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55] 권불십년이라 해도 좋다. 오직 왕실이 떳떳해 지는 그날을 위해..

회기로 2011. 3. 3. 21:10

권불십년이라 해도 좋다. 오직 왕실이 떳떳해 지는 그날을 위해..

조선 제 22대 고종태황제의 사친 흥선헌의대원왕과 순목대원비 민씨의 흥원

 

(1) 흥원도 원이다!


경기도기념물 제 48호는 흥선대원군묘이다.
하지만 이 명칭은 잘못된 명칭이다.
융희 2년(1908)에 흥원으로 추봉되었으므로
흥원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무슨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곳은 흥선대원군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볼 수 있다.

흥원(興園) 전경

 

(2) 권불십년, 하지만 지나친 권세... 가문을 위한 선택...


흥선헌의대원왕은 장조의황제(사도세자)의 양증손자로, 제 16대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과 여흥 민씨의 넷째아들로 순조 20년(1820)에 태어나, 흥선정, 흥선도정을 거쳐 흥선군에 제수되었다. 이 후 1862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헌종의 모후인 신정황후 조대비와 결탁하여 자신의 둘째아들 이명복을 익종의 후사로 정하여 왕으로 즉위시켰는데, 이가 고종황제이다.

흥선군은 고종 즉위 후 왕의 사친으로서 대원군이 되었으며, 고종 즉위 10년 동안 섭정을 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정치를 근절시켰으며, 붕당의 근원이었던 서원을 철폐하고, 비변사를 폐지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켰이며, 조세제도의 개혁과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의 기반을 닦았다. 또,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재건하기도 하였다. 한편, 밖으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외세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여,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경복궁 재건으로 백성들을 강탈하여 많은 원성을 샀으며,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다. 그 후 집권 10년만에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민씨정권과 대립하게 되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임오군란으로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4년간 청나라에 유폐되기도 하였으며, 사사건건 명성황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 후 광무 2년(1898)에 79세로 훙서하였으며, 광무 11년(1907)에 헌의대원왕으로 추존되었다.

합장으로 조성된 흥원

상석


순목대원비 민씨는 본관이 여흥인 민치구와 전주 이씨의 딸로 순조 18년(1818)에 태어나, 흥선군에게 출가하여 여흥현부인에 제수 되었다. 이후 차자 이명복이 고종으로 즉위하자 부대부인으로 승격되었으으며, 고종의 왕비 간택때 친척 민치록의 딸(명성황후)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대원군 사이에 2남(흥친왕, 고종황제) 2녀를 낳았다.

그 후 광무 1년(1897)에 80세로 훙서하였으며, 광무 11년(1907)에 순목대원비로 추존되었다.

 

(3) 두 번의 천장... 결국 아들내외 근처로..


처음 흥원은 고양군 공덕리에 모셔졌다가,
1906년에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되었다.
이후 1966년에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는데, 결국 흥선대원왕은 아들을 피해 있다가 근처로 오게 된 것이다.

또한 이 근처에는 정체불명의 납골묘가 있는데, 현재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곡장 뒤에서 본 흥원


흥선대원왕 신도비

문인석

 

(4) 권불십년이라 해도 좋다. 오직 왕실이 떳떳해 지는 그날을 위해..


나는 그날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
그 고개는 머지않아 니들이 숙일 것이다..
권불십년이라 해도 좋다. 오직 왕실이 떳떳해 지는 그날을 위해..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편부슬하면 어떠하리.. 내 집안을 위해.. 주상을 위해..
하지만 세도는 원치 않는다.. 그만.. 그만 하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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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의 묘지기행
글쓴이 : 최강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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