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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이 건물은 사동리에 소재하는 사동초등학교 동편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해원헌은 공조참의(工曹參議)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던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별구(別構)이다. 처음에는 기성면 사동리 마악산에 건립되었다. 해월이 33세에 지은 일종의 정자(亭子) 기능을 한 건물이다.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간 해월은 명 황제의 오해를 풀고 양국의 우호를 증진하는데 이바지한다. 해월은 황제의 질문에 “조선은 3천 리 밖에 안 되지만 저의 집 앞에는 만 리 창해가 보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사실 해월이 살던 집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귀국 후 급히 마악산 아래 바다가 보이는 해월헌 옆에 정침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정침은 50년 후 불에 타 없어진다. 1588년(선조 21)에 건립된 후 1847년(헌종 13)에 후손들이 현 종택 내로 이축하였다. |
건축 특징 |
아계 이산해가 평해 황보에 유배를 오면서 “태백산 줄기가 끝나는 곳에는 반드시 정기가 뭉쳐진 길지가 있다. 이 해월헌 터가 바로 내가 찾던 곳이다.”라 했다.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이라고 한다. 아늑하게 감싸 안은 뒷산에 기품이 서린 적송과 왕대 숲은 고가와 잘 어우러져 멋스러운 운치를 더한다. |
건축 구성 |
건물은 뒤편의 야산을 등지고 앞쪽으로는 안들을 향해 정침·해월헌·사당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배치구성은 1993년에 복원된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과 해월헌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해월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전면에는 누마루처럼 꾸민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돌렸다. 평면은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측간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정침은 정면 7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전면 양측으로 1칸씩 돌출되어 양날개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 뒤로 3칸 규모의 대칭을 두었다. 대청 좌우에는 안방과 상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상방의 전면에는 익사가 연접되어 있다. 이 지역 상류주택 특성을 잘 보여준다. |
현판 |
해월헌 관련 현판 |
해월헌(海月軒) 130x40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친필 만귀헌(晩歸軒) 181x82 석봉 한호(芝峰 李晬光) 친필 차 해월헌 운(次 海月軒 韻) 48x30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 제 해월헌(題 海月軒) 94.5x30.8 약포 정탁(藥圃 鄭琢) 근차해월헌운(謹次海月軒韻) 72x30.5 식암 황섬섬(息庵 黃暹暹) 차 해월헌 운(次 海月軒 韻) 54.6x31 오창 박동량(梧窓 朴東亮) 제 해월헌 제납량대(題 海月軒 題納凉臺) 67.5x31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해월헌기(海月軒記) 105.7x32.2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제해월헌(題海月軒) 53.2x27.9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용청강운기제 해월헌(用淸江韻寄題 海月軒) 51.5x21.5 필운 이항복(弼雲 李恒福) 차운(次韻) 52.6x26.4 대해 황응청(大海 黃應淸) 제해월헌(題海月軒) 53x26.4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 차청강운운기제황사군 해월정(次淸江韻韻寄題黃使君 海月亭) 48.5x30.7 상촌 신흠(象村 申欽) 제해월헌(題海月軒) 54.5x26.9 구사 오정일(龜沙 吳挺一) 차해월헌운(次海月軒韻) 47.5x37.7 규오 유인길(葵烏 柳寅吉) 차봉판상운(次奉板上韻) 53.3x32.4 다산 목대흠(茶山 睦大欽) 근차 해월헌운(謹次 海月軒韻) 54.7x22.3 사계 이영발(沙溪 李英發) 근차해월헌 판상운(謹次海月軒 板上韻) 65x30 황진규(黃鎭奎) 모고와(暮古窩) 61.7x23 정침(正寢) 사랑채 현판 죽와기(竹窩記) 71.7x33 김준영(金駿永) 친필 |
문중 이야기 | |
- 지역의 명문가 | |
울진과 평해 지방에서 조선 시대에 제일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병조참의를 한 해월과 승지 벼슬을 한 동명이 해월헌에서 나왔다. 또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큰 공을 세운 정담 장군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해월헌에서 학문을 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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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에게 물려주었던 해월헌 | |
해월헌은 옛날부터 강릉 이남의 길지로 이 기운을 이어가려면 딸에게 집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정선 군수를 지낸 권조(權組)가 살다가 사위인 홍천 군수 이명유(李命裕)에게 물려주었고, 이명유는 사위인 정창국(鄭昌國)에게 물려주었다. 정창국은 또 사위인 황응징에게 물려주었다. 황응징은 해월의 부친이다. 황응징은 외아들인 해월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로는 장자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딸에게 물려주는 전통을 이어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아는 이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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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봉가문과의 단절 사건 | |
해월이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딸에게 장가를 가고 처가에서 안동의 ‘박실’이란 땅을 사위에게 주었다. 그러나 황중윤은 중헌의 아들 석래를 양자로 들이게 된다. 이때 귀봉가에서는 석래에게는 박실 땅을 줄 수 없다 하여 회수한다. 그러자 박실에 있던 황중윤의 모친인 의성김씨 묘를 이장하여 온정면 금천에 있는 해월묘와 합봉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가는 10여 대 약 300년간 왕래가 끊긴다. 현 종손인 황의석의 조모 대에 와서 화해하게 된다. 화해의 결과로 의성김씨 집안에서 해월헌으로 시집을 오게 된다. |
관련유물 |
- 관련유물 |
해월종택에 소장된 고서는 대부분이 선조 대에서 광해군 대 주로 활약한 황여일․황중윤 부자와 관련된 필사 원본 자료들이다. 황여일이 1590년(선조 23)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내사본(內賜本) 『대학언해(大學諺解)』이다. 황여일이 사환(仕宦) 및 사행(使行), 그리고 종군(從軍)과정에서 직접 쓴 일기 초고를 모아 편집한 『해월선조일기필적(海月先祖日記筆蹟)』, 『해월헌계미일기(海月軒癸未日記)』, 『조천일기유고(朝天日記遺藁)』, 『은사일록(銀槎日錄)』, 『일기초(日記草)』등은 일부가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황중윤이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기인 『서정록(西征錄)』, 해남유배 당시의 일기인 『남천록(南遷錄)』, 이산해의 시문을 편집한 『아계유고(鵝溪遺稿)』을 비롯해 그의 문학작품인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과 『삼황연의(三皇演義)』(「천군기(天君紀), 「사대기(四代紀)」, 「옥황기(玉皇紀)」합철) 역시 필사본이다. 특히 『남천록』은 『동명선생문집(東溟先生文集)』에 일부만 소개된 것과는 달리, 이 기록은 그의 배소(配所)가 정해질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수록하고 있다. 황여일의 저작을 모아 편집한 『잡고(雜藁)』와 황중윤의 글을 모은 『동명선조유묵(東溟先祖遺墨)』․『월동난고(月洞亂稿)』, 이 가문의 적서(嫡庶)분쟁의 일단을 보여주는 『소지첩(所志帖)』이 있다. 이 가문에 소장된 고문서는 전체 44점 가운데 황여일․황중윤 부자의 환력(宦曆)을 보여주는 교지(敎旨) 28점과 유지(有旨) 5점이 다수다. 해월종택에서 전승해 온 황여일의 유품으로는 관대(冠帶)를 비롯한 전통용(傳通用) 복대(腹帶), 마상용(馬上用) 주통(酒桶), 사복각(紗纀角), 휴대용 모필갑(毛筆匣), 옥잠(玉簪), 화살, 비녀 등이 있다. 목판본으로 『해월집』7책 14권의 발간을 위해 각인(刻印)한 목판과『동명집』5책 8권의 간행을 목적으로 새긴 목판, 그리고 황여일의 숙부로 남사고ㆍ조목ㆍ이산해 등과 교유관계가 있었던 황응청(黃應淸)의 문집인 『대해집(大海集)』1책이 있다. |
관련인물 | |
- 황응징(黃應澄) | |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부친이고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의 조부다. 임진란의 영웅 정담(鄭湛)장군을 어릴 때 가르쳐 대성하게 하였다. 정담의 부친 정창국(鄭昌國)의 사위가 되어 해월헌 정침을 물려받은 인물이다. 황응징은 딸이 없자 외아들인 해월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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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여일(黃汝一, 1556~1622) | |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아들로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수학하였다. 그 뒤 퇴계 문하 학봉(學峰) 김성일(金誠一)의 제자가 된다. 더구나 해월은 학봉의 중형(仲兄)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사위가 된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시작으로 그 뒤 경상도어사(慶尙道御使), 1592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맡았다. 임진왜란이 나자 지략을 발휘 함경 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종사관이 된다. 1593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을 맡는다.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598년 명나라와 국교가 위태롭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정사(正使)로,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에 공을 세운다. 1601년 예천 군수를 거쳐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창원부사(昌原府使), 1615년에 동래부사, 공조참의 벼슬에 오른다. 1622년(광해군 14)에 졸하였다. 1758년 고을 사람들이 기성면 정명리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함께 배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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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중윤(黃中允, 1577~1648) | |
공조참의를 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장남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정언·헌납·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징병을 논의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후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승지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 즉위 후 광해군 추종세력으로 몰려 유배를 당하게 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 어느 섬에 갔다가 다음 해 해남에 위리안치되었다. 1633년(인조 11)까지 유배생활을 한다. 고향에 돌아와 원남면 덕신촌(德新村)에 전답을 마련하고 산건(山巾)을 썼으며, 야복(野服)을 입고 농사를 짓거나 기성면 방률리 범밭에 수월당(水月堂)이라는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하였다. 1628년(인조 26) 졸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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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담(鄭湛, ?~1592) | |
자는 언결(彦潔)이고 아버지는 창국(昌國)이다. 무과에 급제한 1592년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나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금산(錦山)을 거쳐 전주(全州)를 공략하려는 왜군을 웅치(熊峙)에서 육탄전으로 방어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왜장이 그 충절에 경의를 표하여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묘비를 세웠으며, 1690년(숙종 16)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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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만영(黃萬英, 1875~1939) | |
호는 국오(菊塢), 자는 응칠(應七), 해월 황여일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황수이다. 청년시절부터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기성면 사동리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국권침탈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등과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고,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신간회 울진지회 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울진 > 원남기성권 > 기성면 사동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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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자연환경과 역사 | |
동쪽으로 사동항이 있으며 푸른 동해(東海)가 펼쳐져 있다. 서쪽은 마악산(馬岳山)을 경계로 삼산리(三山里)가 있다. 남쪽은 전설(傳說)이 담긴 도지고개 너머에 방률리로 가는 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기성리다. 북쪽은 흙리고개와 진불백사장(白沙場)을 경계로 망양1리가 있다. 아계 이산해가 지은 『사동기』에 보면 ‘마을의 이름이 사동(沙洞)으로 된 것은 산에서 따온 것인데, 마악산이 백암에서 뿌리를 두어 동쪽으로 50여 리 뻗어 바다에서 멈추고 물은 마악의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강 머리에 섬산이 외롭게 서 있는데 섬 서쪽 포구를 서경이라 부르고.’라고 나온다. 그때의 마을을 설명하고 있는 귀한 자료다. 사동리는 상사동(上沙銅), 하사동(下沙銅), 주담(周潭)의 3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상사동(上沙銅)에는 본 마을 외에 장밭골, 돌담마을이 있고, 하사동(下沙銅)은 세천(細川)을 경계로 남쪽 마을이 염전마, 북쪽 마을이 장장골이다. 사동(沙銅)이란 마을 이름은 이 지역에 모래가 많고, 광물질(鑛物質)이 매장되어 있다는 구전(口傳)에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동1리, 사동2리, 사동3리로 되었다. 해월헌이 있는 상사동(上沙銅)은 약 600년 전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들어와 지금의 황씨(黃氏) 고기(古基)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 기지(基地)는 게 모양으로 양쪽 집게발로 집을 보호하는 좋은 자리라고 한다. 또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강릉 이남에서는 제일 좋은 명당이라고도 한다. 외손(外孫)이 봉사(奉祀)하는 터라는 풍수적 설에 따라 권씨(權氏)는 사위인 전의이씨(全義李氏)에 물려주고, 또 그 후 이씨(李氏)는 야성정씨(野城鄭氏)에게, 정씨(鄭氏)는 평해황씨(平海黃氏)에게 물려주었다. 처음 이 터를 물려받은 사람은 황응징이다. 그는 무녀 독남인 황여일에게 물려주고 그때부터는 지금까지 황씨의 터가 된다. 권씨(權氏)와 정씨(鄭氏)는 떠나고 황씨(黃氏)는 이씨(李氏)와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울진에서 유일하게 마을 동신당이 없는 곳이다. 마을에 큰 유현이 나오면 성황당을 두지 않는다고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 선비의 정신이 이어지던 이곳저곳 해월헌(海月軒)을 비롯하여 사계당(沙溪堂), 애월당(愛月堂)이 있다. 서당터(書堂址)는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사계당(沙溪堂) 이영발(李英發), 애월당(愛月堂) 남유주(南有周) 세 선생(先生)을 봉안(奉安)하기 위하여 서원(書院)을 건립(建立)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당(書堂)으로 보호(保護)되어 오다가 지금은 철거되고 터만 남아 있다. 한때는 대흥학교(大興學校)의 임시교사(校舍)였다. - 도지고개 전설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유취재취(有娶再娶)가 신행(新行) 올 때 가마가 집 앞 고개를 넘어오는데 부인이 가마꼭지를 떼고 오라고 호통치니 신행(新行)에 오던 상객(上客)이 넘어오던 고개를 다시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어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동명 황종윤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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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최고의 문벌 집안에 태어나 승지에 오르다 | |||||||||||||||||||||||||||||||
부친은 공조참의를 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요, 퇴계의 최대 학맥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제자다. 더구나 동명의 외가는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다. 부친은 말할 것도 없고 조부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종조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같은 학자의 집안에서 일찍이 학문적 소양과 재질을 발견한다. 외삼촌인 김용(金湧)은 해월에게 “이 아이는 골상이 비범하니 진실로 그대의 가문을 빛낼 것이다.”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정언·헌납·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징병을 논의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후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승지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 즉위 후 광해군 추종 세력으로 몰려 유배를 당하는 빌미가 된다. | |||||||||||||||||||||||||||||||
해남으로 귀양가다 |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 어느 섬에 갔다가 다음 해 해남에 위리안치되었다. 1633년(인조 11)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0년 넘게 배소에서 참람한 시간을 보낸다. 전라도 해남에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장인지라 윤선도와 그 부근에 사는 몇몇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읊고 술잔을 나누면서 지냈는데, 윤선도는 그의 종제인 선진(善進), 선일(善一) 형제를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633년 5월에 인조대왕께서 공을 방면해주라는 특명이 있었으나 대간(臺諫)에서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한 수다. 동명은 이해 11월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상 어디인들 내 견디지 못할 땅 있으랴 하물며 이곳 자연 속에 숨어 지내니 괴로울 게 없구나 문을 굳게 닫고 남과 사귀지 않고 지내니 숲 속의 노란 꾀꼬리는 자재(自在)히 울어댄다.” 世間何地不堪棲 況是江湖興隠齋 閉門却掃無人事 深樹黃鸝自在啼 | |||||||||||||||||||||||||||||||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고향산천에서 생을 접다 | |||||||||||||||||||||||||||||||
고향에 돌아오자 외사촌 동생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縕)이 찾아와 위로하며 비분한 회포를 나누었다. 울진현령 난재(懶齋) 신열도(申悅道)도 찾아와 놀았다. 원남면 덕신촌(德新村)에 전답을 마련하고 산건(山巾)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고 농사를 짓거나 기성면 방률리 범밭에 수월당(水月堂)이라는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조대왕의 굴욕적인 항복에 비분한다. 당시 선비들의 표출 방법으로 ‘은둔’의 행위들은 여러 지역에서 보인다. 집안의 내조를 버리고 홀로 산간벽지를 돌아다니거나 산사(山寺)에서 스스로 죄인을 자처(自處)하였다. 1628년(인조 26) 3월 29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향년 72세다. 당시 평해군 북쪽 먹방동(墨坊洞)에 장사지냈다. 동명의 수월당 시 “옛사람 일찍이 이 누에 오르고 싶어했거니 / 先人會欲此樓身 손 꼽아보니 지금부터 오십 년이 흘렀구려 / 屈指如今五十春 강산의 풍광은 아직도 예와 같건만 / 風月壺天惟似舊 건곤의 인간 세상은 몇 차례나 바뀌었나 / 乾坤㤼界幾回新 연하는 이미 전가물로 만들었거니 / 烟霞己作傳家物 구릉은 즐겨 세상을 피할 장소 되었다네 / 邱壑甘爲遯世人 사슴들도 다시 주인을 얻은 것 기뻐하는 듯 / 麋鹿亦欣重得主 숲에서 걸어 나와 서로 친하려 하는구나 / 出來林麓自相親 “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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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 ||||||||||||||||
부친은 공조참의를 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다. 조부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은 정담(鄭湛)장군의 매형이 된다. 종조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은 부친의 스승이기도 하다. 외가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다. 부인은 대암(大菴) 박성(朴惺)의 딸이다. 장인이자 스승이기도 하다. 황중윤은 향리에서 일족(一族)에게 돈목(敦睦)하고 공경하여 조금도 자신이 부(富)하고 귀(貴)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동명은 중헌(中憲)의 아들 석래(石來)를 양자로 들였다. 슬하에 딸 둘이 있는데 군수 조정융(曺挺融)과 참봉 정기덕(鄭基德)의 부인이다. 아들 석래는 퇴계의 증손녀와 결혼하였다. 후에 계비(繼妃)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의 딸을 맞아들인다. 석래는 2남 4녀가 있는데, 아들은 규(圭)와 기(基)이고 딸은 이후재, 서한진, 정석규, 박태후의 부인이 된다. 영해 장인 박대암 문하에서 배우고 외가댁인 안동 귀봉(龜峯)댁에 드나들어 사문(斯文)의 대가(大家)들에게 훈도(薰導)를 받아 문자(文字) 밖에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아 그 행한바 효도와 충성의 아름다움이 몸에 배었다. 계모가 세 살이나 적었지만 지극한 효도로서 섬기고 이씨 또한 성종대왕의 증손녀로서 그 덕이 지극하였다. 모두 자식같이 하고 자기가 낳은 자식은 서자라 분가(分家)하는데도 본실 자식을 우대하고 처사하는 것이 가히 남의 모범이 되었다. 적서(嫡庶)를 합하여 8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사랑으로서 키우고 분가(分家)한 뒤에도 항상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동생 중량(中亮)이 선달(先達)로서 정묘호란 때 청천강(淸川江) 전투에서 전사, 그 시체를 거두지 못하여 항상 애통해 하였으며 종신토록 그 정을 잊지 않았다. 또 조상을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시조로부터 조상대대에 이르기까지 다 묘답을 마련하고 봉제사에 성의를 다했으며 그 일언일동(一言一動)이 다 삼가고 엄하여 한 가문의 표준이 되었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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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이원익(李元翼), 조정융(曺挺融), 불영사 성원법사, 안여명(安汝明), 황처중(黃處中), 박돈복(朴敦復), 원경순(元景錞), 박건원(朴乾元), 최기벽(崔基鐴), 박성(朴惺), 류우잠(柳友潛), 권이우(權二愚) | ||||||||||
학문이야기 | ||||||||||
부친은 공조참의를 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요, 퇴계의 최대 학맥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제자다. 더구나 동명의 외가는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다. 부친과 조부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종조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같은 대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의 길을 걷는데 좋은 조건을 가진다.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문학에는 천부적 자질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원근에 그 이름이 높았다. 좋은 환경과 본인의 각고면려(刻苦勉勵)한 노력으로 대과(大科) 급제한다. 장인인 영해의 대암(大菴) 박성(朴惺) 문하에서 배우고 외가댁인 안동 김수일 집에 드나들어 사문(斯文)의 대가(大家)들에게 훈도(薰導)를 받아 문자(文字) 밖에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아 그 행실이 돈독하였다. 대암은 조선 중기의 학자요 의사(義士)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토사(招討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하였고, 정유재란 때 조목(趙穆)과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에 들어가고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배소인 전라도 해남에서도 학문의 증진을 멈추지 않았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부근에 사는 몇몇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읊었다. 윤선도는 그의 종제 선진(善進), 선일(善一) 형제를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에서는 원근의 많은 청년 선비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 각기 그 재주에 따라 과정을 정해 가르쳐 학문에 성취(成就)한 자가 많았다. 울진의 벽향(僻鄕)에 예도(禮道)가 일어난 것은 동명의 공이라고 지금껏 칭송하였다. 지역 유림에서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사동에 향현사(鄕賢祠)를 짓고 동명을 배향하였다. 구한말 대원군의 폐원령(廢院令)에 의해 훼철되고 지금은 없다. |
저작이야기
저작이야기 |
황중윤의 문집인『동명선생문집(東溟先生文集)』이 있다. 1905년(광무 9)에 8대손 황수(黃洙)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전체 8권 5책 분량이다. 한문 소설인 달천몽유록(撻川夢遊錄), 삼황연의(三皇演義)에 옥황기(玉皇記), 일사(逸史), 천군기(天君記), 희경연의(羲經演義)가 있다. 이 중 천군기(天君記)는 주색(酒色)을 도적(冦賊)으로 삼고 정성과 공경하는 도리로써 도적을 치는 장수[將相]로 삼아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주색에 대한 온갖 유혹을 엄히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달천몽유록(撻川夢遊錄)은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주막에서 묵게 된다. 그날 밤 꿈에 신립장군이 충주탄금대에서 패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꿈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문장력이 뛰어나서 장문이든 단문이든 간에 붓대만 쥐면 미처 생각할 사이가 없는 듯이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화창하고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다. 시율(詩律)은 맑고 곱고 그 뜻이 그윽하여 흡사 위(魏)․진(晉)시대의 대문장가들과 같았다. 그는 가족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남긴다. 아버지에게 안부와 자문을 받는 내용도 있으며, 당시 정황을 자세히 알리고 있는 내용도 많다. 그 중에서 그가 해남에서 귀양을 살고 있던 1627년(인조 5)에 동생 중순(中順)과 중원(中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가족 간의 우애와 걱정하는 마음이 잘 나타난다. “너희들의 편지를 받아보니 얼굴을 대하는 듯 기쁘고 위로됨이 한량없다. 헤어진 지 5년이다. 언젠가 내가 살아 돌아갈 때는 너희가 이미 성년(成年)이 되고 나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되겠구나. 이 어찌 처량한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여기 와서 여러 가지 액환(厄患)에 갈수록 견디기 어렵구나. 그러나 너희는 열심히 공부하여 선인(先人)의 업(業)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힘쓰고 또 힘쓰라.” |
해월 황여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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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家學)으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제자가 되다 | |||||||||||||||||||||||||||||||||||||
아주 어려서는 부친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에게 글을 배웠다. 그 뒤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수학하였다. 부친은 임진란의 영웅 정담(鄭湛)장군을 어릴 때 가르쳐 대성시켰다. 대해는 퇴계 문하에서 유일하게 도산서원에 배향된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깊은 교유를 하였으며 영의정을 지냈던 아계 이산해와 교유할 정도로 학덕이 높았다. 이러한 가풍은 그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천부적인 재능과 가문의 학풍이 더해 당시 최고 엘리트계급이었던 퇴계 문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제자가 된다. 더구나 해월은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중앙 관직으로 출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 |||||||||||||||||||||||||||||||||||||
역사의 현장에서 소임을 다하다 | |||||||||||||||||||||||||||||||||||||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된다. 관직으로 떠나면서 “만 리 푸른 바다 흰 갈매기가 우연히 인간의 세계로 잘못 떨어지네(滄波萬里鷗身, 偶落人間滿目塵)”라고 하였다. 그 뒤 경상도어사(慶尙道御使), 1592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맡았다. 임진왜란이 나자 지략을 발휘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종사관이 된다. 1593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을 맡는다. 이해 스승인 학봉의 죽음을 듣게 되어 비통해한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596년에는 이순신 장군과 국사에 대해 논한다. 1598년 명나라와 국교가 위태롭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정사(正使)로,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에 공을 세우고 ‘만국공여지도(萬國供與地圖)’를 가져온다. 귀국 후 장학원정(掌學院正)이 된다. 1601년 예천군수를 거쳐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창원부사(昌原府使), 1615년에 동래부사 임기를 끝으로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 |||||||||||||||||||||||||||||||||||||
수시처중(隋時處中)하고 광풍제월(光風霽月)한 삶 | |||||||||||||||||||||||||||||||||||||
해월은 호를 하담(霞潭)이라 부르다가 해월(海月)로 하였고 만년에는 다시 만귀(晩歸)라 하면서, 좋은 경관을 찾아 여생을 보낸다. 평민의 의관으로 촌로들과 어울려 농담도 하고 술도 마시며 격의 없이 향인들과 지낸다. 순리를 따라 벼슬할 수 있을 때 나가고 불가하면 물러났다.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져 그 화를 피하기 어려웠는데, 그 기미를 예견하고 물러났다. “마음은 얼음처럼 차고 투명하여 구름을 헤치고 만리창공을 보는 것 같았다”고『해월집』에 나온다. 1622년(광해 14)에 졸하였다. 1758년 고을 사람들이 기성면 정명리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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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 |||||||||||||
고려 충렬왕 때 첨의평리문하시중을 역임한 황서(黃瑞)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황세충(黃世忠)이고 할아버지는 성주목사 황우(黃瑀)이다.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황응징(黃應澄)과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 정창국(鄭昌國)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임진왜란의 영웅 정담(鄭湛)장군의 누이와 결혼한다. 권율장군이 “해전(海戰)에서는 이순신이요, 육전(陸戰)에서는 정담”이라 말했을 정도다. 정담은 해월의 외삼촌이다. 어려서 양친이 돌아가자 해월의 부친이 거두어 키웠다. 해월의 집에서 공부한 그는 무과에 급제하고 김제군수로 임란을 맞아 웅치전투를 벌이다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다.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은 해월(海月)의 중부(仲父)로 해월의 어릴 때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를 받는다. 더구나 그는 퇴계문인인 월천 조목과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으며 오랜 기간 교유한다. 울진 황보에 귀양 와 있던 아계 이산해와도 교류하여 아계로부터 학덕이 깊은 선비로 존경받는다. 해월은 이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대성할 수 있었다. 해월의 부인은 의성김씨로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딸이다. 김수일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중형(仲兄)이 된다. 퇴계문인의 거봉인 학봉가의 사위다. 이는 학문적으로나 중앙정계의 진출에서나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인이 두 명 더 있는데, 한양최씨, 완산이씨(完山李氏)다. 해월은 슬하에 모두 8남 2녀를 두었다. 맏이가 중윤(中允)으로 승지 벼슬을 한다. 그는 해월의 아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다. 중직(中直), 중민(中敏), 중헌(中憲), 중순(中順), 중경(中慶), 중원(中遠), 중헌(中憲)이다. 맏이 중윤은 중헌의 아들 석래(石來)를 입양하였다. 석래는 원남면 몽천의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의 딸을 부인으로 맞는다. 양친을 뜻으로 봉양하면서 성(誠)과 경(敬)을 다하여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 하였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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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난재(懶齋) 신열도(申悅道), 권율(權慄),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양사언(楊士彦), 김주은 | |||||||||||||
학문이야기 | |||||||||||||
5세부터 부친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은 울진 기성의 정명리에 살았다. 그에게 배울 때 사동에서 10리가 넘는 길을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후 그는 대해와 함께 기성면 정명리에 있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배향된다. 14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다 읽고 즉흥시를 읊을 수 있었다고 한다. 17세에 평해 수진사(修眞寺)에 들어가 공부할 때 3년을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스무 살에 『시전(詩傳)』과 『서전(書傳)』을 연구하였다. 이 일로 영재임을 알아본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 사위를 삼는다. 28세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찾아 근사록(近思錄)의 강의를 듣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학봉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임란의 격변기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학봉은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이었으며,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류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남인을 이루었다.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다. 그의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로 이어지는 퇴계의 최대 학맥을 이룬다. 해월은 조금 늦게 태어나 퇴계의 문하에 가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이라 하였다. 일찍이 가학으로 학문에 입문하였으며, 나중에는 사우(師友)를 쫓아 수신제가치국까지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 심학도(心學圖)와 동서명(東西銘)을 좌우에 붙여놓고 항상 성찰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
저작이야기
저작이야기 |
학문의 가풍이 대단한 집안에 태어난데다,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 14세에 간성에서 진사시험이 있어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한다. 간성으로 가는 길에 삼척 죽서루에 올라서 지은 시다. “어젯밤 은하수별 하나 울진 땅에 내려와서 술에 취해 삼척 땅에 찾아보니 흥그러운 마음은 한량없어서 죽서루에 올라와 두루 살피니 사람은 보이지 않구나 외로이 돌아서서 피리 불면서 능파대로 향하여 걸음 옮겼네” 그러나 저술한 글들이 모두 불에 타고 남은 것이 시(詩)가 몇 권이고 부(賦), 서(書), 소(疎), 서(序), 발(跋), 찬(贊), 전(箋) 등이 두 권이며, 행장(行狀), 묘지(墓誌), 은차일기(銀槎日記) 세 권 등이 발간되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조천록(朝天錄)』,『해월집(海月集)』등 14권 7책이 있다. “문장은 혼후방일(渾厚放逸)하여 세상의 얕은 재치와 비교할 수 없었다. 황정견의 글씨에 방옹의 시로다.” 고『해월집』에 나온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같은 것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어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꺼리는 것인데, 해월은 능히 발문을 지었다. 황여일(黃汝一)의 『해월문집(海月文集)』에 「원생몽유록」에 나오는 해월거사의 시와 논평이 ‘제임백호원생몽유록(題林白湖元生夢遊錄)’, ‘서임백호원생몽유록후(書林白湖元生夢遊錄後)’라는 제목으로 각기 실려 있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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