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파평윤씨 매화리 윤광수가옥 이야기

회기로 2011. 3. 3. 20:18

 

 

 

 

 

 

 

명 칭 :  매화리 윤광수 가옥(梅花里 尹光洙 家屋)
소 재 지 :  경북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642
문 화 재 :  문화재자료 제494호, 2005.09.20 지정

건축 이야기
윤광수 가옥은 원남면 매화2리 ‘최촌’에 있는 고가이며, 2004년 9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동해안 북부지역의 반가의 전형적인 ‘ㅁ’자형 ‘뜰집’이다. 파평윤씨 야성군파의 괴은공(槐隱公) 상일(相馹)이 처음 건립했다고 전하며, 1750년경으로 추정된다.
경북 북부지역의 ‘ㅁ’자형 뜰집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우선 뜰집은 가옥 내의 모든 공간 동선이 중앙에 마련한 ‘뜰’을 통하여 연결된다는 점이다. 뜰집에서는 뜰과 안마루를 구획하는 장치가 없다. 또 뜰에는 지붕을 설치하지 않으므로 바깥공기에 직접 노출되어 안마루와 뜰은 겨울철에는 매운 추운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바깥공기와 직접 소통하여 매우 시원한 공간으로 변한다.

건축 특징
뜰집의 안채는 중앙의 안마루를 중심으로 여성의 생활공간인 안방과 남성, 특히 가장의 생활공간인 사랑방을 배치하므로 최소한 2칸 이상의 안마루를 격리공간으로 둘 수 있으며, 사랑방 앞으로 넓은 마루공간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접객이나 제사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 구성
윤광수 가옥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바라지문을 단 중문칸을 들어서면 바로 봉당이며, 봉당의 우측에 정지를 두었다. 정지에 작은 규모의 바라지문을 달아 외부와 연결하였다. 봉당의 좌측에는 행랑방을 두고 여기에 바로 이어서 마구간을 내었다. 봉당의 정면에 뜰을 두었으며, 뜰을 중심으로 우측 아래에 안방을, 그 위에 도장을 두었다. 뜰의 정면에는 ‘역ㄱ’자형으로 안마루를 깔았으며 안마루의 왼편에 사랑방을 두었다. 사랑방의 전면과 우측에 반 칸 규모의 쪽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렀으며 지붕을 겹처마로 꾸며 사랑채로서의 격식을 갖추었다. 이는 뜰을 통하지 않고서도 외부에서 사랑방으로 직접 통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도시조는 고려조에 삼한벽상공신인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이다. 고려조에 거란족을 물리친 윤관이 중시조이며 울진지역의 파평윤씨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이며, 양성군으로 봉군된 윤혁(尹赫)의 후손이다. 윤혁은 야성군파의 파시조로서 현재의 영덕지방인 야성군을 식읍으로 받아 영덕군 달산면 일대에 세거했다. 이후 윤원생(尹原生) 이 울진의 매화리로 입향했다. 윤원생은 야성군파의 파시조인 윤혁의 고손자이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세거지인 달산면을 떠나 울진군 기성면 삼산리 산곡(山谷)마을에 정착하였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묘소는 삼산리 마산곡에 있다. ‘윤광수 고가’를 건립한 인물로 알려진 괴은공(槐隱公) 윤상일(尹相馹)은 원생의 적손인 이우곡파(移于谷派)의 파시조인 후(垕)의 7세손이다. 윤후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기성면 삼산리에서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로 이거 했다. 부인은 영양남씨 유발(有發)이며, 묘소는 원남면 금매리 금답동에 있다. 후의 5세손인 의복(義復)은 괴은공 상일의 조부이다. 상일의 부친은 행우(行友)이며 1829년(순조 29)에 출생하여 1911년에 사망했다. 상일의 모친은 울진장씨 용익(龍翼)의 따님이다.
괴은공 상일은 1849년(헌종 15)에 매화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교수를 역임했으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서 사사했다. 김흥락(1827~1899)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적장손(嫡長孫)이며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발췌한『제훈집설요람(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 괴은공은 1907년(융희 1)에 사망했으며 묘소는 원남면 매화리에 있다.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이 묘표를 썼으며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행장을 썼다. 묘갈명은 생원 이강호(李康鎬)가 썼으며 유집(遺集)의 서문과 발문은 동강 김녕한과 홍재만이 썼다. 부인은 순흥안씨 국헌(國憲)의 따님이다. 그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병호(炳嘷)이며, 향산 이만도의 문인이다. 1865년(고종 2)에 태어나 1944년에 사망했다. 문집 3책이 전하며 묘소는 근남면 구산리에 있고 동강 김녕한이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영양남씨 윤석(胤錫)의 따님이다. 차남은 병희(炳熙)이다.
관련인물
- 윤후(尹垕, 1688~1770)
파평윤씨 이우곡파의 파시조이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기성면 삼산리에서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로 이거 했다. 부인은 영양남씨 유발(有發)이며 묘소는 원남면 금매리 금답동에 있다.
- 괴은공 윤상일(1849~1907)
파평윤씨 이우곡파의 파시조인 윤후의 7세손이며 집안을 번창시킨 학자이다. 교수를 역임했으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서 사사했다. 김흥락(1827~1899)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적장손(嫡長孫)이며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발췌한『제훈집설요람(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 괴은공은 1907년(융희 1)에 사망했으며 묘소는 원남면 매화리에 있다.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이 묘표를 썼으며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행장을 썼다. 묘갈명은 생원 이강호(李康鎬)가 썼으며, 유집(遺集)의 서문과 발문은 동강 김녕한과 홍재만이 썼다. 부인은 순흥안씨 국헌(國憲)의 따님이다.
울진 > 원남기성권 > 원남면 매화2리
- 매화2리
매화 2리는 울진읍에서 7번 국도를 따라가다 연호 교차로에서 포항․평해 방향으로 약 9㎞를 내려가면 해군기지가 있는데 그곳이 마을의 입구이다. 매화 2리는 동쪽으로는 ‘몽천들’과 매화천을 앞에 두고 매화1리와 마주하며, 서쪽은 남수산이 우뚝 솟아 마을을 감싸고 있다. 남쪽으로는 갈면에서 흘러오는 기양천을 경계로 기양1리와 접하고, 북쪽은 금매 2리인 몽천동과 접해 있다.
매화2리는 ‘구장터’, ‘까치마’, ‘최촌’, ‘윤촌’의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최촌’은 강릉최씨가 북면 무릉현에 정착하여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세거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윤촌은 파평윤씨(坡平尹氏)가 기성면 삼산리에 입향하여 살다가 1558년경에 이 마을에 들어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장터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오일장이 열렸으나 면 소재지가 매화 1리로 옮겨지면서 구장터라 불렀다. 까치마는 가지산 밑에서 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까치마라고 불렀다.
마을 이름이 매화라고 지어진 데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이 마을의 형상이 남수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마치 매화꽃잎과 같고 부근의 산봉우리가 매화꽃과 같다는데서 비롯되었다. 둘째는 조선조 광해군 때 강원관찰사 기자헌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주위의 들에 해당화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읊었다는 유래로 매야라고 하다가 후에 매화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셋째는 조선 선조 때 윤여호의 부인 영양남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조상이 살던 영덕군 매일동의 매자를 따서 매화라 불렀다 한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강릉최씨와 파평윤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고 하나, 주민 대부분은 최씨가 먼저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 윤씨가 제일 많이 살고 있으며 그다음으로 강릉최씨, 담양전씨, 영양남씨, 신안주씨, 평산신씨 순이다. 현재 마을의 가구 수는 해군부대가 들어오면서 부쩍 늘었으며, 원주민 74호와 해군부대 19호를 합하여 93호이다. 매화1리의 생업은 농업이다. 주요 재배 작물은 벼이며 원주민의 가구 수인 74호 중의 50호가 우렁쉥이를 이용한 유기농업을 경작한다. 15년 전에는 매실농장이 대거 들어섰다.
역사 문화적 경관으로는 남수산(嵐峀山), 만흥학교지(晩興學校址), 울진공립농민학교지(蔚珍公立農民學校址), 울진공립여자실천학교지(蔚珍公立女子實踐學校址) 등이 있으며, 울진지방의 유력 성씨 세거지답게 다수의 고가가 자리 잡고 있다. 남수산은 매화리 주민은 물론 울진 주민 다수가 명산으로 여기는 산이며, 산록에 조선 중기의 뛰어난 유학자인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가 말년에 기거하면서 강학한 우거지(寓居址)가 있으며 관아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제지가 있다.
만흥학교는 1907년 10월에 원남면 매화리에 독립운동가인 백운(白雲) 주진수(朱鎭洙) 선생이 설립했으며, 1910년 국권침탈이 되면서 일본관헌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울진공립농민학교(蔚珍公立農民學校, 매화농민학교)는 2년제였으며, 1940년에 매화2리(지금의 해군부대 자리)에 설립했다. 1943년 울진여자농업학교로 개편되었다. 여자농업실천학교는 농촌 중견 부인 양성을 목적으로 매화리에 설립했으며, 수업 연한은 2년이었다.
경북 북부지역 농촌의 민가 건축양식을 가늠할 수 있는 고가로는 윤촌마을의 최부열 가옥, 전병윤 가옥, 최연국 가옥, 최진탁 가옥, 전용순 가옥과 최촌마을의 이천니 가옥, 최연우 가옥, 주진천 가옥 등이 있으며, 까치마을에 남계삭 가옥, 신태의 가옥과 구장터에 전남규 가옥이 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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