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1606~1669)의 작품 세계
빛의 유혹에 자신의 영혼을 던졌다고 할만큼 빛의 흐름을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포착했던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van Rijn)는 1606년 7월15일 네델란드의 레이덴에서 출생했다. 그가 활약한 17세기는 네델란드 회화의 황금시대로 불릴만큼 할스, 로이스달, 베르메르 같은 뛰어난 화가들이 수많은 걸작을 남긴 시대였다. 유트레히트파, 카라바조주의, 티치아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파, 그리고 플랑드르의 바로크 유형이 한꺼번에 나타난 이 시기의 회화적 조류에 렘브란트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1631년부터 암스테르담에 정착해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해외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부유 상인계층을 주요 고객으로 확보했다. 그가 초창기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현란한 의상과 금은 장식의 화려한 묘사를 극적인 빛의 구도 속에 펼쳐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들 신흥 부유층의 회화적 취향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회화적으로 성숙해진 중년기부터 자신의 예술혼을 대상의 화려한 외면적 재현보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내면적 표현에 집중시키려 했을 때 대중들은 그의 그림에서 등을 돌렸다.
1642년 독특한 화풍의 <야간순찰>을 제작 발표하였으나 일반대중은 그 예술적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첫 아내 사스키아마저 사별하자 렘브란트의 삶은 실의와 외로움으로 점철되며 회복될 수 없는 재정적 곤궁 속에 빠졌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펼쳐보이는 듯한 탁월한 빛의 처리로 마력적인 신비감을 더해갔다. 특히 60점도 넘게 그림 자화상과 말기의 종교화들은 물감을 점점 더 두껍게 바르며 대담한 붓터치를 하여 놀랍도록 시적인 분위기와 강력한 표현력을 보이면서도, 누구나 그 속에 자기자신이 빠져있는 듯한 인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아들 티투스의 성장에 위안을 받고, 그의 후반 인생에 좋은 반려자가 되어준 헨드리케 스토펠스와의 만남으로 그림들은 말년에 갈수록 더욱 원숙해졌다. 그럼에도 그의 경제상태는 악화일로로 치달아 결국 1656년에 파산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1662년 헨드리케가, 그리고 1668년에는 한점 혈육인 티투스마저 죽자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고 1669년 자신도 임종을 지켜보는 이없이 유산이라고는 단지 붓 몇 점만을 남긴 채 회한어린 생을 쓸쓸히 하직했다.
야간 순찰 Night Watch(1642)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일화가 엮여져 유명해진 거의 대표작같은 그림이다. 원래 벌건 대낮에 벌어진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도 동시대인들의 몰이해로 오랫동안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때가 끼어 시커멓게 된 바람에 이런 제목이 붙여졌고, 1889년 처음으로 작품을 복원하고 나서야 지금의 모습이 재생된 것이다.
1637년 프랑스 여왕 마리 드 메디시스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하자 시민경비대가 동원되어 성대한 환영행사를 치른 뒤 경비대장 반닝 코크 대위와 나머지 대원들이 제작 경비를 추렴하여 렘브란트에게 기념화를 그려달라 주문한 것이 이 그림이 제작된 동기이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자신의 의젓한 모습이 묘사되는 것을 기대했으나 검은 제복의 반닝 코크 부대장과 노란 제복의 부관 반 로이텐부르크 등 전면에 나타난 몇몇 대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머지는 그냥 오합지졸같은 허둥대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그림에 대한 대원들과 일반 대중의 평은 뭔가 기대와 다른 낯설음 때문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회화적으로는 대원 각자의 성급한 동작 자세와 얼굴 표정 묘사가 생생한데다 스며드는 빛을 통해 암스테르담 운하 밑 어둠 속에서의 극적인 효과를 제대로 잡아내어 렘브란트의 독창성이 가장 고조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수수께기의 인물은 왼쪽 전면에서 현실감 없이 뛰쳐나오는 앳되면서도 늙은 마법사같은 얼굴을 한 어린 소녀이다. 혹자는 죽은 아내 사스키아의 환생적 암시라고도 하지만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또 이 소녀의 허리끈에 두 발을 치켜들고 거꾸로 매달린 하얀 수탉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도통 알 수 없게 하는 수수께기이다. 하지만 이러만 궁금증 유발도 오늘날 이 그림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는 색다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사스키아(1633~34)
이 작품이 그려질 무렵은 렘브란트가 초상화가로서 대단한 인기를 누려 주문이 쇄도했던 시기이다. 그 시절 틈틈이 화사한 의상과 모자,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아내 사스키아의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에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창출한 가장 이상적인 여인像인 폴라이우로의 <플로라像>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운 부인像을 그려내고있다. 어두운 바탕 위에 선명하게 부각되어있는 옆 얼굴, 정교한 착색에 의한 의상과 장신구의 리얼한 질감 표현에서 회화적 기법의 완숙함이 잘 나타나 있다.
자화상(1634)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27, 8세 때의 모습이다. 이때 그는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를 리얼하게 제작해 유명 초상화가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고 생활상에도 활기가 넘쳤다. 이러한 밝은 내일을 안고 있었던 젊은 렘브란트의 자신에 차 있는 모습이 이 자화상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벨사살 왕의 향연 Belshazzar's Feast(1630-35)
바빌론 왕국 최후의 왕 벨사살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예루살렘 궁에서 약탈한 금은으로 된 술잔을 기울이며 향연를 벌이고 있던 중 돌연 왕궁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광채 찬란한 글자를 쓰고 있음을 보고 벨사살 왕은 경악한다. 신전에서 약탈한 물건으로 향연을 즐기는 왕에게서 왕권을 거두어갈 것을 알리는 신의 계시였기 때문에.. 렘브란트는 명암의 대조를 이용해 극적인 장면을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시키면서, 화려한 의상속에 흥청망청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의 놀란 표정을 극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삼손과 들릴라(1636)
렘브란트는 판관기에 나오는 괴력의 힘을 가진 장사 삼손의 생애를 다섯점의 연작으로 남겼는데 이 그림이 들릴라의 간계에 빠져 머리칼을 깎이고 눈을 잃게 되는 순간의 삼손을 가장 참혹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들릴라의 손짓 신호에 의해 숨어있던 터키 복식의 불레셋 병사들이 잠에 골아떨어진 삼손을 포박한 채 하나가 그의 오른쪽 눈을 찌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삼손의 발가락이 독수리 발톱처럼 웅크러지는 중에 또 다른 하나의 미늘창이 그의 사타구니를 파고들려 한다. 빛이 왼쪽에서 들어오는 사이 가위로 자른 삼손의 머리타래를 거머쥔 들리라는 두려움과 연민 속에 자신의 연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쳐다본다. 빛은 뱀처럼 차가운 혓바닥으로 삼손의 고통을 훑어 내린다.
17세기 네델란드의 신앙세계를 지배한 칼뱅교회의 구교에 대한 전투적 신앙자세는 화가들로 하여금 성서에 나오는 잔혹 소재를 부추겨 그리게 하는 시대적 정신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부친의 실명을 지켜본 렘브란트는 시각의 상실 소재를 예사롭게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삼손의 운명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리라..
폭풍을 머금은 풍경 Stormy Landscape(1638)
렘브란트의 풍경화는 163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사이 약 20년에 걸쳐 소묘 250여 점, 에칭 24점, 유화 17점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다지 많은 작품 수는 아니나 예술적 실험과정에는 상당히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 풍경화 제작을 통해 대상들의 심리표현상에 있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공간과 외광의 활용방법에도 눈뜨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실제가 아닌 상상속의 풍경화이다. 한 순간 반짝이는 태양광이 언덕 위 마을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다. 이 햇빛이 먹구름을 만나 명멸하면서 하늘과 대지의 화면에 넘치는 극적인 명암 대비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다 못해 그 어떤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창조한다.
도살된 소(1655)
렘브란트가 여기에서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작품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보기 편한 그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이 작품을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의 정수로 받아들인 들라크루아가 이 그림을 모사하고, 도미에도 영향을 받아 자신의 <푸줏간>연작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편하지 않은 테마에도 불구하고 그 힘찬 필치와 색채, 리얼한 표현이 이들 화가를 사로잡은 듯 하다,
책상에 앉은 티투스(1655)
이 그림은 사스키아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4명의 아이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 티투스의 14세 때 모습을 담은 첫 초상화이다. 큼직한 검은 눈을 가진 이 소년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어린 티투스는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사실 티투스는 어릴 때부터 그림 공부를 해왔는데, 렘브란트는 이렇게 그림 공부에 몰두하는 아들의 모습을 애정어린 눈으로 포착해 화폭에 남겨놓고 싶었던 듯 하다.
어린 소년의 생생한 표정 묘사와 화폭의 대담한 구도, 덤덤한 붓터치에 의한 정확한 질감 처리는 또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이 아이는 13년 후인 1668년 27세의 나이로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함으로서 렘브란트를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어 그 이듬해 위대한 화가도 생을 하직하게끔 하는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한다.
플로라 모습의 헨드리케(1656~57)
헨드리케를 모델로 한 플로라상은 사스키아의 그것과 비교할 때 눈에 띄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스키아의 플로라가 화려하게 치장된 이상적 여인상인데 비해 헨드리케의 그것은 검소하고 소박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대조는 두 여인의 독자적인 개성과 취향 차이를 그대로 반영했다기 보다 렘브란트 자신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내면적 추구정신이 심화되어간 후기 시절 헨드리케의 플로라상에서 더욱 자연스럽게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스키아의 그것에서 선명하게 부각되는 화려한 정밀묘사의 효과 대신 여기에서는 인물의 그늘이 배경에 희미하게 투영되고, 의상처리 역시 덤덤한 터치로 다루어져 렘브란트 자신의 예술혼이 화려한 외양보다 따뜻하고 소박한 인간적 내면을 추구하는데 더욱 더 기울어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돌아온 탕자(1662)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용서해 주는 눈먼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성서의 테마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을 접하면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父情이 실감나게 보이는 것 같다. 아버지는 초췌하고 헤진 모습을 한 아들을 감싸안으며 더없이 애절하고도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얼마 안있어 세상을 떠난 3명의 자식과 애지중지하던 남은 혈육 티투스마저 27세라는 젊디젊은 나이에 자신을 떠나자 더할 나위 없이 비통한 심정에 빠졌던 렘브란트에게 이 복음서의 이야기가 얼마나 부럽게 여겨졌을까?.. 분명 램브란트는 참담한 심정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이 그림에 자신의 마지막 남은 예술혼을 다 쏟아부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자화상(1660)
렘브란트가 자신의 예술을 찾아 나아갈수록 대중은 더욱 더 그를 외면했다.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가느라 젊은 시절 벌은 돈과 사별한 첫 아내 사스키아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마저 탕진한 말년의 노화가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붓 몇 자루 밖에 없다. 이 자화상에서는 이렇게 그를 괴롭힌 회한과 궁핍으로 인한 비애와 고독감이 얼굴에 그대로 그늘져 묻어 있다.
하지만 고뇌와 고독의 표정 속에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데 대한 노화가의 자족감이 한 곁에 서려있는 듯 하다. 진중권의 표현을 빌면, 이게 바로 렘브란트라는 인간의 '개인적 이념', 즉 마땅히 그래야 할 렘브란트의 모습이라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개인적 이념이 드러나는 자기실현의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게다. 바로 그 순간을 이 자화상에서 엿볼 수 있다면 당신도 그림 보는 안목이 상당하다 자부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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