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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사계당은 사계당(沙溪堂) 이영발이 그의 자택 옆에 지은 서재로 사용하던 정자이다. |
건축 특징 |
10여 년 전에 지붕을 강재로 만든 양기와로 개축했으며 지붕의 서까래 일부를 교체했다. 사계당의 주손인 이태호(76, 기성면 삼산리)씨는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얼이 깃든 문화재라는 시각에서 문중이 기금을 모아 개축했다.”라고 말했다. 또 이태호씨는 몇 해 전에 문중에서 “사계당에 ‘송곡헌(松谷軒)’의 현판을 달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자신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무산시켰다.”라고 전한다. 이 씨는 ‘송곡 어른은 사계당의 고조부인데 고손자가 지은 건물에 고조부의 현판을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건축 구성 |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동남향이며 팔작지붕을 이었다. 5개의 자연석 주춧돌 위에 사각형의 평주 3개와 귓기둥 2개를 세워 지붕을 받쳤다. 평면구조는 중앙에 2칸 규모의 널마루를 깔고 좌우 양측에 1칸 규모의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 헌함을 둘렀으며 좌우 양쪽은 황토벽으로 마감했다. 마루의 좌측 상단에 시렁을 설치하여 서적을 보관한 듯하다. 마루의 뒷벽은 널판으로 마감했으며 건물의 뒤에서 마루로 출입할 수 있도록 홑여닫이문 1개와 광창 1개를 설치했다. 마루의 왼편 온돌방의 뒷벽에 찬장을 두었다. |
문중 이야기 |
- 문중이야기 |
사계 이영발은 전의이씨 양간공파의 후손이다. 전의이씨의 시조 도(棹)는 고려 태조의 삼국 통일을 도와 이등공신에 녹훈되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使)에 오르고 전산후(全山侯)를 받은 충신이다. 그의 11세손인 정간(貞幹)은 조선 세종조에 뛰어난 효자로서 자헌대부중추원사(資憲大夫中樞院使)를 지냈고, 송천서원(松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양간공파(襄間公派)의 파시조인 서장(恕長, 1423~1484)은 효정공 정간의 손자이다. 1457년(세종 3)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 사헌부감찰에 올랐으며, 1466년에 있었던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대호군에 특별 임명됐다. 함경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대사헌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의 5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이다. 전의이씨 양간공파는 효정공과 양간공을 문중의 자랑이자 사표로 여긴다. 특히 효정공이 병든 어머니를 보살필 때 임금이 직접 문안을 와서 하사한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은 전의이씨 모든 가문에서 가훈으로 전승하고 있다. 전의이씨 가문은 효정공 이탁간(孝靖公 李卓幹)의 둘째 아들 이사관(李士寬) 대에 와서 조선조의 명문 반열에 뛰어오르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사관(李士寬)은 고려 우왕 때 태어나서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을 추증 받는다. 그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2남인 이지장(李智長)의 아들 이덕량(李德良)이 세조·예종·성종 대에 걸쳐 무관으로 급제하여 하동현감을 지냈다. 황보인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이루지 못하고 여주에 은거한다. 3남인 예장(禮長)은 143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수관의 5남인 성장(誠長)의 아들인 수남(壽南)은 17세에 진사시, 20세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전의이씨 문중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대제학 이덕수(大提學 李德壽)도 이탁간의 현손이며, 당대의 뛰어난 명필가인 이제신(李濟臣)은 이탁간의 6세손이다. 문의공(文義公)파에서는 그의 증손인 귀(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탁(李鐸)과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이 대표적이다. 송곡(松谷) 이명유(李命裕)는 양간공 서장의 손자이며, 전의이씨 평해입향조이다. 1519년 홍천 군수로 재직 중에 기묘사화가 발발하자 이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평해 사동의 처가로 정착하여 세거했다. 그의 부인은 안동권씨 조(組)의 따님이다. 그의 처가는 현 해월헌의 본채이며 당시 ‘사동골댁집’이라 불렀다. 사계당 이영발은 입향조인 이명유의 고손자이다. 이영발의 부친은 겸익(謙益)이며, 모친은 신안주씨 경안(景顔)의 따님이다. 모친의 친정아버지 주경안은 이름난 효자로서 1596년(선조 29) 강원 감사 정구가 효행을 추천하여 정려(旌閭)를 받고, 울진의 향현사(鄕賢祠)에 남사고(南師古)와 함께 배향되었다. 또 불천사(不遷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사계당 이영발은 1603년에 나서 1662년에 사망했으며, 첫째 부인은 무안박씨 응성(應星)의 따님이며, 둘째 부인은 울진장씨 효원(孝元)의 따님이다. 묘소는 ‘골마’에 있으며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덕윤이며 부인은 담양전씨 선(銑)의 따님이다. 그의 장인인 전선은 호가 만은(晩隱)이며 우와 전구원, 만휴 임유후와 더불어 울진 유학을 중흥시킨 유학자이다. |
관련인물 | |
- 이명유(李命裕) | |
전의이씨 평해입향조이다. 1467년(세조 13)에 태어나 1534년(중종 29)에 사망했다. 홍천 군수로 재직 중에 기묘사화가 발발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평해 사동으로 들어왔다. 그의 나이 68세 때이며 1519년(중종 14)이다. 그의 장인은 안동권씨 군수 조(組)이다. 이명유는 선산 부사를 지낸 윤수(允粹)의 아들이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개성유수를 지낸 이서장의 손자이다. 17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청백리로 이름났다. 묘소는 기성면 삼산리 마산동 재궁곡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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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발(李英發) | |
전의이씨 사계당파의 파시조이다. 평해입향조인 이명유의 고손자이다. 부친은 겸익이며, 어머니는 신안주씨 경안의 따님이다. 그의 외조부인 주경안은 나라에서 인정한 효자이자 충신이다. 조정에서 정려각을 세웠으며 그의 후학과 후손들이 격암 남사고와 함께 향현사에 배향했으며, 불천사(不遷祠)와 충효당을 지어 그의 효행을 기렸다. 사계당은 문행이 뛰어났으며, 특히 시와 부에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다. 그의 이 같은 재능을 생원 남대만(南大萬)은 그의 묘갈명에서 “일찍이 영서의 향외에 가서 일거에 장원을 하였는데 곧바로 후회하면서, ‘관동이 험하기를 촉도의 구절양장보다 심하거늘 어떻게 부모의 유체를 조심하라는 옛사람들의 경고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하면서 다시는 과거의 뜻을 버리고 사동에 집을 짓고 사계정사라 현판했다.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후학을 교도하였다.”라고 그의 강직함을 높이 샀다. 사계당에서 강학한 후학과 향인들이 그를 기리는 사우를 짓고자 하였으나 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묘소는 삼산리 ‘샘골’에 있다. 그의 묘터와 관련 설화가 전해온다. “사계당 어른의 묘터의 우백호 측이 허(虛)하여 그의 아들 5형제가 이곳에 느티나무 5그루를 심어 허한 백호혈을 보강했다. 그 후 마을주민이 길쌈용 등받이를 만들기 위해 느티나무의 껍질을 많이 벗겨내 4그루는 고사했다.” 〔제보자: 이태호(76, 기성면 삼산리, 사계당파의 주손)〕 명당의 허 한 곳을 채워주는 비보(碑補)설화이다. 느티나무의 규모는 높이 30m, 가슴높이 5.7m가량이며, 수령은 370년으로 추정된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됐으며 마을의 성황당이다. 사계당의 주손 이태호씨의 증조부 대에 사동리에서 삼산리 골말로 이사했는데, 골말의 5가구가 매년 정월 보름에 성황고사를 지낸다. |
울진 > 원남기성권 > 기성면 사동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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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동리 | |
사계당이 있는 ‘웃사동’은 ‘해월헌(海月軒)’의 명당으로 이름난 마을이다. 동쪽은 ‘사동거랑’을 끼고 동해와 접하고, 서쪽은 7번 국도 너머의 마악산(馬岳山)을 경계로 삼산리와 접한다. 남쪽은 ‘도지고개’를 경계로 척산리와 기성리와 접하며, 북쪽은 ‘흙리고개’와 ‘진불’을 경계로 망양리와 접한다. 사동리는 상사동(上沙銅), 하사동(下沙銅), 주담(周潭)의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상사동은 ‘골댁터’, ‘장밭골’, ‘돌담마을’로 구분되며, 하사동은 사동거랑을 경계로 남쪽 마을을 ‘염전마’, 북쪽 마을을 ‘장장골’이라 부른다. 조선조에는 평해군 원북면에 속했으며 1916년 3월 1일에 상사동·하사동과 기성리의 일부 지역의 통합하여 사동리로 개칭하고, 기성면에 편입하였다. 상사동과 주담마을의 주민은 대부분 농사에 종사하며 하사동은 주로 반농반어로 생계를 꾸린다. 상사동과 주담마을에서는 벼, 고추, 양파, 마늘을 주로 생산하며, 하사동은 사동항을 중심으로 멸치, 오징어, 양미리, 문어, 자연산 미역을 생산한다. 마을의 주요 문화적 경관으로는 해월헌, 사계당, 서당터 등이 있다. - 해월헌과 사동골댁 해월헌은 조선조 광해군 때 길주목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을 추증 받은 해월 황여일(1556~1622)이 1588년(선조 21)에 건립한 대청이다. 처음 사동리 마악산 기슭에 건립했으나 후손들이 1847년(헌종 13)에 ‘사동골댁’으로 부르는 종택 안으로 이건 했다. 해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이은 기와집이다. 경사진 대지에 터를 잡아 전면의 기둥 하부에 다시 아랫기둥을 세웠으며, 전면의 툇간은 누마루를 깔았다. 2칸 규모의 어칸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을 꾸몄다.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고 헌함을 둘렀다. 사동골댁으로 부른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ㅁ’자형 와가(瓦家)이며, 앞면의 좌·우로 1칸씩 돌출시킨 양날개집이다. 평면은 2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마루 방으로 구성했다. 중문칸의 오른쪽에 사랑채를 두었는데 팔작기와지붕을 이어, 마치 독립된 건물처럼 보인다. 정침의 대문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텃밭으로 나가는 두 짝의 바라지문을 달았으며, 오른편에 사당으로 출입하는 협문을 달았다. 정침 안의 뜰에 우물을 두었으나 현대식 상수도로 개조했다. 해월헌의 정침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해월헌 정침을 주민은 ‘사동골댁집’이라 부르는데 이는 택호가 ‘골댁’에서 비롯되었다. 약 400여 년 전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낸 권조(權組)라는 사람이 평해(平海)에 입향하여 이 집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후 중종(中宗) 때 그 사위가 되는 이명유(李命裕)라는 사람이 홍천군수(洪川郡守)로 있다가 중종사화(中宗士禍)에 몰리어 벼슬을 잃고 돌아오니 권씨(權氏)말이 “이 집터를 사위에게 물려줘서야 영원히 이름난 터(基)로서 가치가 유지된다며 자네에게 물려주네.”하면서 이명유에게 물려주었다. 이명유는 그 뒤 사위인 정담(鄭湛) 군수의 부친인 정창국(鄭昌國)에게 물려주니 정창국은 판결사 황응징(黃應澄: 해월선생의 부친)에게 물려주었으나 황 판결사는 딸이 없어 사위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대대로 황씨(黃氏) 종손이 살아왔다. 〔제보자: 이태호(76, 기성면 삼산리, 사계당파의 주손)〕 해월헌 정침이 자리한 터는 ‘봉황포란형’으로 부르는 명당으로 이름이 나 있다. - 서당터 사동서당(沙洞書堂)의 옛터이다. 사계당 이명유, 애월당(愛月堂) 남유주(南有周),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의 학행을 기리기 위해 그 후학과 후손들이 사우를 건립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자 서당으로 건립했다. 일제강점기에 대흥학교 교사로 사용했다. 20여 년 전에 서당을 철거할 때 대들보에서 서당의 내력을 기록한 ‘서당기’와 현판이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현재 확인할 수 없으며, 또 상량문에서 사계당 이영발의 후손인 이녹연이 사동서당의 중건을 위해 노력한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그의 「사동기(沙洞記)」에서 사동 마을의 형세가 뛰어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곳의 산세가 굼틀굼틀 기복약추하는 것이 마치 난과 봉의 나래 짓처럼 안고 쌓고 하면서 한 마을을 이루어 두었기에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산천이 용이 춤추듯 굼틀굼틀 기복하고 호위하는 산들이 잘 어우러져 조직적으로 힘을 모아두게 되면 반드시 명승지가 되거나 인물이 나게 마련인데 고적이나 명승지가 되자면 자연스럽게 혼자 이루어 질 수 없고 반드시 특별한 인물이 그곳에서 태어나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
사계 이영발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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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에서 태어나 영동과 영서의 시회를 휩쓸다 | |||||||||||||
사계당 이영발은 1603년(선조 36)에 사동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사계당의 가계는 조선조 중기 이후 대를 이어 당상관 벼슬을 하는 명문가였다. 특히 그의 9대조인 효정공 이탁간(孝靖公 李卓幹)의 둘째 아들 이사관(李士寬) 대에 와서 전의이씨 가문은 조선조의 명문반열에 뛰어오르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사관(李士寬)은 고려 우왕 때 태어나서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을 추증 받는다. 그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2남인 이지장(李智長)의 아들 이덕량(李德良)이 세조·예종·성종 대에 걸쳐 무관으로 급제하여 하동현감을 지냈다. 황보인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이루지 못하고 여주에 은거한다. 3남인 예장(禮長)은 143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수관의 5남인 성장(誠長)의 아들인 수남(壽南)은 17세에 진사시, 20세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전의이씨 문중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대제학 이덕수(大提學 李德壽)도 이탁간의 현 손이며, 당대의 뛰어난 명필가인 이제신(李濟臣)은 이탁간의 6세손이다. 문의공(文義公)파에서는 그의 증손인 귀(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탁(李鐸)과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이 대표적이다. 명문가의 긍지를 갖고 태어난 이영발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영동과 영서의 시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는 등 글재주를 발휘하였다. | |||||||||||||
‘충효전가’의 가훈을 실천하다 | |||||||||||||
그러나 그는 과거급제에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묘갈명을 쓴 생원 남대만은 그의 이런 성격을 “일찍이 영서의 향내에 가서 일거에 장원을 하였는데, 곧바로 후회하기를 ‘관동이 험하기를 촉도의 구절양장보다 심하거늘 어떻게 부모의 유체를 조심하라는 옛사람들의 경고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하면서 다시는 과거의 뜻을 버리고 사동에 집을 짓고 사계정사라 현판했다.”고 기술했다. 이영발의 품성은 외가와 본가를 모두 닮아 학문의 성취에 앞서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은 ‘충효(忠孝)의 실천’이었다. 이영발의 이 같은 품성은 효정공 정간이 효행으로 세종대왕의 친필을 받은 이래, 전 가문의 가훈으로 내려온 ‘충효전가’의 전통과 그의 외조부로부터 전가된 어머니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묘갈명을 쓴 남대년은 이영발의 자세를 “평생의 목표는 충효 두 자이다.”라고 평했다. 이영발은 해월 황여일의 아들인 동명 황중윤, 이우당 주개신, 애월당 남유주와 교유하며 사계당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특히 이영발은 사제(師弟)와 혼반관계를 바탕으로 평해 지방과 울진지방의 학문적 교류를 연결하는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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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 ||||||||||
사계당 이영발은 전의이씨 양간공파의 후손이다. 전의이씨의 시조 도(棹)는 고려 태조의 삼국 통일을 도와 이등공신에 녹훈되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使)에 오르고 전산후(全山侯)를 받은 충신이다. 그의 11세손인 정간(貞幹)은 조선 세종조에 뛰어난 효자로서 자헌대부중추원사(資憲大夫中樞院使)를 지냈다. 송천서원(松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양간공파(襄間公派)의 파시조인 서장(恕長, 1423~1484)은 효정공 정간의 손자이다. 1457년(세종 3)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 사헌부감찰에 올랐으며, 1466년에 있었던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대호군에 특별 임명됐다. 함경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대사헌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의 5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이다. 전의이씨 양간공파는 효정공과 양간공을 문중의 자랑이자 사표로 여긴다. 특히 효정공이 병든 어머니를 보살필 때 임금이 직접 문안을 와서 하사한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은 전의이씨 모든 가문에서 가훈으로 전승하고 있다. 송곡(松谷) 이명유(李命裕)는 양간공 서장의 손자이며, 전의이씨 평해입향조이다. 1519년, 홍천군수로 재직 중에 기묘사화가 발발하자, 이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평해 사동의 처가로 정착하여 세거했다. 그의 부인은 안동권씨 조(組)의 따님이다. 그의 처가는 현 해월헌의 본채이며, 당시 ‘사동골댁집’이라 불렀다. 사계당 이영발은 입향조인 이명유의 고손자이다. 이영발의 부친은 겸익(謙益)이며, 모친은 신안주씨 경안(景顔)의 따님이다. 모친의 친정아버지 주경안은 이름난 효자로서 1596년(선조 29) 강원 감사 정구가 효행을 추천하여 정려(旌閭)를 받고, 울진의 향현사(鄕賢祠)에 남사고(南師古)와 함께 배향되었다. 또 불천사(不遷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사계당 이영발은 1603년에 나서 1662년에 사망했으며, 첫째 부인은 무안박씨 응성(應星)의 따님이며, 둘째 부인은 울진장씨 효원(孝元)의 따님이다. 묘소는 ‘골마’에 있으며,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덕윤이며, 부인은 담양전씨 선(銑)의 따님이다. 그의 장인인 전선은 호가 만은(晩隱)이며, 우와 전구원, 만휴 임유후와 더불어 울진 유학을 중흥시킨 유학자이다. 차남은 문윤(文胤)이며, 호는 낙빈당(樂貧堂)이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 부인은 평해황씨 중헌(中憲)의 따님이다. 삼남은 세윤(世胤)이며, 부인은 담양전씨 극정(克正)의 따님이다. 4남은 의윤(義胤)이며, 부인은 영양남씨 유주(有周)의 따님이다. 사돈인 남유주는 이영발과 함께 강론과 문학을 논했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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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 만은(晩隱) 전선(田銑), 명은(明隱) 남유주(南有柱), 매헌(梅軒) 장온(張蘊),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 주경안(朱景顔) | |||||||
학문이야기 | |||||||
사계 이영발 학문의 특징은 ‘충효’를 실천하기 위한 생활학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울진·평해지방은 뚜렷한 학문적 흐름이 정착한 시기가 아니라, 몇몇 뛰어난 문사를 중심으로 학문의 체계화가 갓 시작되는 시기였다. 울진지방은 만휴 임유후, 우와 전구원, 서파 오도일, 만은 전선, 우암 윤시형, 남유주 등을 중심으로 율곡과 우암의 영향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평해는 해월 황여일의 영향으로 퇴계의 학풍이 강했다. 그러나 이영발은 사계당을 중심으로 울진과 평해 지방의 문사들과 두루 교유하면서 두 지역의 학문교류를 연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한 듯하다. 당시 이영발이 교유했던 문사들은 우암 윤시형, 만은 전선, 남유주, 장온, 이우당 주개신, 지평 주경안 등이다. |
저작이야기 |
그의 문집은 1844년경에 그의 9세손인 수권(壽權)이 엮어 세상에 선을 보였다. 그의 문집은 시와 부(賦), 제문과 부록으로 편집하였다. 110편의 시와, 1편의 부, 1편의 제문을 싣고, 부록으로 묘갈명과 만사 등을 실었다. 그의 묘갈명은 후학인 생원 남대만(南大萬)이 썼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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