末仇薨 與其弟城九郞 假稱末仇遺命 逼休禮强淫之 休禮泣訴于好臨 好臨奏於仙帝 而流冬仇於管城 城九於阿瑟羅 休禮乃請于仙帝 欲以好臨爲夫 仙帝以其父微歎之 休禮不能自己 私引好臨爲夫婦而同處 大西知不悅 曰 “嫂當爲吾妻 何愛艾少 而負兄遺命乎” 休禮曰 “吾心欲從汝 而好臨乃阿后之寵子也 安得負之乎” 大西知發歎而出 奈勿謂休禮 曰 “父嘗言 妻吾妻 子吾子 叔父固當爲母夫 而兵官則不可爲也” 休禮曰 “母之所夫 卽汝父也 汝何以不呼曰父 而稱兵官乎” 時與休禮新夫好臨 情好甚密 故奈勿妬之 不稱父 而呼以兵官而侮之 休禮乃請於光明后 曰 “臣子慕聖女 可留宮中” 先是黃馬祭日 后召奈勿於道留宮中 同處一夜 時奈勿九歲 道留七歲 而情意相得 不欲相離 故仍留之 及末仇疾篤而出故也 后知休禮與好臨相愛 而遠其子 笑許之 曰 “汝愛吾弟 忌吾婿乎” 休禮慙而退 后召奈勿與道留 置左右而撫之 雛鳳凰甚可愛 休禮不知此樂 及雍判生 后以其乳幷授奈勿

6월 말구(末仇)각간이 더위와 이질(痢疾)로 위독해지자, 은밀히 대서지(大西知)를 불러 그 비장(秘藏, 비밀리 숨긴 것)을 전하여 말하기를, “내가 병들었지만 부제(父帝, 아바마마, 미추)는 이미 늙었으니 가히 믿을만한 자는 오직 너 뿐이구나. 내가 죽거든 너는 장차 나의 처를 아내로 삼고, 나의 아들을 아들로 삼아 화림(花林)의 대통을 잇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휴례(休禮)에게 대서지(大西知)와 동침하여 맹세하도록 하였다. 이전에 휴례가 말구의 병관 호임(好臨)을 사랑하여 은밀히 더불어 상통(相通)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호임을 계부(繼夫)로 삼아 의지하려고, 월사(月事, 월경)를 핑계로 동침을 막았다. 며칠 후에 말구가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자, 휴례가 비탄(悲歎, 슬픔)에 빠져 내물과 함께 영묘(靈廟, 선조의 영혼을 모신 사당)에서 빌었다. 말구의 장자(長子) 동구(冬九)랑은 항상 휴례의 아름다음을 사모하다가, 스스로 당연히 휴례의 계부(繼夫)가 될 것으로 여겼다. 삼가하여 기도하지 않고, 반대로 휴례를 희롱하며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당연히 너의 남편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한숨을 짓는 것처럼 가장하느냐?”라고 하였다. 휴례가 그 사람됨을 더럽게 여겨 함께 함을 수응(酬應, 남의 요구에 응함)하지 않았는데, 말구가 죽자 그의 동생 성구(城九)랑과 더불어 말구의 유명(遺命)이라 가칭(假稱, 임시로 혹은 거짓으로 칭함)하여 휴례를 핍박하여 강음(强淫, 강간)하였다. 휴례가 호임에게 읍소(泣訴, 울면서 간절히 하소연함)하니 호임이 선제(仙帝, 미추)에게 아뢰어, 동구는 관성(管城)에, 성구는 아슬라(阿瑟羅)에 유배 보냈다. 휴례가 이에 선제에게 청하여 호임을 남편 삼고자 원하니, 선제가 그 아비의 신분이 미미함을 탄식하였다. 휴례는 자신의 능력 밖이어서 사사로이 호임을 데려와서 부부가 되어 같이 살았다. 대서지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형수는 마땅히 나의 처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 나이 어린애를 사랑하여 형의 유명(遺命)을 저버리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휴례가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당신을 따르고 싶으나, 호임은 아후(阿后, 아이혜)의 총자(寵子,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의미 이외에 후계자라는 의미도 있다)이니 어찌 저버린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대서지가 한탄하며 나가버리니, 내물이 휴례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버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처를 아내로 삼고, 나의 아들을 아들로 삼으라 하였으니, 숙부만이 오로지 어머니의 남편이 될 수 있으며, 병관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휴례가 말하기를 “어미의 남편이 곧 너의 아버지이다.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라 하지 않고, 병관이라 부르느냐?”라고 하였다. 당시 휴례와 새 남편 호임이 서로의 뜻이 맞고 아주 사이가 좋아서 그런 연유로 내물이 시새움하여 아버지라 칭하지 않고, 병관이라 모욕한 것이었다. 휴례가 이에 광명후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신의 아들이 성녀(聖女)를 사모하니 궁중에 머무르게 할만합니다.”하였다. 이전에 황마제(黃馬祭, 5월의 기사에 있음)의 날에 후(后)가 내물을 도류궁(道留宮)에 불러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당시 내물은 9살이요, 도류는 7살이었으나 정의(情意, 감정과 의지)가 상득(情意, 서로의 뜻이 맞음)하여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니 그런 연유로 머무르게 하였는데, 말구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내보내었던 까닭이다. 후(后, 광명)가 휴례와 호임이 서로 사랑하여 그 아들을 멀리함을 알고는 웃으며 허락하여 말하기를 “네가 내 아우(호임)를 사랑하여 내 사위(내물)를 꺼리는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휴례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후가 내물을 불러 도류와 좌우에 두어 어루만졌다. 새끼 봉황(鳳凰)이 심히 사랑스러울 만 하였는데, 휴례는 이러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였다. 옹판(雍判)을 낳음에 이르자, (광명)후가 그 젖을 내물에게도 함께 주었다.


≪견해≫ 이 글에서 내물의 측근에서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어느 여성의 감정이 느껴진다.


七月 螺門伊伐飡 旱元稟主 螺門冬禮子冬門之子也 旱元沾解女也 或曰 阿后通嬖臣而生也

7월 라문(螺門)을 이벌찬으로 한원(旱元)을 품주로 삼았다. 라문은 동례(冬禮)의 아들 동문(冬門)의 아들이다. 한원은 첨해(沾解)의 딸이다. 혹은 아후(阿后)가 폐신(嬖臣, 귀여움을 받는 신하)과 통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年 正月 連石伊伐飡 棠月稟主 連石蘭石生連音子也 棠月仙帝寵妾也

10년(A.D.359) 1월 연석(連石)을 이벌찬, 당월(棠月)을 품주로 삼았다. 연석은 난석(蘭石)이 낳은 연음(連音)의 아들이다. 당월은 선제(仙帝) 총첩(寵妾, 극진한 사랑을 받는 첩)이다.


四月 造太陰神鏡十二面 奉于四山

4월 태음신경(太陰神鏡, 거울) 12면을 만들어 4산(四山, 京都 혹은 京師를 둘러싸는 4개의 산을 말하는 듯)에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仙帝命 光明后總執政事 帝出居挑山 仙帝入居花林宮 命大西知行六軍頭上

선제(帝命)의 명으로 광명후(光明后)가 나라 안의 정사를 총괄 집행하였다. 왕은 도산(挑山)으로 나가 살고, 선제는 화림궁(花林宮)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대서지(大西知)에게 명하여 6군두상의 집무를 행하게 하였다.


五月 休禮生好臨子好勿 賜米衣

5월 휴례(休禮)가 호임(好臨)의 아들 호물(好勿)을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六月 禮生生大西知子馬兒 仙帝視兒 賜米

6월 예생(禮生)이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마아(馬兒, 실성)를 낳았다. 선제(仙帝)가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七月 登非伊伐飡 千骨稟主 登非登保弟也 皆登世生也 其父仲解玉帽太后所生奈解子也 沾解帝兄也 千骨日骨女也 助賁女千氏生也

7월 등비(登非)를 이벌찬, 천골(千骨)을 품주로 삼았다. 등비는 등보(登保)의 동생으로, 모두 등세(登世)가 낳았다. 등비의 아버지 중해(仲解)는 옥모(玉帽)태후가 낳은 내해(奈解)의 아들이며, 첨해제(沾解帝)의 형이다. 천골은 일골(日骨)의 딸이고, 조분(助賁)의 딸 천씨(千氏)가 낳았다.


≪견해≫ 중해가 첨해의 형이라는 기록은 앞의 기록과 상충된다.


十月 以基臨爲副君 攝行光明后事 時阿后老昏 政事皆委於仙帝及光明 仙帝知光明之意 在基臨及訖解 訖解以于老之子 欲執軍權 仙帝乃與基臨 約以花林 軍權而立之 以制訖解 初基臨與訖解爲光明后左右私臣 情意甚密 至是遂相疎疑 互相有黨

10월 기림(基臨)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광명후(光明后)의 일을 섭행(攝行, 일을 대신함, 통치권을 대행함) 하였다. 당시 아후(阿后)가 늙어 정신이 흐리니, 정사는 모두 선제(仙帝)와 광명에게 위임하였다. 선제는 광명의 뜻이 기림과 흘해(訖解)에게 있음을 알고, 흘해는 우로(于老)의 아들로 군권을 잡기를 바라므로, 선제가 이에 기림과 화림(花林, 여기서는 제위)을 약속하고 군권(軍權)을 세운 것으로, 흘해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처음에 기림과 흘해는 광명후의 좌우사신(左右私臣)으로, 정의(情意, 감정과 의지)가 매우 친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로 멀리하고 의심하여 상호간에 당(黨)이 있었다.


≪견해≫ 대서지는 휴례의 일로 호임(好臨)과 포형(胞兄) 기림(基臨)과 소원해진 상태인데, 흘해가 이 틈을 이용하여 군권(軍權)을 가진 대서지를 끌어들였다.


十一年 白猿 正月 大西知伊伐飡 禮生稟主 禮生三元所生登保女也 美而善舞 大西知以三元情夫 愛禮生過情 竟相通而生子 至是稟主

11년(A.D.360) 백원(白猿=庚申) 대서지(大西知)를 이벌찬, 예생(禮生)을 품주로 삼았다. 예생은 삼원(三元)이 낳은 등보(登保)의 딸이다. 아름답고 춤에 능하였다. 대서지는 삼원의 정부(情夫)인데 예생을 사랑함이 지나쳐서 결국엔 상통(相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때에 이르러 품주가 되었다.


八月 光明后生仙帝女保反 仙帝洗之 命帝與副君更執政 禮生遂蒨 薦于帝 帝酷愛禮生 使不出宮 大西知失妻 欲復得休禮 休禮生好勿 而思見奈勿 迎歸 奈勿累言 負其父命 休禮與好臨 情愛少衰 頗有意焉 光明后亦因奈勿之請 命好臨之 曰 “休禮當爲大西知妻 而汝恃母后之寵而之 母后崩則 汝必受人譏也 可歸之” 好臨曰 “母后已昏 臣以姊后爲母 兄君爲父 安敢不奉乎” 遂歸之 而不忍情慕 竟爲心疾 云 一說 休禮憐 大西知慕己 而不近私女 禮生入宮 家臣議納代房 大西知曰 “吾嫂在 何可別娶” 休禮聞之 益憐之 密詣大西宅 私通之 好臨知之 怒 訴于光明及其兄基臨 光明愛奈勿而責好臨 帝亦禮生右於大西知 獨基臨愛其弟 責大西知 大西知曰 “嫂爲弟妻 自古之例也 誰敢言非乎” 基臨怒 欲治之 帝曰 “大西之言 是也 汝何愛蘗弟 而責重臣乎” 基臨乃泣 命好臨絶之 好臨不能絶之 休禮亦兩處 而不忍棄好臨 時奈勿與道留學歌于帝 帝爲之歌 曰 “有龜住海 其穴在山” 奈勿問其意 禮生在傍 笑 曰 “背負三神山 而足蹴八海浪故也” 帝曰 “又有別意” 禮生止之 曰 “休禮以我之故兩難 汝何嘲之” 奈勿乃解其意 請以母歸大西知

8월에 광명후(光明后)가 선제의 딸 보반(保反)을 낳으니, 선제(仙帝)가 보반을 씻겨주었다. 명(命)으로 왕에게 부군과 함께 다시 집정(執政, 나라의 정무를 맡아봄)하게 하여, 예생(禮生)이 왕에게 천거되어 품주가 되었다. 왕이 예생을 몹시 사랑하여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대서지(大西知)가 아내를 잃자, 다시 휴례(休禮)를 얻기를 원하였다. 휴례는 호물(好勿)을 낳고 내물(奈勿)을 그리워함을 드러내며 맞이하여 만나보고 싶어 돌아가려하였다(歸에는 시집가다의 뜻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휴례가 본래의 자리인 대서지에게 시집감을 말하는 듯). 내물이 누차로 말하길 아버지의 유명을 저버리고는 휴례와 호임의 정애(情愛, 따뜻한 사랑)는 조금은 쇠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자못 유의(有意, 생각이 있음, 의미가 있음)하였다. 광명후가 또한 내물의 청으로 인하여 호임에게 (휴례를) 대서지에게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휴례는 마땅히 대서지의 처가 되어야 할 것이나, 네가 모후(母后, 아이혜)의 총애를 믿고 빼앗았다. 모후가 돌아가시면 너는 반드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돌려주어야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호임이 말하기를 “모후(母后, 아이혜)가 이미 정신이 혼미하니, 신은 자후(姊后, 광명)를 어머니로 삼고, 형군(兄君, 기림)을 아버지로 삼으려 하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휴례를 돌려보냈으나, 사랑과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마음의 병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一說, 다른 말)에 휴례는 대서지가 자신을 사모하여 사녀(私女, 사사로이 만나는 여자)와 가까이 하지 않음을 좋게 여겼고, 예생(禮生)이 입궁하자, 가신(家臣)들이 안주인(房, 아내)을 대신할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을 의논하였다. 대서지가 말하기를 “나의 형수가 있는데 어찌 다른 아내를 맞이함이 가당하겠느냐?”라고 하였다. 휴례가 그 말을 듣고 대서지를 더욱 좋게 여겨, 은밀히 대서지의 집에 와서 사통(私通, 부부가 아닌 남녀가 몰래 정을 통함)하였다. 호임이 이를 알고 노하여 광명과 그의 형 기림(基臨)에게 하소연하니, 광명은 내물을 사랑하여 호임을 꾸짖었고, 왕 역시 예생을 빼앗고 대서지를 도우니(右, 돕다, 권하다), 오직 기림(基臨)만이 그 아우를 사랑하여 대서지를 꾸짖었다. 대서지가 말하기를 “형수가 아우의 처가 됨은 옛날부터의 예(例, 관례, 선례)입니다. 누가 감히 그르다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기림이 노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대서(지)의 말이 옳다. 너는 어찌 얼제(蘗弟, 그루터기가 되는 동생)를 사랑하여 중신을 꾸짖으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기림이 이에 울면서 호임에게 휴례와 절교하도록 명하였다. 호임은 휴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휴례 또한 양쪽에 거처하면서 호임을 차마 버리지 못하였다. 당시 내물은 도류(道留)와 함께 왕에게서 노래를 배웠는데, 왕이 그것을 노래삼아 말하기를 “바다에 사는 거북이는, 그 굴(穴, )은 산에 있다네.”라고 하였다. 내물이 그 의미를 묻자 예생이 곁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삼신산(三神山, 중국 전설에서 발해만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또는 우리나라의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이라고도 함, 여기서는 대서지를 말함)을 등에 지고, 족히 팔해(八海, 모든 바다, 여기서는 호임을 말함)의 파도를 차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또 다른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예생이 말을 그치게 하며 말하기를 “휴례는 나로 인하여 양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당신은 어찌 조롱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내물이 이에 그 뜻을 알아차리고, 어머니를 대서지에게 시집가도록 청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정성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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