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읽으면 재미있는, 역사소설 '문익점 목화를 꿈꾸다']
문묘(文廟)는 공자(孔子; 文宣王, BC551~BC479)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그 기원은 공자가 죽은 이듬해인 BC 4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가 살던 옛집을 묘(廟)로 개축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 그 효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균관과 향교에 문묘를 두고 있는데, 그 시초는 신라 성덕왕 13년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그 제자들의 그림을 가져와 국학에 두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공자 이하 133위를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현인 94명의 위패를 땅에 묻고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대성전에 남기게 됩니다. 18위는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입니다.
공자((BC551~BC479)
안자(안회, BC521~BC491)
증자(BC506~BC436)
맹자(BC372~BC289)
주희(1130~1200)
설총(654?~?)
최치원(857~?)
안향(1243~1306)
정몽주(1337~1392)
조광조(1482~1519)
이황(1501~1570)
이이(1536~1584)
김장생(1548~1631)
조헌(1544~1592)
송시열(1607~1689)
공자를 기리는 사당에 위패가 놓인다고 하는 것은 유학자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합니다. 공자의 제자로서 모셔진다는 셈이니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8위를 찬찬히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인물은 안유(안향)와 정몽주 밖에 없습니다. 설총과 최치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인물들입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중흥을 위해 애쓴 고려 말의 성리학자들이 있음에도 조선시대 개국공신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정몽주 외에는 다른 인물이 없는 것입니다.
당시 성리학 분야에서 정몽주에 필적할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목은 이색이 있고 그 뒤를 이어 문익점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 목은 이색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기록이 남아있고, 문익점의 경우에는 ‘배신자’, 또는 ‘무능력자’라고 까지 언급될 정도였기에 이성계 일파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고려 문신들의 문묘배향은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배향된 인물들 중 이황, 조헌, 김집, 송시열 등은 이색과 문익점이 성리학에 미친 영향을 기리는 글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문익점의 경우에는 목화의 전래보다도 오히려 성리학의 기풍을 바로 세우는 데 더 큰 공이 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생들은 1885년(고종 22년) 목은 이색과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연이어 3차례나 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문묘의 배향은 쉽게 결정내릴 수가 없는 문제라며 유생들은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답이 내려옵니다.
1885년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힘겨루기가 한창일 시기였습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 일본, 영국, 러시아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바쁠 때였습니다. 또한, 프랑스, 독일, 미국도 조선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884년에 김옥균의 주도 하에 벌어졌던 갑신정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배상문제가 있어 이를 처리하는 한성조약이 체결되기도 했고, 또한 남하하려는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유생들의 간절한 바람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1885년은 ‘문묘배향’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시기였음은 분명했습니다.
김옥균((1851~1894))
1.1885년 5월 6일
조선왕조실록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5월 6일(갑진) 5번째기사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정재경 등이 상소하다
유학(幼學) 정재경(鄭在慶) 등이 상소하여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높이고 공경하는 것은 도(道)를 보위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이것은 구태여 그대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는 사체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대번에 허락할 수 없다. 모두 그리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2.1885년 9월 29일
조선왕조실록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9월 29일(갑자) 2번째기사
이색, 문익점을 문묘에 합사하도록 홍재성 등이 상소하다
방외 유생(方外儒生) 홍재성(洪在誠)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합사(合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현인(賢人)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일을 어떻게 그대들의 말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진달한 문제를 갑자기 윤허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신중하고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잘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11)
9월 29일(갑자)맑음
이색과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게 할 것을 청하는 유생 홍재성 등의 상소
방외 유생 홍재성(洪在誠)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유현(儒賢)의 은덕에 보답하여 숭상하는 것은 성왕(聖王)이 다스림을 힘쓰는 근본이 되며, 도덕을 존경하여 사모하는 일은 후학들이 성현을 계승하는 본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치를 중시하는 교화를 폈던 열성조에서는 반드시 이를 앞세웠던 것이니, 비록 한 가지의 행실이나 한 가지의 절개를 지닌 선비라 할지라도 오히려 능히 그 덕을 권장하고 그 공을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전하에 이르러서는 학문이 날로 성취되고 문물이 크게 빛나서 문열공(文烈公) 신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신 김집(金集)을 아울러 문묘에 종사하는 성대한 의식이 있게 되었으니, 팔방의 생명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인도(人道)를 숭상하여 구습을 일신하는 교화 속에서 뛰며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도덕과 학문으로 백세토록 무궁한 교화를 일으켜 세우고 절행(節行)이나 충효로 한 세상의 모범이 되었던 사람이 있어서, 그 업적이 비단 태상(太常)에 기록될 뿐만이 아니고 그 공로가 이사(里社)에서 제사로 받드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될 뛰어난 것인데도 아직도 문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있다면, 국가의 전례에 있어 흠이 되는 점과 사림들이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호소하며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고려 말의 유현(儒賢) 문정공(文靖公) 신 이색(李穡)과 충선공(忠宣公) 신 문익점(文益漸)은 학문의 순수함으로 보거나 연원(淵源)의 올바른 적통으로 볼 때, 우리 동방의 유종(儒宗)이며 후학들의 표준이 됩니다. 청컨대 역사책에 실려 있는 내용과 선배들이 허여했던 바와 열성조에서 권장하고 숭상했던 사례들을 가지고 대략 그 사실을 열거하여 예람(睿覽)에 대비코자 합니다.
신들이 삼가 고찰해 보건대, 문정공 신 이색은 고려 말에 의리(義理)가 어두워져 막히고 사설(邪說)이 분분하게 일어나 불교의 폐단이 온 나라에 가득하고, 화가 세상에 가득하여 홍수의 화보다 더한 때를 당하여, 선생이 쇠퇴한 시대의 물결 속에서 지주(砥柱)처럼 우뚝 서서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을 실제적인 행실로 삼고 사교(邪敎)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승려의 무리를 물리치고 삼년상(三年喪)의 제도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주무숙(周茂叔)과 두 정자(程子)의 학문을 밝혀 여러 차례 임금에게 글을 올렸으니, 이는 이단을 배척하여 옛날의 예(禮)를 회복하고 유교를 숭상한 것으로 사문(斯文)에 연원을 두고서 당세에 보탬이 되었던 바가 컸습니다. 우리 동방의 여러 선현들이 모두 선생을 도학(道學)과 성리학(性理學)의 종장(宗匠)으로 여겼는데,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고 상신(相臣)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 문간공(文簡公) 홍명하(洪命夏)가 떠받들고 존중하여 흠모하고 모두들 지극히 찬송하였으니, 선생의 진실한 행실과 진실한 덕은 후인들이 의론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선생께서 무함을 당한 것은 사관(史官)의 시기와 꺼림을 받은 데 기인한 것인데, ‘불교를 배척함이 엄격하지 않았다.’든가, ‘학술이 정미하지 못하였다.’라든가, ‘부처도 역시 성현이다.’라는 등의 말을 지목하여 문묘에서 출향(黜享)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의 설은 여러 가지 문헌을 가지고 고찰해 보더라도 한 가지도 충분히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실로 흠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신들이 청컨대 역사책을 인용하여 잘잘못을 가려 밝히고자 합니다. 《고려사(高麗史)》 공민왕(恭愍王) 조에서 이르기를, ‘선생은 부처에 절하지 않았다.’ 하였고, 선생이 올린 상소에서는 대략 이르기를 ‘새로 창건하는 절을 아울러 철거하도록 해서 승려들을 바로 군대에 충원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이러한 것이 불교를 배척함에 있어 엄격하지 못했던 점이겠습니까. 또 선생의 문집에 실린 시 가운데,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였으니 / 孟氏闢楊墨
그 공이 삼재와 짝할 만한데 / 其功配三才
눈물이 나도록 슬프구나 / 傷哉可流涕
공묘(孔廟)에는 이끼만 끼었네 / 闕里多?苔
하였으니, 이 시는 성인의 도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릴까 염려하여 개연히 세상을 염려하는 깊고도 간절한 마음 속의 생각이 평소에 음영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학술이 정미하였던 점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도가 지극한 것을 일러서 ‘성(聖)’이라고 하는 것이니, 공자께서도 이르시기를, ‘서방(西方)에 성인이 있다.’ 하셨는데, 여기에서의 성인은 우리 유도에서의 성인이 아니고 곧 저들의 도에서 지극한 경지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부처도 역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에 사찰을 짓는 역사(役事)가 나라 안 곳곳에서 벌어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었으므로 성인이 세상을 걱정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차마 못할 바의 정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도 역시 자비의 성인인 이상 아마도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것이라는 구절의 말로 풍간을 해서 이를 그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니, 이것이 부처를 성인으로 공경하려 한 것이겠습니까.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는 이르기를, ‘나를 죄 줄 것도 《춘추》이고 나를 알아줄 것도 《춘추》이다.’라고 하여, 공자의 도통을 계승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선생이 무함을 받게 된 것은 세상의 도와 관계됨이 적지 않다.’ 하였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 속에 단청처럼 빛나고 있고 여러 현인들의 찬송이 해와 별처럼 밝게 걸려 있으니, 무함을 받았던 세 가지 명목은 환연히 얼음처럼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은 이른바 우리 동방의 진유(眞儒)라 할 수 있으며 명세(命世)의 대현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 아직도 다시 향사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조정의 흠전이 아니겠으며 사림들의 억울해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고찰해 보건대 충선공(忠宣公) 신 문익점은 고려 말에 태어나 직접 학교가 폐하여져 학생들은 끝내 학식이 보잘것없게 되고, 사찰은 하늘 아래 잇닿아 있어 온 세상이 다투어 불교에 전염되는 것을 보고는, 선생께서 홀로 개연하게 끊어진 학문을 계승하고 정도(正道)를 선창하여 밝히고자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하며 효제와 충신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정자와 주자의 글이 동방으로 들어왔으나 사람들이 밝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깊이 생각하고 반복하여 자세히 이해하여 하나로 꿰뚫어서 성리의 연원을 찾아 연구하고 심학의 요체를 닦아서 문충공(文忠公) 신 정몽주(鄭夢周), 문정공(文靖公) 신 이색과 더불어 연마하여 강론하였습니다. 공민왕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어서 상소를 올려 정치를 하는 도리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고금의 일을 인용한 수천 마디의 말들은 모두가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방법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하거나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실 것을 청하여 이곳에서 글을 읽는 풍속이 이로 말미암아서 진흥되었으며, 상제(喪制)에 관한 예가 이로 말미암아서 갖추어졌습니다. 그가 용퇴(勇退)하고 나서는 중간에 향리로 내려가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호(號)를 삼우거사(三憂居士)라 하였으니, 그 근심의 내용은 바로 왕국이 기세를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데에 대한 근심과, 성학(聖學)이 밝혀지지 못하는 데에 대한 근심과, 자신의 도가 서지 못하는 데에 대한 근심이었던 것입니다. 공맹(孔孟)의 학문을 맛있는 음식처럼 좋아하고 정주의 학문을 숙속(菽粟)으로 삼아 배를 불리고, 어두운 거리를 크게 열어서 사문(斯文)으로 하여금 쓰러지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도학(道學)이 찬연하게 빛난 것입니다. 또 일찍이 원(元)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사(公事)로 인해 남쪽 변경으로 3년 간 유배를 당하였으나 절개를 더욱 견고하게 지켰고, 고려의 국운이 끝나감에 미쳐서는 종신토록 절개를 지켜서 군신의 대의를 밝혔으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이 바르고 크며 지키고 마음먹은 바가 매우 견고하지 않았다면 그가 수립한 바가 어찌 이처럼 뛰어나게 우뚝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의 충성과 의리가 뛰어났던 것입니다.
심지어 효성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일찍이 어머니의 상중에 시묘(侍墓)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왜구들이 드세게 쳐들어와 지나는 곳마다 잔인하게 죽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도망하여 숨었으나, 선생만은 여전히 최질(衰?)의 복을 입고 산소 앞에 엎디어 호곡(號哭)을 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감탄하여 효자라고 칭찬하고는 감히 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효행이 빛나는 것입니다.
무릇 국가 경제를 위한 계책에 있어서도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남쪽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얻어 필관(筆管) 속에 감추고 돌아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는 그 공에 힘입고 있고 백성들은 그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옷을 주어 따듯하게 해 준 은혜와 힘써 목화를 심어서 가꾼 덕은 실로 적지 않지만, 그의 도학과 덕행에 비해 보자면 이는 특별히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입니다. 《고려사(高麗史)》를 안찰해 보건대, 사신의 찬(贊)에 이르기를, ‘문익점은 목화를 보급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준 공로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도를 창명하고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하여 삼한(三韓)의 오염을 씻어 내었다. 하늘의 이치가 다시 밝혀지게 되고 문풍(文風)이 다시 환하게 진작되었으니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고 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성조에서 그의 도학을 흠모하고 공덕을 돌이켜 생각해서 여러 차례 칭찬하여 장려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지극하고도 극진하다 하겠습니다. 선정신 문정공 이색은 말하기를, ‘공이 의문을 제기하고 오의(奧義)를 질문한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바가 없으니 마땅히 도학의 종장으로 여겨야 한다.’ 하였고,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은 이르기를, ‘행실이 의리에 맞고 올발랐으며, 또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다.’ 하였으며, 문정공(文貞公) 신 조식(曺植)은 이르기를, ‘고려 말에 불교가 크게 행해져서 동방에서 성인의 학문이 전래된 것이 거의 다시는 발전되지 못할 뻔하였는데 공이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서 후생들에게 열어서 보여 주었다.’ 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신 송시열은 이르기를, ‘정자와 주자가 죽고 난 뒤에 능히 그 전함을 얻어서 우리의 도를 다시 밝힌 자는 오직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충선공(忠宣公) 문익점 두 선현이었다. 두 선현이 아니었다면 우리 동방이 지금에 이르도록 비천한 오랑캐의 행실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전 사람으로 문군(文君)과 같은 이가 없었고, 후인으로도 역시 문군과 같은 이가 없다.’ 하였는데 그 후의 후인(後人)들이 문군에 대하여 알지 못하게 될까를 염려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문간공(文簡公) 신 황경원(黃景源)은 이르기를, ‘의리는 군신의 윤리를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고 학문은 충분히 하늘과 사람의 진실을 구명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여러 선현들이 찬술한 내용입니다. 어찌 한 나라의 대현이 아니겠으며 백세의 존사(尊師)가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문정공 신 이색과 충선공 신 문익점의 도학과 공덕은 공자와 맹자의 연원을 잇고 정자와 주자의 계통을 이었으며, 찬연하게 방책에 실려 있고 여러 어리석은 후학을 열어서 깨우쳐 주었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백세를 기다린다 하더라도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다시 제향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아 문묘에 종사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성왕께서 현인을 받드는 다스림과 후학이 도를 사모하는 방도에 있어 흠전이 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참람됨을 무릅쓰고 같은 목소리로 대궐에 나와 아뢰오니, 삼가 전하께 바라건대 성현을 숭상하여 보답하기를 두터이 해야 함과 공공의 의론이 한결같음을 생각하시고 속히 윤허를 내리셔서 아울러 두 선현을 받들어 성묘에 배향하신다면 국가에 있어 매우 다행이겠으며 사문에 있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선현을 숭상하고 도를 존중하는 데에 있어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아뢴 것을 갑자기 윤허할 수 없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요하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그리 알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3.1885년 11월 7일
조선왕조실록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11월 7일(신축) 4번째기사
이색,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김건수 등이 상소하다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건수(金健秀) 등이 올린 상소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과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배향해 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이전에 이미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그대들도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이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11)
11월 7일(신축)맑음
이색과 문익점을 성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는 김건수 등의 상소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건수(金健秀)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사람에 대해서는 감응하는 이치가 있어 하늘이 높고 멀지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 주며, 아비가 자식에 대해서는 지극히 자애로운 은혜가 있기 때문에 아비가 엄하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에게 천지와 같으시고 부모와 같으신데, 어찌 원하는 것이 있는데 진술하지 않고 품은 것이 있는데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 등이 일전에 서로 이끌고 하소연하였던 것인데,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상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고려 말의 유현(儒賢) 문정공(文靖公) 신 이색(李穡)과 충선공(忠宣公) 신 문익점(文益漸)의 도학(道學)은 정주학(程朱學)을 연원으로 하였으니 실로 동방의 유종(儒宗)이고 후학(後學)의 표준(標準)이 되는 인물이며, 열성조(列聖朝)에서 포장(褒?)한 것이 역사책에 밝게 실려 있고 선현들이 존숭한 것이 서책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정학(正學)인 주자학을 지키고 사도(邪道)인 천주교를 물리치고 학교를 세울 것을 주장한 것과 천리가 어두워진 것을 밝히고 성리(性理)의 미묘하고 심오한 것을 강마(講磨)할 것을 주장한 것은 이미 전의 상소에서 진술하였으니 다시 거론할 것 없습니다만, 삼가 성비(聖批)를 보건대, 그 일의 체모에 있어 지극히 신중히 다루고 더없이 중시하여야 할 일이라는 이유로 아직 종향(從享)을 허락하는 전교를 아끼셨으므로 더욱 여론이 매우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무릇 덕 있는 이를 표창하고 현자를 예우하는 것은 교화하는 도리에 있어서 먼저 해야 할 바이고, 공을 생각하여 공로를 조사하여 살펴보는 것은 성철(聖哲)의 첫째가는 임무이니 덕이 크게 밝아 죽어서도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문열공(文烈公) 신 조헌(趙憲)과 문경공(文敬公) 신 김집(金集)이 그 학문이 고명함으로 해서 이 문물이 호화찬란한 때를 당하여 함께 배향되었으니 전적으로 임금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문정공 신 이색과 충선공 신 문익점은 저 양현(兩賢)과 덕이 같고 도가 서로 같은데 가묘(家廟)에서만 제사하는 데 그치고 성묘(聖廟)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어찌 성세(聖世)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으며 많은 선비들이 억울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문정공 신 이색은 이와 같이 탁월한 도덕으로서도 당시에 전당(錢唐)의 충간(忠諫)이 없었던 관계로 사관이 시기하여 싫어함으로 말미암아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선생이 무함받은 것은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하였습니다. 또한 충선공 신 문익점은 태어나서 고려 말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사문(斯文)을 지키는 일을 자임하고 끊어진 학문을 이어 도를 밝히고 이단을 배척하고 교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문간공(文簡公) 신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의리는 충분히 군신간의 윤리를 바로잡을 수 있고, 학문은 충분히 천인(天人)의 진리를 궁구하였다.’ 하였습니다. 전현(前賢)의 찬미가 이와 같고 오늘의 공의(公議)는 저와 같아 진실로 온 나라에서 보고 느끼고 있으니, 어찌 백세의 사범(師範)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삼가 이 문정공(李文靖公)과 문 충선공(文忠宣公)이 불행히 전하께서 정치에 힘쓰는 세상에 일어나 요순의 성화(聖化)를 협력하여 돕지 못하는 것을 한하며, 또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황 문간공(黃文簡公)이 불행히 신들이 서로 이끌고 하소연하는 날에 있지 않아 전하의 귀를 열어서 더 잘 들으실 수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한합니다. 신들이 삼가 일전의 성비(聖批)에서 이 일을 물리치신다는 내용을 읽었지만, 삼가 도덕을 사모하기에 참람함을 피하지 않고 이에 감히 다시 한 목소리로 조정에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윤허를 아끼지 마시고 양현을 성묘에 제향하게 하소서. 이것이 어찌 다만 사림(士林)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또한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다 잘 알았다. 전에 이미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너희들도 일의 체모에 있어 더없이 중시하여야 할 일임을 알 텐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이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알고 읽으면 재미있는, 역사소설 '문익점 목화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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