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648년에 김유신장군이 대량주로 출전할 때, 대야성을 함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 데
말이죠. 요새 들어 토론하다 생각해 보니깐, 김유신장군은 대야성을 함락할 생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대야성함락은 불가능하리라고 보고 출전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네요.
여기계신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공성전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성전을 벌이려면 공격군의 숫자가 3배 아니 그 이상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기간이 몇 개월이 될지 아니 공성전이 몇 년을 끄는 경우도 있죠.
그리고 대야성에서 공성전에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백제의 지원군이 도착해서
오히려 안팎에서 포위당하는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래저래 생각해 봐도 당시 김유신장군이 여근곡에서 백제군 1천을 괴멸시켰다쳐도
대야성을 함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병법의 달인인 김유신장군이 이런 경우를 예상 못 할리가 없습니다.
허나 대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한다면 대량주전투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출전한
전투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뭔가 큰 공적을 세워서 입지를 강화해야 할 김유신장군의 입장에서는
대야성 함락에 버금가는 어떤 외적인 공적을 세워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제의한 것이 고타소의 유골반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춘추공의 위신을 세워주면서 김유신장군의 이미지를
고타소의 유골반환을 통해 강하게 인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량주전투에 대한 명분도 서는 것이겠죠.
그리고 명분뿐만 아니라 유골협상을 통해 시간을 벌 필요성이 있었을 겁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가야지역은 아주 중요한 지역이고 648년 전역의 명분은 대량주전투에대한 보복이지만, 역시
가야지역 수복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보기때문입니다.
즉, 고타소의 유골협상을 통새 여근곡 전투로 예기가 꺾인 백제군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 여타 가야지역을 회복하고
백제지원군을 격멸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죠.
허나 백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역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고 봅니다.
바로 백제지원군을 보낼 시간이 필요했기에 이 협상에 응했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는 김유신장군의 계책에따라 고타소의 유골도 찾고
백제군 3만을 격멸하는 대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648년 전역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은 격이죠.
대야성은 별다른 전투 업이 후에 신라로 귀속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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