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기생 조직의 변천과정
권번은 일제시대에 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에는 원래 관기제도 외에는 공창제도라는 것이 없었으나, 한일합병 후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의 일본식 유곽제도를 1916년 3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공창제도로 공포했다. 그 이후 기생도 허가제가 되어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게 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중간역할을 담당했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다. 관기는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엉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게 된다. 이러한 관기제도의 폐지에 불만을 품은 기부(妓夫)들은 기부(妓夫) 있는 기녀, 즉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서 조합을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성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1908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09년 4월 1일자 <황성신문>에서이다. 관련된 신문기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생조합성립」, 박한영 등 30여인이 발기하여 한성 내 기생영업을 조합하여 풍속을 개량하기로 목적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경청(警廳)에 청원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년 10월 27일)
「자선연주회」. 문천군 기근을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소에서 음력 윤달 11일로 한 10 일 연주회를 원각사에서 열어 다소간 기부를 바라니, 원각사의 성의 또한 감사하여 이로써 알려드리니 모든 군자는 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백.(황성신문, 1909년 4월 1일)
한성기생조합은 후에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이후 1914년에 다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 한성기생조합의 설립과 함께 조선 기생의 ‘권번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부기(有夫妓)조합인 한성기생조합에 맞서 기부(妓夫) 없는 기녀들인 무부기(無夫妓)들의 조합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1915년 당시 기생조합으로는 신창기생조합, 순창기생조합 등이 더 있었다. 이중 광교, 다동, 신창 조합 등은 모두 근대적인 문물이 보다 발달해 있던 서울의 남촌에 자리잡고 있었고, 순창조합만이 북촌에 위치하였다. 더 자세히 보면 광교기생조합은 경성 무교정(武橋町) 92번지, 다동기생조합은 경성 다옥정(茶屋町) 177번지, 신창기생조합은 경성 황금정(黃金町) 3정목(丁目), 순창기생조합은 경성 의주통(義州通) 정목 201번지에 있었다.
서울에 이어 1910년대에는 지방에도 기생조합이 생긴다. 진주기생조합이 1913년 5월에 설립되었고, 평양기생조합이 1912년 12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구기생조합은 1910년 5월 31일 즈음에 만들어졌다.
기생조합들은 이후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하여 한성․광교 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개칭된다. 이후 대정권번에서 분리되어 생긴 대동권번(大同券番)과 조선권번(朝鮮券番), 또 경상도․전라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 한남권번(漢南券番) 등이 창립되었다. 1924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권번으로는 대정, 한남, 한성, 조선의 넷을 손꼽았고, 대동권번은 폐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4대 권번 중 한성권번과 한남권번만 조선인이 경영하였고, 대정권번과 조선권번은 일본인 내지는 친일파가 경영한 것이었다. 한성권번은 전통적으로 기생을 관리해온 별감 계층의 기부(妓夫)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기에 그 전통성을 주장하여 “그래도 한성권번인데” 운운하였다고 한다. 조선권번은 평양기생을 중심으로 하여 송병준을 배경으로 조직되었으며, 원로 河圭一 씨가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한편 신창권번은 조중응(趙重應)의 후원을 힘입어 ‘시궁골(笠井町)’, ‘상패’라고 화류계에서 제일 천대를 받는 창부들에게 기생이라는 명칭을 주어 조합허가를 내 준 것이다. 당시 신창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던 창부들은 그것을 축하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찬우무골’(永樂町)에 있던 조중응의 집에 가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기생조합이 생기고, 기생방에서 노는 절차는 깨어져 오입하는 법이 사라지자 기생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은 쉬워지고 歌舞보다는 얼굴을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게 되었다. 평양서 올라온 벙어리 기생을 보고 기가 막혀서 어느 노기(老妓)는 앙가슴을 쳤다고 한다. 얼굴만 예쁜 기생들이 수입으로 인기로 도리어 우수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니 10년 동안 공을 쌓아 명기 되기를 꿈꾸던 노기의 가슴은 쓸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카페, 여급 문화가 형성되면서 기생들도 전통적인 가무보다는 유행가나 사교춤을 더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권번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 가무를 가르치는 중심적 기관이었다. 대정권번의 기생 수업은 20여 명 정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이왕직 아악부에 있었던 하규일과 악사 11명이 기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학습은 대개 아침 10시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학생들 중 노래와 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하규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들은 각자 자기의 특성에 맞추어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을 배웠다. 노래는 우조(羽調) 6가지, 계면조(界面調) 6가지, 편 1~2가지를 배웠으며, 춤은 춘앵무(春鶯舞),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무고, 사고무, 무산향 등을 익혔다. 이러한 대정권번의 수업 내용을 보면 당시의 기생들이 기예를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알 수 있다.
4대 권번 이외에도 몇 개의 권번들이 서울에 있었다. 경화권번(京和券番)은 당시 경무사 신태휴가 삼패(三牌)2)들을 중심으로 남부시동에 세운 것이다. 기생들 중에서도 격이 떨어지는 삼패로 구성된 경화권번의 기생들은 다른 권번의 기생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하는데, 1923년에 조선권번으로 흡수되었다. 경성권번(京城券番)은 1923년 10월 4일 홍병은을 중심으로 경성부 인사동 141-2번지에 설립되었다. 한때는 소속 기생이 200여명에 달하기도 했던 이 권번은 1932년 3월 12일에 서린동 70번지로 이전한 이후에는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종로권번(鐘路券番)은 1935년 9월 11일 권번 출신 기생 김옥교에 의해 경성부 청진정 164번지에 설립되었다가 이후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다.
삼화권번(三和券番)은 조선, 종로, 한성의 3대 권번 주주들이 만든 권번이다. 1942년 8월 17일에 결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하였는데, 이후 일제에 의해 영업제지를 받았다가 광복 후에 부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0월 14일자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 공창제도가 폐지됨으로써 한국에서 권번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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