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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장보균 가옥은 기록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는 안채와 사랑채인 월호당(月湖堂)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안채인 정침이 수차례의 개축을 거쳐 그 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가옥은 무월마을의 동편 산록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정침과 그 옆에 사랑채가 역시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기록과 전언에 따르면 정침은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다. |
건축 구성 |
현재의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목조와가이다. 1940년경에 내부 일부를 고쳐 건립 당시의 모습은 많이 변질하였다. 정침의 정면 중앙에 달은 미서기문인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뜰)이 있고, 그 뒤쪽 중앙에 2칸 규모의 대청을 놓았다.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현대식 입식부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의 ‘도장방’을 고친 것으로 보인다. 그 앞으로 정지와 온돌방을 배열하였다. 부엌의 우측에 2통간 규모의 안방을 내어 정지와 이어지도록 했다. 대청의 왼편에 2통간 규모의 사랑방과 사랑마루, 뒤주(수장 공간)를 배열하였다. 현재 사랑마루와 뒤주로 사용하는 공간은 건립 당시에는 각각 사랑방으로 출입하는 문(問)으로 추정되며, 뒤주는 마구간으로 짐작된다. 이로 미루어 건립 당시의 정지와 봉당은 방으로, 방은 입식 부엌으로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정침의 정면 좌측에 ‘선사고택(仙傞古宅)’, ‘노향재(老香齋)’, ‘고성산려(古城山廬)’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80여 년 전에 소유주인 장보균의 부친인 필도(必道, 1878~1949)가 걸었다. 정침은 현 소유주인 장보균의 7대조인 만년(萬年, 1704~1774)이 처음 건립했다고 전하나, 2000년도 당시 집수리 중에 발견된 명문 수기와편에서 ‘순치 14년 정유 오월(順治十四年丁酉五月)’의 기록으로 보아 1657년(효종 8) 5월, 또는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 울진장씨 직장공파가 정착하기 전에 이미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만년은 가선동추부사(嘉善同樞府事)를 지냈다. 사랑채인 월호당은 장보균의 증조부인 지연(止淵, 1824~1891)이 1867년에 서재로 건립하였다. 실재 월호당의 대들보에 ‘용숭정기원후필정유팔월이십이일을유시견주상량구(龍崇禎紀元後匹丁酉八月二十二日乙酉時堅柱上梁龜)’라는 상량문과 그의 6세손인 일우(一愚) 주신(柱臣)이 쓴 「일우정기(一愚亭記)」의 기록으로 보아 사실로 확인된다. 월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2000년경에 고쳤으며 2통간의 온돌방과 4통간의 마루로 구성하였으며, 마루방 뒷벽에 4대조를 모신 감실(龕室)을 두었다. 건물의 정면 상단에 ‘월호당(月湖堂)’의 현판을 걸었다. 월호당 지연은 용양위대호군(龍驤衛大護軍)을 지냈다. |
문중 이야기 |
- 문중이야기 |
울진장씨는 울진의 토성(土性) 중의 하나이며, 울진군 내에서는 그 수효나 역사 면에서 대 성씨에 속한다. 고려 초에 안동장씨에서 분파했으며 고려 건국을 도운 장정필(張貞弼)이 도시조이다. 그의 5세손인 말익(末益)이 울진부원군을 받으면서 울진에 세거했으며 울진장씨 관시조이다. 말익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용궁파·연안파·청송파·직장공파·낭장공파·삼척 강릉파·관북 부녕파 등 여러 지파를 구성한다. 울진장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천일(天鎰)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추밀직하사(樞密直學士)를 지냈으며, 천일의 아들 원흡(元洽)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에 올랐다. 말익의 8세손 양수(良手)는 희종(熙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울진지방은 직장공파와 낭장공파가 대세를 이룬다. 국보인 급제패지의 주인공인 양수(良守)의 증손인 인행(仁幸)이 직장공파의 파시조이다. 인행은 고려조에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냈다. 인행의 손자인 서학(瑞鶴)은 문과에 급제하고 동정을 지냈다. ‘장보균 가옥’을 처음 건립한 사람으로 알려진 만년(萬年)은 서학의 고손이다. 만년은 1704년(숙종 30)에 태어났으며 가선동추부사(嘉善同樞附事)를 지냈다. 부모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하는 등 효행으로 이름났다. 그의 아들 태상(泰祥)은 통정첨추절형장군(通政僉樞折衡將軍)을 지냈다. 그의 증손자인 월호(月湖) 지연(止淵)은 용양위대호군(龍驤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가산을 일으키고 월호정을 건립했다. 또 그의 아들 주신(柱臣)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으며, 가택의 남서쪽 무월천 절벽 위에 ‘일우정(一愚亭)’을 건립하고, 당대의 문사들과 경서를 강론하고 수창을 즐겼다. |
관련인물 | |
- 장만년(張萬年, 1704~1774) | |
울진장씨 직장공파의 종손이며, 관시조인 말익의 24세손이다. 1704년(숙종 30)에 태어나 1774년(영조 50)에 죽었다. 직장공파의 종손으로서 근검절약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원남면 기양리 일원에 임야를 사들이고 소나무를 조림하여 부모의 선영을 모셨다. 부인은 정부인인 정선전씨 무치(武致)의 따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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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연(張止淵, 1824~1891) | |
장만년의 고손이다. 호는 월호(月湖)이며, 용양위대호군을 지냈다. 문학에 뛰어났으며 월계서원 건립에 힘을 쏟았다. 정침의 좌측 편에 서재인 ‘월호당’을 건립하고 문사들과 강론하는 한편, 후학을 길렀다. 평생 술을 삼가고 책을 끼고 살았다 전한다. 문집이 전하며 부인은 정부인인 영양남씨 태환(泰煥)의 따님이다. 묘갈명은 호조참판을 지낸 면암 최익현이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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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주신(張柱臣, 1850~ 1929) | |
월호 장지연의 장자이다. 호는 일우(一愚)이며 중추원의관을 지냈다. 면암 최익현과 더불어 영남의 유생을 모아 위정척사소를 올렸다. 자택의 남서쪽 무월천의 절벽 위에 일우정을 건립하고 문사들과 강론하며 수창을 즐겼다. 장주신은 그가 쓴 「일우정기」에서 “선친인 월호부군께서 월호당을 세우고 집의 서편 도현(陶峴)에 정자를 지울 계획이었으나, 이루지 못해 자제들의 힘을 모아 정자를 짓고 당호를 일우라 하였다.”라고 건립배경을 밝혔다. 부인은 담양전씨 윤조(潤祖)의 따님이다. |
울진 > 울진근남서면권 > 울진읍 호월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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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월리 | |
호월리는 울진읍에 속하며 조선조에는 울진군 상군면(上郡面)에 속했고, 1916년 3월 1일에 있었던 행정개편으로 무월동·와현동·고원동과 용당동(용저동)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호월리로 개편했다. 마을은 ‘고지박산’을 배임하고 앞으로는 남대천의 상류인 호월천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이다. 마을 앞에 너른 ‘무월들(앞들이라고도 한다.)’이 펼쳐져 있어, 예부터 ‘살기 편안한’ 마을로 이름났다. 마을의 동쪽은 고산성(古山城)이 감싸고, 서쪽은 마을 뒷산을 경계하여 호월3리(湖月三里)와 접해 있다. 남쪽은 남대천(南大川) 건너에 가원동(佳原洞)이 있고, 우뚝 솟은 독산인 ‘범대미산’이 있다. 북쪽은 뒷산인 ‘고지박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고지박산이 만든 아흔아홉 골의 주수곡을 경계로 명도2리(明道二里)와 접한다. 마을은 ‘무월동(舞月洞)’, ‘왯고개(瓦峴)’, ‘주수골(住水谷)’의 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었다. 호월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자 ‘본동’으로 부르는 무월동은 1396년(공민왕 19)경에 울진장씨(蔚珍張氏)가 개척(開拓)하였다고 한다. 무월동의 지명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이 고산성(古山城)을 치려하자, 무월동 주민이 모두 들판으로 나와 춤을 추고 강강술래의 노래를 부르며, 아군의 세력이 많음을 보이고 왜군을 혼란에 빠트려 격파했다.’라는 데서 유래됐다. 또 ‘마을 앞들에 규모가 제법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비치는 달빛이 흡사 춤추는 듯하여 무월동이라 이름했다.’고 전한다. 울진장씨 직장공파의 종택인 호월당이 있다. 왯고개(瓦峴)마을은 무월동(舞月洞)의 서편으로 이어져 있으며, 과거에 옹기와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와고개’ 또는 ‘왯고개’라 부른다. 실재 이곳에서는 토기 조각과 자기편 등 유물산포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확인되는 토기 조각은 경질의 회백색 저부편이며, 요지의 구릉 정상부근에 유구가 확인된다. 주수골(住水谷)은 마을의 주산인 고지박산이 만든 ‘아흔아홉 골’을 일컬으며, 마을의 북쪽에 있다. 마을의 남서쪽 언덕에는 일우정이 있다. 그 앞은 남대천의 중류인 호월천이 굽이쳐 흐른다. 일우정은 무월동의 유력 가문인 울진장씨 직장공파 29세손인 장주신이 1901년(광무 5)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는 남대천이 휘감아 만든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원동을 이룬 빼어난 산세를 마주하여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며 팔작기와를 이었다. 정자의 중앙에 1칸 규모의 마루를 깔고 좌우에 1칸 규모의 온돌방을 놓았다. 방과 마루 앞으로 툇마루를 달았다. 언덕의 경사지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앞 열에는 둥근기둥을 뒷면에는 네모기둥을 세운 5량가의 와가이다. 무월동의 북쪽, 주수골에 영양남씨 재실이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재실은 남대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내의 언덕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2통간 규모의 온돌방을 놓았으며 앞에 누마루를 깔고 헌함을 둘렀다. 온돌방은 4짝의 미서기문을 달았으며 자연석 초석 위에 툇기둥만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5량가의 팔작와가이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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