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李滉 家門의 형성
朴 賢 淳
머리말
16-17세기를 거치는 동안 조선 사회의 친족질서는 宗法의 원리에 기초하여 재편되었다. 그
결과 前期의 兩側的 親屬 關係網은 약화되고 부계 중심의 친족 집단이 형성되었다. 본고는 한
家門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종법적 질서가 전래의 양측적 원리를 대체하고 중심적 친족 결합
원리로 자리잡는 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대상 시기는 종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16
세기이며, 대상 가문은 安東 溫溪 李滉(1501-1570) 집안이다.
兩側的 親屬 關係網
溫溪 地域의 人的 構成
이황의 가계가 예안에 처음 정착한 것은 조부인 李繼陽(1424 1488) 때이다. 이계양은 安東
周村 출신으로 혼인 후 妻鄕인 예안현으로 이주하였고 온계를 개간하여 이 곳에 정착하였다.
이 때가 1454년 경이다. 그 후 溫溪에는 그의 내외손이 世居하면서 주변지역으로 거주지를 확
대시켜 나갔다.
1세기가 지난 1548년경부터 1615년까지 溫溪洞 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17세기 초에 저
술된 <<宣城誌>>를 보면 온계지역에는 이계양의 親孫인 眞城 李氏 외에 사위나 外孫인 奉化
琴氏, 高敞 吳氏 등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표1. <洞員>의 성씨별 분포>>
한편 이계양의 親孫인 眞城 李氏들 중의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계양의 두 아
들은 모두 온계에 거주하였으나 親孫 7명 중 적어도 2명, 曾孫 중 적어도 3명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서 정착하여 각각 入鄕祖가 되었고, 후손들은 그곳에 世居하
였다. 따라서 온계지역의 거주 인물은 이계양의 親孫 일부와 女壻 外孫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
었다. 16세기에는 父系가 자녀의 거주지를 결정하는 주요한 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
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移住의 要因
자녀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 딸은 물론이고 아들의 경우에도 婚姻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혼인 직후에 신랑이 처가에 묵는 것이 전래의 관습이기는 하지만 16세기에는
그 기간이 상당히 길어서, 짧게는 해를 넘기는 정도에 그쳤으나 길게는 수십년동안 처향에 거
주하는 예도 있었다. 이 집안의 경우 吳彦毅(1494-1566)는 20년 이상을 처향에 거주하였고, 이
황의 아들인 李寯(1523-1583)이나 손자인 李安道(1541-1584)도 妻鄕에서 10년 가량 거주하였다.
아예 처향에 정착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宗孫인 李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長子까지도 장기
간 처향에 거주하거나 정착한 사례들은 이 시기에 친족 관계에서 처변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
적으로 높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처향에 거주하는 아들이 本家를 끊임없이 왕래하기는 하
였으나 그의 가족이 처향에 머무르고 있는 이상 결혼한 자녀가 아버지와 同居하는 가족형태가
지배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황은 손자녀들이 성장하자 적장자를 분가시키기도 하였다.
妻鄕으로 이주하는 것 외에 외조부의 奉祀孫이 되어 외가로 이주하거나(李 , 李교) 외조부
변의 재산을 상속받아 외가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吳守盈, 金烋). 이황의 차자인 李寀
의 경우 외종조의 異姓養子가 되어 丹城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자녀들이 移居하는
이유는 다양하였겠지만, 토지의 상속이 생활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이주지의 지역적 범위는 내
외변 친속의 연고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1580년대에 작성된 이 집안의 분재기를 보면 상속과 관련하여 특징적인 면이 발견된다. 조
선 전기의 상속관례에서는 모든 자녀에게 家舍를 상속하거나 造家 몫으로 다른 재산을 加給하
지는 않았다. 그러나 1580년에 작성된 李完의 妻 卞氏의 분재기에는 4남 2녀에게 재산을 균분
하여 分給하였으나 아들에게만 家舍를 상속하거나 가사의 건축을 지원하였다. 한편 1586년에
작성된 金涌妻李氏男妹和會文記에서는 5남매가 재산을 균분하였는데, 거주지에 따라 장남인 安
道 몫으로는 온계의 토지가, 차녀인 金涌 처의 몫으로는 안동의 토지가 상대적으로 많이 분급
되었다. 16세기 후반 이 집안에서는 균분상속을 시행하면서도 가사를 상속하거나 부변의 토지
를 상대적으로 많이 분급함으로써 아들을 부변에 거주하도록 유도하였거나 이미 어느 정도 아
들의 부변 거주가 정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宗法에 기초한 친족 관계 재편
奉祀의 강조
성리학이 보급되고 宗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조선 사회에서도 친족의식이 강화되었
다. 족보의 간행이나 族 의 시행은 친족 관념이 구체적으로 외형화된 것들이다. 동일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관념이 강화되면서 직계 조상에 대한 제사와 祭禮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였다.이황
집안에서는 155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溫溪族 의 실시와 齋舍 건립 등의 爲先事業이 집중적으
로 진행되었다.
齋舍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묘소 근처에 마련한 건축물인데, 이 곳에서 忌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齋舍는 家廟와는 달리 묘소 주변에 위치하였는데, 寺刹에 影堂을 마련하여 齋를 올리
던 고려적 관습의 遺制이다. 15세기에도 사대부들은 齋舍(齋庵)를 건립하여 승려로 하여금 묘소
를 지키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16세기 전반까지 이황 집안의 자녀들은 輪廻奉祀의 관습을 따라 기제사를 봉행하였는데, 묘
소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고, 때로는 온계 뒷산의 龍壽寺, 자손의 집이나 임지의 관아 등에
서 제사를 받들기도 하였다. 寒食 등에 지내는 節祭도 내외손이 윤회하여 奉祀하였다.
그러나 1555년 경 齋舍를 완공한 후 더 이상 제사를 輪行하지 않고 祭需를 함께 마련하여
齋舍에서 奉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풍습에 따라 1년에 네 차례 지내던 고조의 墓祭를 두
차례로 줄여 한식과 추석에는 고조부모와 증조부모의 제사를 齋舍에서 지내고, 단오와 歲時에
는 증조부모의 제사를 묘소 앞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齋舍의 건립과 제례의 정비는 조상에 대
한 儀禮를 정식화하여 格式을 갖추려고 한 노력의 일단이다.
樹谷齋舍을 건립하고 윤회 봉사를 폐지하였다고 하더라도 宗子가 단독으로 제사를 承繼한
것은 아니다. 李滉은 宗子만 忌祭를 지내게 되면 支子들이 享先의 禮를 잊게 되거나 宗子가 경
제적 부담때문에 제사를 폐할 위험이 있으므로 관습에 따라 支子나 女子도 제사를 지내는 편이
낫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재사가 건립된 이후에도 女孫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거
나 윤회 봉사한 경우가 확인된다.
樹谷齋舍는 봉사를 위한 堂과 齋戒하는 淨齋, 墓直僧이 거처하는 僧寮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堂은 5架 3間으로 마련하여 <<家禮>>의 사당제도를 모방하였다. 재사의 건립은 기제사를 墓所
에서 지내는 관행을 따르면서도 성리학적 家廟制를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던 것이다. 또 高祖의
墓祭를 두 차례로 줄인 것도 <<家禮>>에서 墓祭를 1년에 한차례 지내도록 한 것을 고려한 결
과였다. 이 집안은 제례를 정비하면서 기존의 관습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의식 속에서는 <<家
禮>>의 이념을 지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황은 부계 조상의 事蹟을 조사하고 묘비를 세
우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遺言으로 先祖의 묘비를 세울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宗子의 家系 繼承
齋舍와 달리 家廟는 적장자 중심의 가계 계승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 집안에는 16세기
전반에도 이미 家廟가 있었는데, 宗孫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때문에 관행에 따라
차자의 長子인 李完이 宗子가 되어 가묘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李完은 처향에 거주하였기 때문
에 宗家를 지키지는 못하였으며, 이완의 伯母는 宗家의 代田을 두 사위에게 分給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家廟와 宗家를 매개로 한 적장자 중심의 가계 계승
의식이 미약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李完이 四時祭를 봉행하고, 1550년 家廟를 다시 건립하면서 宗子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四時祭는 매년 4仲朔에 4대부모에게 올리는 제사로 <<家禮>>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황 역시 忌祭나 節祭는 小禮로 파악하여 支子의 봉사를 인정하였으나 時祭는 宗子가 봉행하
는 大禮로 인식하였다. 가묘에 대해서도 사람의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家廟에 외조부모를 함
께 모시는 것은 非禮라고 하여 家廟를 부계중심의 가계 계승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는 집안에서 윤회 봉사를 행하고 李完이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家廟
의 중수와 四時祭의 봉행을 유도함으로써 宗子에 의한 가계 계승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집안의 어른이었던 이황은 처변에 거주하던 李完과 종손인 李宗道에게 溫溪로 이주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반면 이완이나 이종도는 생활 상의 이유를 들어 이주를 거부하였
다. 양자간의 갈등은 家廟와 적장자를 결합시키는 가계 계승을 중시하는 이황의 인식과 전래의
관습 사이에 발생한 갈등의 단편일 것이다. 결국 1567년 경에 宗家를 개축하고 李宗道가 온계
로 이주하여 家廟를 지키는 종손이 되었다. 그 후 그가 奉祀孫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
음 세대에 이 집안에 立後가 늘어나고, 承重子에게 奉祀條를 계승하도록 한 것을 보면 17세기
초에는 宗子가 제사까지도 계승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맺음말
16세기 온계지역은 부계 중심 친족 집단의 거주지는 아니었으며, 내외손은 부변과 처변, 모
변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친족 관념이 강화되고 제례를 정비하면서도 외손을 배제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녀균분상속을 시행하면서도 부변의 가사나 토지를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분급
하는 경향은 아들의 부변 정착을 가져왔다. 적장자는 家廟의 承繼를 통해 가계 계승자로 인식
되었으며, 점차 제사까지 상속하였을 것이다. 종자가 가문의 대표로써 제사권까지 계승하는 시
기가 바로 이 집안이 父系 중심의 친족집단인 家門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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