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이이(이율곡)

회기로 2010. 1. 24. 18:36

이이
출생 1536년  강원도 강릉
사망 1584년  서울 대사동 자택
 
국적 조선
별명 호는 율곡, 자는 숙헌
학력 한성시 장원급제
직업 문인, 정치가
배우자 곡산 노씨
부모 이원수 / 신사임당
이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1584년 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이며 정치가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다. 대한민국의 5000원권 지폐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대한민국의 50,000원짜리 지폐 초상으로 선정되었다.

 

[편집] 생애

[편집] 유소년기
1536년 강원도 강릉의 죽헌동의 오죽헌 외가에서, 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와 유명한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의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이이가 태어나기 전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라 이름했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이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으며 그가 거주하던 임진강변의 율곡리를 고향으로 보기도 한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이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 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어진 어머니이자 슬기로운 아내로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이이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이이는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편집] 모친상과 방황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 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1551년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이 무렵 신사임당은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병세가 차츰 악화되어 죽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 상이 끝난 날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다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년 만에 금강산에서 내려왔다.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유교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 하였다.

[편집] 학자와 관료생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 곳에서 2일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철학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고는 하였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 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1564년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 (九度壯 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치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서거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외척 심통원이 등용되어 횡포를 일삼았다. 이 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 하였다.

1568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1569년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심 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1571년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 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편집] 정치 활동
그러나 1573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사항을 열거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시 고향인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42세 때에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 를 저술하였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 9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 하지만 반대파들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편집] 개혁 방안
또 1583년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 해 음력 2월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개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시오 였고,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軍籍)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해주어,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라 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經筵日記)의 완성을 보았다.

[편집] 사후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49세를 일기로 새벽에 사망하였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장사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이이가 1년 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뒷날의 남인 당쟁파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편집] 평가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 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편집] 유적지
경기도 파주시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인 자운서원과 여생을 보낸 누각 화석정이 있다.

 

[편집] 저서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편집] 가족
아버지 : 이원수 - 통덕랑 사헌부감찰 수운판관 역임, 좌찬성에 추증
어머니 : 신사임당   서모 : 권씨
부인 : 권씨   누이 : 이매창
형   : 이번, 이선    동생 : 이우
이종사촌 : 권처균(權處均),   재종조부 : 이기, 이행

 

 


□이율곡과 밤나무

강릉에서 유명한 이율곡 선생님의 아버지, 이원수는 일찍이 강릉에서 장가를 가서 십 년동안 부인과 헤어졌지.
자기는 글 공부를 할테니 부인은 그림 공부를 하라고 했는데 대관령을 넘어가려 하니 오죽헌에서 다홍치마를 입고 왔다갔다 하는 부인이 생각나서 다시 내려왔으나
약속을 어긴 것이 창피해서 오죽헌 대밭에 숨었다가 결국 못참고 부인방에 찾아가 열어달라고 두드리니 부인이
"사내 대장부는 약속을 지켜야 된다"하면서 자기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었어.
"이걸 가지고 서울에 가서 공부하시오."했는데 이 말인 즉슨 이 다음에 당신이 또 내려오면 내 목을 끊어서 주겠다는 말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울며 다시 서울로 올라가 부인의 달비를 보면서 십 년 동안 공부를 하고 난 후, 지금의 대화땅을 보며 대관령 아흔아홉고개를 넘어 오는데 해가 져서 갈 길이 없어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되어 어느 여자의 집을 찾았지.
  하룻밤을 청하니 자정쯤 되어서 그 여자가 술상을 들고 들어오는데 그 여자 왈 "제가 정선 사람인데 작년에 상부하고 지금까지 아무 생각이 없다가 이 자리에 와서 보니 당신이 그리워지니 하룻밤만 나와 동침을 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하였으나 이원수는 이것을 거절하고 그 길로 나와 생각컨데 그 여자가 어떤 나쁜 짓을 하지나 않을가 걱정이 되서 새벽녘에 거기에 갔지.
"내가 사내 대장부로서 그런 아낙네의 간청하나 못들어주면 무슨 면목인가."하여 다시 찾아가니 이번에는 그 여자가 거절을 하더래.
거절하면서 그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을 보니 명인을 얻을 쾌인데 그것이 당신의 아내한테 태 했습니다"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은 물러가시오. 나기는 새벽 인시인데 호환해 갈 팔자다. 호랭이 한테 물려갈 팔자다"이말이야.
그 다음에 "과거도 안보고 죽는 사람은 천명으로 살려야 된다" 하니
"그러니까 어떻게 살려야 하냐"고 묻자 "다섯 살 먹은 모월 모일에 중이 하나 오거든 밤나무 천그루를 베주어라" 했단 말이지.
공교롭게 다섯 살 먹던 모월 모일이 막 되니까 머슴들이 앞문 뒷문 단속을 막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키는 팔척 장승으로 중이 하나 오더니 "이 집에 시주 좀 하시오. 저는 오대산 주지로 금강산 유점사에서 오는 길이온데, 이 집에 아기가 하나 있다하니 아기를 좀 보여주시오"하니 그때 이원수는 주역을 낭독하고 있었는데 "나도 지금 도를 닦는 중인데 무슨 수작이냐?"하며 호통을 치니
"당신이 무슨 도를 닦느냐?"며 밤나무를 가서 베어, 이것을 세니 구백 구십 아홉 낭그야.
한 남자는 소를 매서 죽였다 이거야. 그러니까 "천명을 거역했다"며 대사가 소리를 내 지르니까 난데없는 남자 하나가 와서 "나도 밤나무"하는 기라.
그래 천 그루를 세웠다.
시간이 다 되니까 냅다 뒹글어서 호랭이가 되어 달아나니 이 원수가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아들을 구했기에 이율곡이 밤나무 천 그루를 또 심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 강원도 사투리- 이율곡 선생의 십만 양병설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강원도 강릉 사람 이율곡 선생의 사투리를 못 알아들으셔서 선조 임금께서 결국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았다는~~


"전하! 자들이 움메나(얼마나) 빡신지(억센지),
영깽이(여우) 같애가지고 하마(벌써) 서구문물을 받아들여가지고요,
쇠꼽 덩거리(쇠 덩어리)를 막 자들고 발쿠고(두드리고 펴고) 이래 가지고 뭔 조총이란 걸 맹글었는데,


한쪽 구녕(구멍) 큰 데다가는 화약 덩거리하고
재재한 쇠꼽 덩거리를 우겨넣고는,
이쪽 반대편에는 쪼그마한 구녕(구멍)을 뚤버서(뚫어서)
거기다 눈까리(눈알)를 들이대고,
저 앞에 있는 사람을 존주어서(겨누어서) 들이 쏘며는,
거기에 한번 걷어들리면(걸리면)
대뜨번에(대번에) 쎄싸리가 빠지쟌소(죽지 않소).
그 총알이란게 날아가지고
대가빠리(머리)에 맞으면 뇌진탕으로 즉사고요,
눈까리(눈알) 들어 걸리면 눈까리가 다 박살나고,
배떼기(배)에 맞으면
창지(창자)가 마카(모두) 게나와가지고(쏟아져나와서)
대뜨번에(대번에) 쎄싸리가 빠져요(죽어요).
그리고 자들이 떼가리(무리)로 대뜨번에(대번에) 덤비기 때문에,
만명, 2만, 5만 갖다가는 택도 안돼요(어림도 없어요).
10만이래야(10만정도는 되어야) 되요.
이거이 분명히 얘기하는데 내 말을 똑떼기(똑바로) 들어야 될 끼래요(될 꺼예요).
그리고 자들이요, 움메나(얼마나) 영악스러운지요,
순순히 이래가지고는 되지 않아요.
우리도 더 빡시게 나가고, 대포도 잘 맹글고, 훈련을 잘 시켜서 이래야지 되지
안그러면 우리가 잡아 먹혀요."

 

□ 이율곡 태몽꿈 이야기
 
문헌상으로 전해오는 꿈이야기 보다는 신빙성이 뒤떨어지지만 태몽꿈
에 관한 기이한 꿈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문헌에 나오는 꿈을 살펴보자. 이율곡 공은 申命和(신명화)의
외손이다. 강릉에서 났는데 탄생하던 신(申) 부인의 꿈에 흑룡이 바다
로부터 솟아 올라와 그 침실로 날아들어 왔었기 때문에 어릴 때의 이
름을 見龍(견룡)이라 하였다.---연려실기술, 권 68.

구비전승되어 오는 태몽꿈은 각기 다른 이야기로 나타나고 있다.

 

① < 사임당 신씨의 태몽>
이율곡(李栗谷)선생의 어머니 사임당 신(申)씨가 강원도 북평에 있
을때 꾼 꿈이다. 하루는 동해 바닷가에 가니 왠 선녀가 바다에서 살
결이 흰 옥동자를 안고 나와서 안겨주고 사라졌다 이 꿈을 꾼지 얼마
후에 아들 이이(李珥)를 낳았다고 한다.

 

② < 사임당 신씨의 태몽>
<검은 용이 큰 바다에서 침실로 들어와 서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꿈은 사임당(師任堂) 신(申)씨가 율곡 선생을 낳기 바로 전날 꾼
꿈이다. 자고로 위대한 인물이 태어남에 있어서는 그 부모의 위대함이
앞섰고 또 태몽은 그 태어날 아기의 일생이 먼저 예지(豫知)되는 꿈이
라 할 수 있다.

 

③ <율곡 아버지의 태몽이야기>
율곡선생의 부친이 서울에 있었어. 집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주막에서
하룻밤 쉬어가려고 찾아들었어. 한데 술을 내오며 대접을 하면서 은근
히 유혹하며 통정을 하자는 여인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어.
부인이 꿈 이야기를 하는데 "흑운이 일어나더니 청룡?황룡이 여의주
를 두고 싸우는 구경을 하는데, 여의주를 문 청룡이 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어요" 그래 아내와 같이 자고서 율곡선생을 낳았어.

서울 올라가는 길에 그 집에 다시 들러서 여인과 통정을 하고자 했
으나, 여인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저번에 당신이 오시던 전날 밤 꿈에
청룡이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서 귀한 아들을 얻고자 선비님을 맞이하
려고 했는데 이제 사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면서 거절을 하는거
야.------구비문학대계 1-5.528쪽.

 


     

□이율곡 : 천도(天道)책 과거 시험문제 
 
천도(天道)는 알기도 어렵고 도한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라.
일월(日月)이 하늘에 빛나니 한번은 낮이 되고 한번은 밤이 되니 그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그 일월이 함께 나와 일식과 월식이 있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오성은 경經이되고 여러 별들은 위緯가 되는 것을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상서로운 별은 어느때보이고 상서롭지 못한 별은 어느 때에 보이는 것인가?
혹 가로되 [만물의 정기가 올라가면 별이 된다]하니 이 말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람은 일어날 때 어느 곳에서 시작하여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가?
어떤 때 부는 바람은 나무를 울리지 않으나 언제 부는 바람은 나뭇가지를 꺾고 집을 쓰러뜨리며 잔잔한 바람도 되고 폭풍도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구름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며 흩어져 오색이 되는 것은 무엇에 감응된 것이며 혹은 연기와도 같고 아닌 것  같으며 뭉게뭉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안개는 무슨 기운으로 발생한 것이며 붉은색이나 푸른색이 되는 것은 무슨 징조이며 혹은 노란 안개가 사방을 막고 큰 안개가 날을 어둡게 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우뢰와 벼락은 누가 만든 것이며 그 빛이 번쩍거리고 환한 것은 왜 그런 것인가?
간혹 사람이나 만물이 벼락을 맞는 것은 어떤 이치인가?
서리는 풀을 죽이고 이슬은 만물을 적시는데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는 이치는 무엇인가?
남월은 따뜻한 지방으로 6 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혹독한 괴변인데 이를 상세히 말할 수 있는가?
비는 구름을 따라서 내리는데 간혹 구름만 자욱하고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농씨(神農氏) 때에는 비가오기를 원하면 비가 오는 태평한 때이라, 36차례의 비가 있었으니 천도에도 또한 사私적인 후厚가 있는가?.
간혹 군사를 일으킬 때 비가 오고 옥사를 판결할 때 비가 오는 까닭은?
초목의 꽃은 다섯 잎이 많은데 눈꽃은 여섯 잎이 되는 이유는?
눈 위에 눕고 눈 위에 서고 영빈과 방우의 일을 다 말할 수 있는가?
우박은 서리도 아니요 눈도 아닌데 무슨 기운으로 모인 것인가. 어떤 것은 말의 머리만큼 크고 어떤 것은 달걀 만하여 사람과 새나 짐승을 죽게 한 것은 어느 때의 일인가?
천지의 만상은 각각 그 기운이 있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한 기운이 흩어져서 만상이 된것인가?
혹시 상常도道에 반反하는 것은 천기가 어그러지기 때문인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어찌하면 일월이 일식월식을 아니하고 별이 제자리를 잃지 않으며 우뢰와 벼락을 치지 않으며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으며 눈이 많이 내리지 않으며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않으며 모진바람과 굳은 비가 없고 각각 그 질서에 순응하고 마침내 천기가 안정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은 그 도가 어떤 것에 말미암는가?
여러 선비들은 널리 경사에 통하여 능히 이런 것을 말할 자가 있으리니 각각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이는 9 도 장원공인 율곡 선생의 23 세 때의 과거 시험문제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시험문제가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율곡선생의 답 글은 당시의 학계를 놀라게 하였고 청년 율곡의 지고한 학문의 깊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② 이율곡 : 천도책 답론 요약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그 이치는 지극히 미묘하고 그 형상은 지극히 드러나는 바 이를 아는 이와 천도를 논할 수 있다.

만화의 근본은 오로지 음양 뿐이라.
이러한 기氣가 동정을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이理라.

대개 형상이 천지 안에 있는 것은 오행의 바른 기가 모인 것도 있고 천지의 괴이한 기를 받은 것도 있다.
음양이 부딪치는 데서 생겨나기도 하고 음양이 발산하는데서 생겨 나기도 한다.
풍운과 뇌전은 이 기氣가 아닌 것이 없다.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라!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

태초가 갈라져 해와 달이 교대하여 밝으니 해는 태양의 정이 되고 달은 태음의 정이 된다.

일식 월식의 재난은 덕을 닦는 치세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대개 혼란한 때에 나타나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이 푸른 것은 기가 쌓인 것이지 정색은 아니다.
상서로운 별은 우순 같은 밝은 세상에 나타나고 춘추 같은 시대는 혜성 같은 불길한 별이 나타났다.
하늘의 별은 오행의 정이요 자연의 기氣라.

음기가 엉기고 모여 밖의 양기가 들어가지 못하면 돌아서 바람이 된다.
바람이 흔들 살랑 하는 것은 기가 부딪치면 일어나고 기가 쉬면 그치는 것이라

대개 좋고 나쁜 기운은 그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조짐이 있다. 구름이 희면 흩어지는 백성이 있고 구름이 푸르면 곡식을 해치는 벌레가 있으며 검은 구름은 수해의 조짐이며 붉은 구름은 전쟁의 징조가 되지 않으리오.

양기가 발산한 후에 음기가 양을 싸서 양을 나가지 못하게 하면 분격하여 우뢰와 번개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본래 사기邪氣가 모인 인간이 있듯이 만물도 삿된 기가 붙은 것이 있다. 옛 선비가 이르길 우뢰와 번개는 음양의 정기라 혹은 숨은 벌레를 달아나게 하고 혹은 간사한 것을 물리친다 하였다.
공자도 심한 천둥에는 반드시 얼굴빛을 변한 것이라. 도의심이 없는 군주에게는 하늘이 벼락을 때리기도 하였다

남월의 따뜻한 곳의 6월에 서리가 내린 것은 정치지도자의 음기에 걸려있는 것이라.

비와 이슬은 다 구름에서 나오는데 택기澤氣가 왕성한 것은 비가 되고 택기가 적은 것은 이슬이 된다. 음양이 서로 섞이면 비가 되고 상하가 사귀지 못하면 비가 되지 못하고 구름만 자욱하다.

성聖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천지가 화합하여 5일에 한번씩 바람이 불고 10일에 한번씩 비가왔다.

대개 원기寃氣는 가뭄을 부르는 것이라. 한 여자가 원한을 품어도 오히려 적지赤地를 이루는 것인 바 무왕이 은나라를 이김으로 천하의 원기를 해소하였고 안진경이 옥사를 판결하여 한 지방의 원기를 녹여 단비가 내리게 된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寃=? 원통할 원

초목의 꽃은 양기를 받았으므로 5잎의 양수이고 눈꽃은 음기를 받아 6잎이 된 것이라. 이는 자연의 이치라.

한 기운이 운화하여 흩어져 만가지로 다르니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상 이 각기 한 가지의 기운이요, 합하여 말하면 천지 만상이 한가지의 기운이다.

벼락과 번개는 2기가 서로 부닥치는데서 나오고 바람 구름 비 이슬은 음양의 2기가 서로 합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면 천지의 기운이 바르다하니 천지의 位와 만물의 안정은 한사람의 덕을 닦는데 매어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자경문은
율곡선생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와, 앞으로 걸어나갈 인생의 이정표를 정립하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워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어 좌우명을 삼았다.

이것은 율곡의 일생에서 커다란 삶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의 사상은 그 이후에 다방면으로 전개되며 더욱 깊고 정밀해졌으나 가장 골자가 되는 기초는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이 자경문은 11조항으로 되어있다.

 

1. 입지(立志)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2.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 때가 된 뒤에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3. 정심(定心)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그런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정력(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힘)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과 같다.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없어졌다가
  하여 나로 말미암지 않는 것같은 것이 마음이다. 가령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질러 있으니, 이것 또한 망녕된 잡념이다.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하여 집착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지 그 생각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일을 할 때에 전일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이다.

4. 근독(謹獨)=신독사상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5.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똑히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6.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7.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에, 만약 해야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8.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9. 감화(感化)=감이수통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해야
  한다.
  한 집안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10.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 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11.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해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自警文(자경문) 원문

1.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칙오사미료

2.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시연후언 칙언불득불간

3.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구방지심 일조수지 득력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칙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욕절지 칙유각분요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염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당어분요시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4.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상이계구근독의사 존제흉중 염념불태 칙일절사념 자연불기

   萬惡 皆從不謹獨生
   만악 개종불근독생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5.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칙방하 유사즉필사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칙위무용지학

6.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칙차역이심야
  우가성찰

7.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칙일절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8.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辜 허물고
9.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10.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비야면급질병 칙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칙불와
  단불가구박 주유수사 당환성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11.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칙차역이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변비인자

 

이율곡 ''동거계사''한글 필사본 발견


 
 
 
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율곡(1536~1584)이 지은 ‘동거계사(同居戒辭)’의 한글 필사본(사진)이 새로 발견됐다.

이 필사본은 선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수진(29?여)씨가 최근 대학 연구소에서 자료를 조사하다 찾은 것으로, 지금까지는 1976년 발견돼 월간지 ‘한국문학’ 제28호에 소개된 필사본이 유일한 한글본으로 알려졌다.

11일 이씨의 지도교수인 구사회 교수에 따르면, ‘뉼곡니션“ 동거겨훈’(동거계사)이라는 6쪽 분량의 이번 필사본은 표기법 등으로 미루어 1976년 발견본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는 데다 내용도 우암 송시열의 한문번역본과 거의 일치해 사료 가치가 주목된다. 이씨는 “고서를 정리하다가 난해한 필체로 적힌 한글본이 있어 확인작업을 거쳐 뒤늦게 ‘동거계사’임을 알게 됐다”며 “경남 하동에서 노론계로 보이는 인물이 필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율곡이 42세 때 황해도 해주에서 한글로 지은 ‘동거계사’는 우암 송시열의 한문번역본이 우암 문집인 ‘송자대전’과 율곡 문집인 ‘율곡전서’에 전해질 뿐 원본이 전해지지 않은 가정 화목 지침서다. 모두 7개 조목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정성으로 제사를 모시고
▲홀로 된 형수를 일가의 으뜸으로 받들고
▲사사로운 재물을 두지 말고
▲아내와 소실을 모두 지극하게 대하며
▲웃어른을 공손히 섬기고
▲삼촌과 사촌을 어버이와 친형제의 예로 사랑하며
▲일가가 모두 회동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율곡은 당시 해주 석담(石潭)에 청계당을 짓고 형수와 조카들, 그리고 서모(庶母)와 함께 모여 살았는데 ‘동거계사’로 가족의 화목을 도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에 발견된 서책 속에는 삼강오륜의 행실을 본받자는 가사작품인 ‘효행가(孝行歌)’와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조선후기 유학자 우암이 시집간 딸에게 부녀자가 행해야 할 도리를 적어준 ‘계녀서(戒女書)’ 필사본도 들어 있어 관심을 더한다.

서지학자 김규선씨는 “원본과 진배 없는 율곡의 ‘동거계사’가 나왔다는 사실도 반가운 일이거니와, 앞뒤로 작가미상의 효행가와 우암의 계녀서가 묶여져 있다는 자체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 구사(九思)

구사(九思)라는 말은 군자가 지켜야할 아홉 가지의 생각 즉
①볼 때는 분명히 판별할 것을 생각하고,
②들을 때는 총명한 판단을 생각하고,
③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④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⑤ 말을 할 때는 충성스러운 말인지 생각하고
⑥ 일할 때는 신중하고 성실할 것을 생각하고,
⑦ 의심나는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하고,
⑧화가 날 때는 잘못되어 걱정을 부모에게 끼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⑨ 이득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한다.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事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는 아홉 가지를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먼저 보고 듣는 일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같은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르게 보고 듣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다면 다른 생각 다르게 판단하는 일이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장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렇게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얼굴의 색과 용모를 온화하고 공손하게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부드러운 얼굴, 사랑이 넘치는 얼굴을 가지고,  공손하고 바른 용모로 사람을 대한 다면 더 이상 남에게 의심을 받거나 미움을 받는 그런 일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온화하고 믿음이 가는 얼굴로 바르고 공손하게 사람을 대하는 사람에게 누가 비웃음을 보낼 수 있으며, 의심하거나 미워할 수 있을까 ?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믿음을 받고, 모두 신임하여 언제 어디에서라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자신이 행동을 할 때 조심할 일들로 우선 말을 할 때는 충성스러운 말인지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나라의 일군이 될 수 없고,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일할 때는 신중하고 성실할 것을 생각하라 신다.  일을 할 때 대강대강 하거나 건성으로 해서 실패를 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차근차근 처리해가면서 자기의 열과 성을 다하여 한다면 만약 약간의 잘 못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잘하려다가 한 실수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신중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한 사람이 실패를 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세번째로 의심나는 일은 반드시 물을 것을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 모르면서 자기가 아는 척 하거나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일은 일을 그르치는 길이다. 반드시 물어서 확인을 하고, 그렇게 하여 일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행동의 네 번째는 화가 났을 때라도 내가 화를 내므로 해서 이 일이 잘못되어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조심을 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일을 효도의 길이 아니다. 효의 가장 첫 걸음이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조심할 행동의 마지막 조항으로 이로운 일을 보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조그만 이로움을 쫓다가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내거나 불명예를 겪는 일들이 너무나도 흔하다. 요즘에는 정치권에서 고위직일수록 그런 유혹을 많이 받는 것인지 항상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생기는 일을 보면 반드시 이것이 바른 것이며, 남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을 것인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순간의 잘 못 때문에 수십 년을 쌓아온 자신의 명예와 이름에 먹칠을 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만 같다.

 


   장입산내우우(將入內山遇雨)
 


解綬歸來萬事輕   해수귀래만사경
벼슬 버리고 돌아오니 뭇 일이 홀가분하여

五臺奇勝最關情   오대기승최관정
오대산 절경에 정이 가장 쏠리네.

山靈灑雨非嫌客   산령쇄우비혐객
산신령이 뿌린 비 나그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添却林泉分外淸   첨각임천분외청
숲 속의 샘물 보태어 더욱 맑게 하려한다네.

 


[송구봉]이순신장군과 이율곡선생과 만나 나라의 장래에 대비하다 
동쪽 하늘의 두 별

지금으로부터 삼백년 하고도 십여년 전, 조선 14대 선조대왕 시절의 이야기예요. 소년장사 김덕령이 한참 씨름판을 휩쓸던 무렵쯤이나 될까요.
그때 한양에는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 선생이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어요. 이율곡은 학문은 물론이고, 별자리를 보는 눈이 남달랐어요.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세상일을 두루 헤아리곤 했지요.
하늘의 별 가운데는 율곡의 별도 있었어요. 동쪽 하늘 복판에 떠서 북두칠성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었지요.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동쪽 하늘 외진 곳에 숨어서 홀로 그윽하게 빛나는 별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율곡은 그 별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저 별도 조선의 인물이 분명한데, 그 임자가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선 천지의 이름난 사람 가운데 그 별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었어요.
'숨어 살고 있는 인재가 분명해. 내가 한번 찾아봐야겠어.'
율곡은 벼르던 끝에 어느 날 그 별의 임자를 찾아 여행을 떠났어요. 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시골 선비처럼 조촐히 차려입은 채로 하인도 없이 말을 타고서 길을 나섰습니다.
율곡은 별이 방향을 따라서 정처없이 움직였어요. 밤마다 별을 보면서 나아갈 방향을 가늠했지요. 그러기를 여러 날, 율곡은 별빛을 보면서 자신이 찾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별의 임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어요.
주막집에서 하루를 묵은 이율곡은 여느 날처럼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어요. 아직 동이 터오르기 전이라서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요.
율곡이 터덜터덜 말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소를 타고 오는 게 보였어요. 허름한 베옷에 삿갓을 쓴 모습이 영락없이 촌사람의 행색이었지요.
'나만큼이나 부지런한 사람이 또 있군.'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을 때, 무심코 그 사람을 바라본 율곡은 흠칫했어요. 삿갓 아래에서 무언가 이상한 빛을 본 것 같았어요. 율곡은 말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요.
"저 잠깐 말씀을…"
그러자 그 사람이 소를 멈추고 삿갓을 들어 율곡을 바라보았어요.
'아니 이런!'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사람 눈에서 빛이 나오는데 마치 화살이 몸에 와 닿는 것 같았어요. 몸가짐이 무겁기로 소문난 율곡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칫했지요. 보통사람 같았으면 말에서 툭 떨어졌을 거예요.
율곡은 한눈에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 탄 사람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실례합니다. 저는 누군가 하면…"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소 탄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어요.
"허허, 율곡선생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마중 나오는 길이올시다."
"아니 어떻게 그걸!"
"자, 다른 얘기는 뒤에 하고 우리 집으로 가시지요."
그 사람은 태연히 소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향했습니다.

율곡이 소 탄 사람을 따라서 당도한 곳은 산 속에 있는 외딴 초가집이었어요. 기둥을 툭 치면 폭삭 가라앉을 것 같은 초라한 집이었지요.
방안에 둘이 마주앉자 율곡이 서둘러 입을 열었어요.
"제가 둔해서 선생을 이제서야 뵙게 되었습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
"선생이라니요. 보잘것없는 촌사람인 걸요. 저는 송구봉이라고 합니다."
'송구봉, 송구봉……'
언제 들어본 듯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한 낯선 이름이었어요.
"이렇게 산 속에서 사는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허허, 뭐 사연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번잡한 세상이 싫어서 강산을 벗삼아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물론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이율곡이 아니었지요. 율곡은 한번 그 사람을 떠볼 겸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참으로 태평하게 사시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세상이 태평하다고들 합니다만……."
"태평해 보일수록 위급한 법이지요."
그 말에 율곡이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제 뜻과 같습니다. 나라가 태평할수록 위급한 일을 대비해야 하는 법인데 조정에서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머지 않아 바다 건너 왜구가 쳐들어올텐데 말입니다."
그 말에 율곡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저도 그 비슷한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만…."
"허허, 그러시겠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걸 모를 지경이었어요. 아침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밖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지요. 그 동안 율곡의 가슴은 내내 쿵쿵 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뜻이 잘 맞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거든요.
두 사람은 서로 의기가 투합해서 아주 친해졌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허허, 저 또한 같은 마음이올시다."

 

 

 

초야에 묻힌 까닭

그 후로 이율곡과 송구봉은 틈틈이 만나서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주로 율곡이 틈을 내어 구봉을 찾아갔지요. 구봉과 만나고 돌아갈 때마다 율곡의 마음은 뿌듯하게 차올랐습니다.
거듭 만나다 보니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격식을 털어버리고 편안한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율곡이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구봉, 우리 이미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으니 서로 말을 트고 지내면 어떻겠소?"
그러자 송구봉이 너털웃음과 함께 말을 받았습니다.
"허허, 듣던 중 반가운 말일세그려."
"암, 좋은 일이고말고."
한바탕 웃음을 웃고 난 후, 율곡이 정색을 하고 구봉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렇게 친구가 된 이상 서로 뭘 숨기겠는가. 산 속에 들어와 사는 사연을 오늘은 좀 말해주게나."
"그래. 친구 사이에 숨길 일이 뭐 있겠는가."
송구봉은 옛일을 생각하는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몸이야. 비천한 종의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일세."
송구봉의 할아버지는 어엿한 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질 못했어요. 그는 할아버지가 첩으로 삼은 몸종의 소생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첩의 자손을 '서얼'이라고 해서 크게 차별했어요. 서얼은 벼슬을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어요. 종이 주인을 부르듯이 '대감마님'이라고 불러야 했지요. 송구봉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 아들인 송구봉이 바로 그런 신세였답니다.
어린 시절에 송구봉은 아주 영특한 아이였어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정도였지요. 특히 구봉의 준빛은 유난히 눈빛이 밝고 강해서 어른들도 눈을 마주치면 외면할 정도였습니다.
구봉의 아버지는 글을 가르쳐봐야 쓸모가 없는 줄 면서도 아들의 고집에 못 이겨 구봉을 서당에 보냈습니다. 양반 도령들 사이에 끼어든 구봉은 단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지요. 서당 훈장조차도 그의 송곳 같은 질문에 쩔쩔맬 정도였어요.
그런데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은 구봉과 어울리기를 꺼려했어요. 뻔히 보고도 못본 척 딴전을 피우기 일쑤였지요. 한동안은 등 뒤에서 소근소근 손가락질을 하더니, 점차 드러내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송구봉이 참다못해 눈을 부릅뜨고 도령들에게 소리쳤어요.
"이 녀석들, 왜 이렇게 나를 따돌리는 거냐?"
그러자 도령 가운데 하나가 내뱉듯이 말했어요.
"더러운 종놈의 자식이 감히 큰소리야!"
그 말에 구봉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 동안 자신이 따돌림을 당한 이유를 환히 깨달았지요. 그는 눈에 불이 일어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구봉은 그 도령의 멱살을 잡아서 마당에 패대기쳤어요. 도령은 개구리처럼 나자빠져서 한참 동안 옴짝달싹 못했습니다.
구봉은 훈장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을 말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훈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으로 뜻밖이었어요.
"쯧, 천한 녀석이 끝내 말썽이군. 서당에 와서 공부하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분수도 모르고 이게 웬 행패란 말이냐!"
그 말에 구봉은 아까보다 더 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 동안 존경심을 가지고 지성껏 모셔온 스승이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다니요!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눈물만 떨구던 소년 송구봉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서당을 떠나갔습니다.
송구봉은 그날로 부모님과 하직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어요. 미친 사람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지요.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오두막에 자리를 잡고 눌러앉은 것이었어요.
이야기를 끝낸 송구봉은 이율곡을 건너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어때, 내 근본을 알고 보니 친구로 지내기로 한 게 후회되지 않는가?"
율곡이 얼른 손사래를 쳤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저 내가 양반이란 게 부끄러울 따름이네. 도대체 양반이 무어고 종은 또 무어란 말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야."
율곡은 구봉의 손을 잡고서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두고 보게. 내가 꼭 자네를 출세시키겠어."
"허허, 공연한 생각 말게. 자네만 욕을 볼 뿐이야."

율곡의 아들은 쌀장수?

율곡이 구봉과 왕래를 한 지 서너 달쯤 됐을 때였어요. 율곡이 미천한 사람과 사귀는 것을 눈치챈 아들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처럼 귀하신 분이 어찌 천한 사람과 어울리십니까?"
"모르는 소리! 구봉 선생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분이시다."
"아버님, 남이 알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입니까?"
"남의 이목이 그리 두렵더란 말이냐. 긴 얘기 할 것 없이 구봉 선생을 한번 만나보거라. 아마 내일 우리집을 찾으실 게다."
그 말을 들은 율곡의 아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구봉이 찾아오면 망신을 줘서 아버지와 못 만나게 해야겠다고 별렀지요.
다음날 율곡은 자리를 비키고 아들이 사랑방을 지키고 있는데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어요.
"이리 오너라. 아무도 없느냐?"
종이 대문을 열자 손님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소리쳤습니다.
"율곡. 나 구봉일세."
그러자 율곡의 아들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 먹고서
"뉘시라구요?" 하면서 방문을 훌쩍 열어젖혔어요.
아뿔싸! 송구봉을 보는 순간 율곡의 아들은 그만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당당한 풍모에 휘황한 눈빛. 그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가 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율곡은 안에 계신가?"
"잠깐 밖에 나가셨습니다. 올라가서 기다리시지요."
그러자 구봉이 율곡의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서 엉뚱한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 요즘 쌀값이 한 섬에 얼마나 가는고?"
"글쎄요. 잘 모르는 일입니다만…"
"알았네."
송구봉은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날 구봉이 율곡과 담소를 나누고 돌아간 뒤, 율곡이 아들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구봉 선생을 만나 보니 어떻더냐?"
"그런 분은 처음 봤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버선발로 땅에 내려가 절을 했습니다."
"그랬을 테지. 그래, 달리 묻는 말씀이 없더냐?"
"무슨 까닭인지, 쌀값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그건 네 인품이 쌀장수 할 만큼밖에 안 된다는 뜻이야. 앞으로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할게다."
그 말에 율곡의 아들은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습니다. 좁은 소견을 고치겠다고 다짐했음은 물론이지요.

축지법을 쓰는 소

율곡은 구봉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록 학문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대화만 나눌 게 아니라, 우리 생각을 책으로 엮으면 어떻겠는가?"
"흠, 뜻이야 좋지만 어디 쓸 곳이 있겠나?"
"남이 알아주는 거야 상관할 바 아니지."
"허허,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두 사람은 자기 생각을 글로 써온 다음 서로 바꾸어 보면서 글을 다듬었어요. 두 사람의 글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인 양, 뜻이 잘 맞았지요. 특히 율곡이 보기에 구봉의 글에는 글자 하나 고칠 게 없었습니다. 구봉은 가끔 율곡의 글에서 고칠 곳을 짚어주었는데, 다시 보면 과연 그 말이 맞았습니다. 그때마다 율곡은 구봉의 깊은 식견에 탄복했습니다.
하루는 서로 글을 바꾸어 읽는데, 구봉이 유난히 여러 곳을 지적하면서 말했어요.
"허허, 이거 당대의 대학자가 우리 집 소보다 둔하지 않은가!"
그러자 머쓱해진 율곡이 약간 성을 냈어요.
"이거 말이 좀 심하군. 나를 소한테 비기다니 말이야."
"그랬는가? 내가 잘못했네 그려."
두 사람은 마주보며 껄껄껄 웃었습니다.
그 날 구봉은 정색을 하면서 율곡에게 말했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네. 편지를 전할 곳이 있는데 자네가 대신 수고해주게나.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일세."
율곡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지. 어디 사는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인가?"
"저 소를 타고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구봉은 마당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소를 가리켰습니다.
"아직 소는 타 본 적이 없는걸."
"아마 자네 말보다 나을 걸세. 그건 그렇고, 길에서 이상한 젊은이를 하나 만나게 될 거야. 그 사람을 꼭 데리고 가도록 하게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지만, 구봉을 믿는 율곡은 더 묻지 않았어요. 편지를 소매에 넣고 소에 올라탔지요. 처음엔 영 마뜩하지 않았는데, 타고 보니 정말로 편안하기가 말보다 나았어요. 게다가 소가 느릿느릿 걷는데도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앞으로 쭉쭉 나아가지 않겠어요. 십 리, 이십 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어요.
'어허, 이 소가 축지법을 쓰는군. 구봉이 나더러 소보다 둔하다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어.'

이상한 젊은이와 노인들

소는 강원도로 들어선 후 북쪽으로 길을 잡아 높고 아름다운 산에 이르렀어요. 수려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마다 파릇파릇 푸른 싹이 트고 봄꽃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어요.
'여기는 금강산이 아닌가!'
그래요. 구봉의 소가 찾아간 곳은 민족의 영산 금강산이었습니다.
소는 굽이굽이 골짜기를 따라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길이 좁고 험했지만 소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어요. 한참을 가던 소는 이번엔 벼랑길로 접어들었어요. 보기만 해도 눈이 아찔한 깎아지른 벼랑이었지요. 길이 아주 좁고 험해서 사람 한 명이 다니기도 힘든 곳이었어요. 그렇지만 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갔어요.
한참을 그렇게 가는데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깊은 산중에 웬 사람일꼬? 이 험한 길에 말을 타고 다니다니 신기한 일이야.'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 길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서로 마주치고 보니 참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길이 워낙 좁아서 서로 비켜갈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뒤돌아갈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소와 말도 서로 멀뚱멀뚱 바라맘 보았어요.
'어허, 이 일을 어쩐담?'
율곡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그 젊은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어요. 그는 말의 다리를 한 손에 두 개씩 모아 쥐더니 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서 한쪽으로 바짝 비켜섰습니다. 덕분에 율곡은 소를 탄 채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지요.
'참 이상한 젊은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얼마쯤 길을 가던 율곡은 속으로 '아차!' 했어요. 젊은이를 데리고 가라고 한 구봉의 말이 뒤늦게 떠오른 거예요.
얼른 뒤를 돌아보니 젊은이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어요. 율곡은 급히 손나팔을 만들어 젊은이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나 좀 잠깐 보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말을 멈추고는 아까처럼 말을 들어올려 방향을 바꾸었어요. 그리고는 벼랑길을 타고서 율곡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나하고 어디 좀 같이 가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율곡의 뒤를 따랐습니다. 아주 입이 무거운 젊은이였어요.
두 사람이 소와 말을 타고 험한 산길을 한참 올라타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쏴쏴쏴' 하고 들렸어요.
절벽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율곡은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지요. 한쪽에 폭포수가 은빛 물살을 휘날리며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양쪽 등성이에는 산철쭉 무리가 푸른 새싹들과 어울려 망울망울 꽃을 피워내고 있었어요. 폭포 옆쪽에 넓다란 바위가 멍석처럼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복숭아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워 분홍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 꽃 그림자 아래 너른 바위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넷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어요. 율곡과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그리로 다가갔지요. 하지만 노인들은 바둑 두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어요.
율곡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어요.
"문안 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한 노인이 돌아보면서 말을 던졌어요.
"그래, 속세 사람이 여기는 웬 일인고?"
율곡은 소매 속에서 구봉이 써준 편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어요. 노인은 편지를 읽고 나서 다른 노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문곡이 보낸 편지구먼."
그 말에 율곡은 비로소 구봉이 문곡성의 정기를 받은 인물임을 깨달았어요. 문곡성의 기운을 띠고 태어나면 큰 학자가 된다고 하지요.
다른 노인이 말했어요.
"그래, 문곡이 뭐라 적었는가?"
"장차 조선에 닥칠 왜란을 막아 달라는구먼."
그러자 노인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어요.
"그거야 하늘의 뜻인 걸 우리가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문곡의 부탁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에서 구봉이나 김덕령 같은 인재를 제대로 쓰면 몇 달 안에 전쟁이 끝나련만……."
"이러면 어떻겠나? 왜란을 15년에서 8년을 줄여준다면?"
"그게 좋겠군. 아무래도 7년의 전란은 피할 수 없어."
노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율곡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나라에 장차 왜란이 나서 7년이나 전쟁을 하게 된단 말인가.'
그때 다시 한 노인들이 말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시켜서 7년 만에 왜란을 끝내게 한단 말인가?"
고민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이 문득 말고삐를 붙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옳지! 저기 인재가 있구먼!"
노인들은 종이를 꺼내더니 머리를 맞댄 채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리 접고 저리 접기를 한참을 하더니 마침내 완성이 됐는지 젊은이를 불러서 주었어요.
"여보게 젊은이. 이걸 받게."
노인들이 만든 것은 물에 띄우는 배였어요. 그런데 그 모양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용처럼 생긴 머리가 앞쪽에 솟아 있고 거북등 모양의 배 지붕에는 송곳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어요. 배 옆구리에는 여러 개의 노가 삐쳐 나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거북선의 모형이었습니다.
지금 이 배를 받아든 젊은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래요. 그는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나자 거북선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말이에요.

 

 
 

 


임금 앞에 나아간 송구봉

율곡은 금강산에 다녀온 후 큰 시름에 잠겼어요. 하루 빨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율곡은 선조 임금에게 기나긴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송구봉의 높은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자세히 쓰고 나서 구봉에게 벼슬을 내려 큰 일을 맡겨야 한다고 호소했지요. 그 상소문을 읽고 감동한 선조는 송구봉을 불러들이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임금이 송구봉을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어요. 신분이 천한 사람을 조정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요. 구봉을 추천한 율곡에게도 공격이 쏟아졌지요. 하지만 선조 임금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송구봉은 임금을 만나기 위해 대궐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양쪽에 신하들이 늘어선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가 임금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임금님 계신 곳에 들어올 때부터 송구봉은 눈을 지긋이 내려감고서 뜨지를 않았습니다. 임금의 명으로 열굴을 들었을 때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지요.
신하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임금이 말했습니다.
"여봐라. 그대가 송구봉인고?"
"그렇습니다."
"한데 괴이한 일이로다. 어찌하여 눈을 감고 있단 말인고? 눈을 뜨고 이쪽을 보라."
그러자 송구봉이 말했어요.
"전하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옵니다."
"놀라다니. 어서 눈을 뜨거라."
그 말에 송구봉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습니다. 순간 그 눈빛이 얼마나 휘황찬란하던지 임금은 물론 신하들이 모두 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젖히면서 목을 움츠렸어요.
선조 임금은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고 송구봉에게 나라 형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송구봉이 말했습니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못된 벼슬아치들 때문에 임금의 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 건너 왜적이 조선을 넘보고 있습니다. 상감께서는 당파싸움을 뿌리뽑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임금의 덕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에 선조의 눈이 둥그래졌어요. 당파를 뿌리뽑으라는 말에는 신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요. 잠시 후 신하들이 앞다투어 송구봉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하, 저자가 지금 태평한 나라에 쓸데없는 풍파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 무엄한 자를 지금 당장 내쫓으십시오."
"전하, 내쫓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당장 옥에 가두고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때 선조 임금은 신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는 데 넌더리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송구봉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지요. 그러나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구봉을 벌하라고 하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율곡이 나서서 아뢰었습니다.
"전하, 송구봉의 말이 맞습니다. 당파를 누르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입을 모아 이율곡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소란은 도무지 끝이 없었지요. 임금은 그만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말았어요.
"다들 그만두시오. 내 오늘 일은 다 없었던 것으로 하리다."

율곡의 죽음과 임진왜란

송구봉에게 나라 일을 맡기려던 뜻은 물거품이 되자, 율곡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자 구봉이 말했습니다.
"이게 다 하늘의 운수인 걸 어쩌겠는가. 자네라도 나서서 힘쓰도록 하게나."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혼자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서…. 게다가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큰일은 큰일이로군."
이율곡은 그 뒤에도 틈만 나면 임금에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십만 명의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십만양병설'을 열성을 다해서 외쳤지요.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에 밀려 끝내 실현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이율곡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말을 남긴 채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율곡이 죽자 송구봉은 하늘을 향해 꺼이꺼이 통곡하고 나서 살던 집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일본은 수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지요. 임금과 신하들은 그제서야 이율곡과 송구봉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조선땅에 들어온 왜군은 조선의 인재들을 잡아죽이려고 눈이 벌갰어요. 그들은 송구봉이 제갈공명만큼이나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구봉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구봉이 나라 일을 맡으면 큰일이기 때문이었지요.
왜장은 칼을 잘 부리는 자객들을 모아놓고 조선 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송구봉을 찾아 없애라고 명령했어요. 명을 받은 자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그때 구봉은 금강산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소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게 일이었지요. 그날도 시름에 잠겨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양손에 칼을 든 사람 둘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왜장이 보낸 칼잡이였어요.
칼잡이들은 한꺼번에 몸을 날리며 구봉에게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당할 송구봉이 아니었지요. 재빨리 칼을 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양손으로 두 칼잡이의 가슴을 잡아서 멀리 내던졌어요. 칼잡이들은 저만큼 나가떨어져 버렸습니다.
왜적은 송구봉을 없애는 데 실패했지만, 염려했던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다 끝나도록 구봉에게는 나라 일이 맡겨지지 않았지요. 김덕령 같은 영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조정에서 송구봉을 불러들일 리 있겠어요.
그러는 사이에 이 나라는 왜적에게 짓밟혀서 온통 쑥밭이 되고 말았어요. 백성들이 스스로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섰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요. 그러기를 장장 7년, 거북선을 거느린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서 비로소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혼쭐난 이여송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조선 땅에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병이 들어왔습니다. 명나라 군사는 왜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나쁜 짓도 많이 했어요.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잡아가기도 했지요.
왜란이 끝나갈 무렵,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아주 음흉한 계략을 품고 있었어요. 조선의 수려한 강산과 기름진 땅을 보고는 이번 기회에 조선 땅을 차지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마침내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이여송과 명나라 군대를 위해 평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여송은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조선의 신하들이 따라주는 술을 들이켰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한껏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이제 곧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때였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펼쳐지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웬 소년이 소를 탄 채 성큼성큼 들어왔어요. 소년은 눈이 휘둥그래진 군사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대청마루를 향하여 카랑카랑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스승께서 보고자 하시니 이여송 장군은 속히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과 함께 소년은 유유히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섰어요. 명나라 군사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요. 대청마루에 있던 조정 신하들은 하도 기가 막혀 실실 헛웃음을 흘렸습니다.
"허허, 맹랑한 놈이로고. 이거 재미있는 놀잇감이 생겼군. 내가 한손으로 잡아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주지."
그 말과 함께 이여송은 훌쩍 말에 올라 소년의 뒤를 쫓기 시작했어요. 수백명의 호위병이 그 뒤를 따랐지요.
이여송은 한달음에 소년을 잡으려고 채찍을 휘둘렀어요. 말은 비호처럼 달려나갔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분명히 소년이 탄 소가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잡힐 듯 잡힐 듯 영 잡히지를 않는 것이었어요. 이제 따라잡았다 싶으면 또 몇 발자국 앞에 나가 있었지요.
그 이상한 경주는 한나절이나 계속됐어요. 수백리 길이 훌쩍 지나갔지요. 소년은 수려한 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이르러서야 소를 멈췄어요. 명나라 군사들이 집을 에워쌌습니다.
소년은 방을 향하여 말했어요.
"스승님, 이여송 장군을 모셔 왔습니다."
그러자 방문은 열리지 않고 말소리만 들려왔어요.
"수고했다. 방으로 모시거라."
소년은 막 말에서 내려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여송에게 짧게 말했어요.
"들어가시지요."
이여송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세 사람이 들어앉으면 꽉 찰 것 같은 비좁은 방이었어요.
방안에는 한 노인이 앉아있다가 나직하고 위엄 있는 소리로 이여송을 맞이했습니다.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거기 앉으시오."
노인은 밖에 있는 소년에게 다른 군사들을 모두 방으로 들이라고 말했어요. 그 좁은 방에 수백명의 군사를 들이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들어와 앉으면 그 옆에 새로 자리가 생겨났어요. 그렇게 해서 수백명 군사가 모두 방안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자, 그 동안 조선을 위해 싸우느라 수고했소이다. 한잔씩 드시구려."
노인은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이여송의 잔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술을 한 잔씩 돌리는데, 아무리 따라도 술은 줄지를 않았어요. 이여송과 군사들은 하도 신기해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지요.
술이 다 돌고 나자 노인이 묵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딴마음일랑 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
그 말과 함께 노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이여송을 쏘아보았습니다. 노인의 눈에서는 번개와도 같고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어요. 이여송은 그만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습니다.
이여송은 자기 마음을 훤히 꿰뚫는 이 노인한테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어요. 자기도 모르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치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어요.
'아이쿠. 조선을 넘보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구나.'
결국 이여송은 조선 땅을 차지하려던 계획을 버린 채 군사들을 이끌고서 중국으로 되돌아갔답니다. 노인이 아니었으면 또 한번 큰일이 터질 뻔했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예요.
이여송을 꼼짝 못하게 한 그 노인이 누군지는 벌써 눈치챘겠지요? 그래요. 금강산에 숨어살고 있던 송구봉이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 사람 가운데 송구봉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신선이 돼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만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지요
 

 

보장지(步藏之)와 좌장지(坐藏之)


기생방 출입이나 하고 천하 난봉꾼으로 장안에 소문난 이항복이가
어머니 최씨의 꾸짖음으로 마음 바로잡고
이율곡 선생문하에 찾아가서 율곡 선생님과의 첫 대면 얘기입니다

"소생 이항복이라 하옵니다
비록 지난날 학문을 도외시하고 못된 일만을 일삼다가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라도 고명하신 선생님의 밑에서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옵니다.
부디 저를 너그럽게 받아 주신다면 소생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이항복이라 했는가?"
"예"
"자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있네. 난봉 부리기로 유명하다 들었네 허허"
"송구하옵니다"

"난 그저 자네보다 나이가 많을 뿐, 덕이 깊지 않고 아는 것도 많지 않네.
허나 자네가 묻는 것이 있으면 성심 성의껏 답해 줄 터이니
어려워하지 말고 친숙하게 대하게"

율곡선생님이 한양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천하의 난봉꾼 이항복을 받아들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한마디씩 하느라
좌중은 곧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그러자 이항복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율곡에게 말했다.
"하오면 선생님, 처음 뵙는 자리에서
무례하다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소생이 여태껏 풀지 못하고 품어 온 의문이 하나 있기에
감히 여쭤 보려고 합니다"

"말해 보게, 내 아는 데까지 대답해 주겠네"
"이제껏 제가 기방을 드나들면서 늘 품어온 의문이 한 가지 있사옵니다.
사람의 생식기를 일러
남자아이의 그것은 "자지"라 하고,
여자아이의 그것은 "보지"라고 하다가,
어른이 되면 각각의 명칭이
남자는 "좆", 여자는 "씹"으로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온지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소생은 아둔하여 알 수가 없으니 선생님께서 명쾌히 가르쳐 주십시오"

이항복이 대학자 앞에서 이렇듯 당돌하고도 해괴한 질문을 하자
거기 모인 문하생들은 눈이 둥그래지며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율곡 선생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니, 자넨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기방을 드나들었단 말인가.

잘 듣게. 우선 여자의 ''보지''는 "걸어다녀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보장지(步藏之)라는 말이 잘못 발음된 것이요,

남자의 ''자지''는 ''앉아야 감추어진다''는 뜻의 좌장지(坐藏之)를 잘못 발음한 것일세.

또 한 ''좆''과 ''씹''은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를 조(燥)''와  '' 습할 습(濕)''을 뜻하는 것일세.

또 남자의 그것을 "자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 즉 자식을 낳는 나무요 또 가지를 치는 것이라 하여
아들子 가지 枝 자를 써서 "子枝"라 이르고,

여자의 그것은 자식을 담아 기르는 보배스런 못이라고 하여
보배 寶자 못 지池 자를 써서 "寶池"라고도 한다네.
이제 알겠는가?"

하하하...

 
□ 반드시 한 가지 책을 익히 읽어서 그 안의 참된 이치와 뜻을 모두 깨달아 모두 통달하고 의심이 없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을 일이다. 여러 가지 책을 탐내어 이것저것을 얻으려고 분주히 섭렵해서는 안 된다.

- 이율곡

 


□어머니 신사임당의 가르침으로 남다른 우애를 가졌던 율곡 이이

 

아이가 둘 이상인 집의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들 싸움 말리느라 하루가 다 갔다고 해요  하루종일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는 통에 힘이 든다는 것이지요  신사임당은 7남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애라고 가르쳤대요 신사임당이 아이들을 눕혀놓고 늘 해준 이야기도 우애에 관한 옛날 이야기라고 해요.

“ 옛날에 농사를 짓는 두 형제가 살았단다. 그런데 추수 때가 되자 형은 ‘동생은 새살림을 났으니 나보다 어렵겠지’ 라고 생각하고 아우는 ‘나야 식구가 적어서 괜찮지만 형은 아이들”자가 추수한 볏섬을 날랐단다. 형은 아우의 집으로 아우는 형의 집으로 말이야. 그러다 며칠이 지나도 볏섬이 줄지 않자 형제는 각자 이상하게 생각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밤, 열심히 볏섬을 나르다가 드디어  형과 아우가 마주치게 되었단다. 그리고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서 울었단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신사임당의 7남매는 우애가 남다르기로 이름이 높았다고 해요. 훗날 율곡은 “형제는 부모의 유체를 한가지로 받아 나온 일신과 같으니 너와 나의 구별 없이 희비애락을 항상 같이해야 한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해요.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가 가정교육에서 시작된다고 해요. 그 중에서도 형제간의 우애야 말로 사회생활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배울 수 있는 소통의 기본이지요. 엄마는 손위 아이에게는 “형처럼 행동해라” 라고 하고 동생에게는 “오빠에게 양보해라”라고 하면서 너무 “~너답게” 행동하기만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해요. 또 “형은 똑똑한데 넌 누굴 닮았니?” 라든지 “동생 반만 닮아봐라” 같은 말을 하며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가르침으로 남다른 우애를 가졌던 율곡 이이

 

아이가 둘 이상인 집의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들 싸움 말리느라 하루가 다 갔다고 해요  하루종일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는 통에 힘이 든다는 것이지요  신사임당은 7남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애라고 가르쳤대요 신사임당이 아이들을 눕혀놓고 늘 해준 이야기도 우애에 관한 옛날 이야기라고 해요.

“ 옛날에 농사를 짓는 두 형제가 살았단다. 그런데 추수 때가 되자 형은 ‘동생은 새살림을 났으니 나보다 어렵겠지’ 라고 생각하고 아우는 ‘나야 식구가 적어서 괜찮지만 형은 아이들”자가 추수한 볏섬을 날랐단다. 형은 아우의 집으로 아우는 형의 집으로 말이야. 그러다 며칠이 지나도 볏섬이 줄지 않자 형제는 각자 이상하게 생각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밤, 열심히 볏섬을 나르다가 드디어  형과 아우가 마주치게 되었단다. 그리고 현제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서 울었단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신사임당의 7남매는 우애가 남다르기로 이름이 높았다고 해요. 훗날 율곡은 “형제는 부모의 유체를 한가지로 받아 나온 일신과 같으니 너와 나의 구별 없이 희비애락을 항상 같이해야 한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해요.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가 가정교육에서 시작된다고 해요. 그 중에서도 형제간의 우애야 말로 사회생활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배울 수 있는 소통의 기본이지요. 엄마는 손위 아이에게는 “형처럼 행동해라” 라고 하고 동생에게는 “오빠에게 양보해라”라고 하면서 너무 “~너답게” 행동하기만을 가요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해요. 또 “형은 똑똑한데 넌 누굴 닮았니?” 라든지 “동생 반만 닮아봐라” 같은 말을 하며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포대부 -이 율곡-

 

霜風振地      상풍진지     서릿바람이 땅에 떨어지니
鳥萬磨之刀槍  조만마지도창 천군만마 창검소리 같고
雪花飜空       설화번공    눈송이 흩날리어 하늘 가득히
散千斛之玉屑 산천곡지옥설  옥 가루 천 만 곳에 뿌리는 것 같구나
※이 詩는 10살 때 강릉 외가 집에 갔다가 강릉 경포대를 주제로 지은 시이다.

 
       

 

      계분봉수(溪分峰秀) -이 율곡-

 

溪分泗洙派  계분사수파
시내는 사수가 흐르는 것 같고
峰秀武夷山  봉수무이산
산봉우리 무이산 보다 아름답다
活討經千卷  활토경천권
재산이라고는 천 권 경서와 다만 몸담을 방 몇 간 뿐인데
行藏屋數間  행장옥수간
주고받는 얘기와 웃음은
襟懷開霽日  근회개제일
밝은 달이 가슴속까지 환하게 비치는 듯하여
談笑止狂란  담소지광란   
설레는 이 가슴을 진정시켜 주노라
小子求聞道  소자구문도
선생을 찾아온 뜻은 도를 알고자 함이지
非偸半日閒  비투반일한
한가로이 놀러 다님이 아니 오리.

註) 계분(溪分): 공자가 도를 닦던 도장
   사수(泗洙): 도장 근처에 흐르던 물줄기
   봉수(峰秀): 중국의 주자(宋 나라 유학자)가 도닦던 산
   무이산(武夷山): 도닦던 산 '

 

 
계분봉수(溪分峰秀)' 라는 율곡의 詩에 和答하는 詩 -이 퇴계-

 

病我牢闕不見春  병아뢰궐불견춘
내 병석에 갇히어 봄 구경도 못했는데
公來披豁醒心神  공래피활성심신
그대가 이렇게 찾아 주니 병이 씻은 듯 나아져 상쾌하네
始知名下無處士  시지명하무처사
내 오늘 비로소 공의 선비다움을 알고
堪愧年前闕敬身  감괴년전궐경신
내 스스로가 과거를 삼가지 못했음을 부끄러워 할 뿐
嘉穀莫容梯熟美  가곡막용제숙미
좋은 곡식 밭에는 잡초가 무성할 수 없으니
遊塵不許鏡磨新  유진불허경마신
어찌 글로써만 만나는 정분을 표현할 수 있으리
遇情詩話須刪去  우정시화수산거
아무쪼록 서로가 열심히 공부하며
努力工夫名日親  노력공부명일친
앞으로는 더욱 더 친하게 지내보세

 

 

哭退溪先生(곡퇴계선생)<퇴계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이(李珥)-

 

良玉精金稟氣純  양옥정금품기순
아름다운 옥 정금같이 타고난 정기 순수한데
眞源分派自關민  진원분파자관민
참된 근원은 관민에게서 갈려 나오셨네
民希上下同流澤  민희상하동류택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 입기를 바랐건만
迹作山林獨善身  적작산림독선신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
虎逝龍亡人事變  호서용망인사변
호랑이 떠나고 용도 없어서 사람의 일은 변했건만
난回路闢簡編新  난회로벽간편신  난字가 옥편에 없음
물길을 돌리고 길을 열어 놓으신 저서가 새롭네
南天渺渺幽明隔  남천묘묘유명격
남쪽 하늘이 아득하게 이승과 저승이 갈리었으니
淚盡腸?西海濱  누진장로서해빈 
서해 바닷가에서 눈물이 마르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네.

 


         이율곡 만시 
               사암 박순

일찍이 엄명을 받들고 구름 속의 문에서 나와
명군의 시대를 위해 태평을 이루려 하였네.
아침 저녁으로 나라 일을 조정 했는데
국가가 이제 갑자기 견고한 성을 잃었네.


외로운 무덤이 쓸쓸하게 산나무에 의지하자
만조 백관의 입들이 헤매지면서 부평초를 흉내내네.
성군께서도 슬퍼하셔 눈물을 흘리셨으니
황천에서도 임금 은혜로 영광이구나.


율곡은 선조 17년(1584년)에 별세하였는데 사암과 율곡은 친한 친구이었다. 그들은 같은 서인으로서 뜻이 맞았다. 마찬가지로 송강 정철과 사암 박순,  율곡 이이는 친한 부류이었다.

 


              花石亭 화석정

임정추이만(林亭秋已晩)하니 소객의무궁(騷客意無窮)이라.
숲 속의 정자에 가을이 벌써 저물어가니,
시인의 시상이 끝없이 일어나네.
원수연천벽(遠水連天碧)하고 상풍향일홍(霜楓向日紅)이라.
멀리 보이는 저 물빛은 하늘에 이어져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받아 붉구나.
산토고윤월(山吐孤輪月)하고 강함만리풍(江含萬里風)이라.
산은 외롭게 생긴 둥근 달을 토해 내
고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새홍하처거(塞鴻何處去)오? 성단모운중(聲斷暮雲中)이라.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울음소리 석양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 율곡 선생이 8살 때 파주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화석정'이라는 詩 입니다.>


 

       催詩雨(최시우)  

 

雲鎖靑山半吐含  운쇄청산반토함
구름이 푸른 산을 반만큼 삼켰다 뱉더니
驀然飛雨灑西南  맥연비우쇄서남
돌연 빗방울 흩날려 서남쪽을 씻어 주네


何時最見催詩意  하시최견최시우
언제 가장 시 짓고픈 마음을 재촉하던가
荷上明珠走兩三  하상명주주양삼
연잎 위로 물방울 두세 개 구를 때라네

율곡 이이선생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과거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 급제한 수재다. 才勝薄德(재승박덕)이란 말이 있듯이 재주가 많은 사람은 보통 후덕함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젊은 시절 율곡 또한 그런 경향이 보였으나, 주변 어른들의 교육과 본인의 修養 精進으로 학식과 인덕을 겸비한 큰 인물이 되었다.이 시에는 단아한 선비의 詩心이 담겨 있다. 푸른 산에 구름이 일어 한바탕 소나기를 뿌리는 먼 경치를 보다가 비가 그친 뒤 연잎에 구르는 맑은 물방울로 시선이 옮아가며 진주같은 시 한 편이 나왔다
.*催(최):재촉하다 *鎖(쇄):자물쇠, 가두다 *吐含(토함):뱉고(吐) 머금다(含) *驀(맥):말을 타다. 뛰어오르다. *灑(쇄):뿌리다.   灑淚雨;음력 7월 6일 내리는 비.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방해하여 눈물 흘리게 하는 비 *荷(하):연꽃(荷花), 짐을 지다.(荷重;짐의 무게)

 


□ 어려서 이율곡 선생이 꿈에 하느님으로부터 금첩지 하나를 받았는데 거기에 아래와 같은 한시 한수가 적혀 있었다 한다.
 

龍歸曉洞雲猶濕  용귀효동운유습
용은 새벽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오히려 젖어 있고,

麝過春山草自香  사과춘산초자향  麝 사향노루사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풀이 저절로 향기롭다.


율곡이 꿈에 얻은 이 시가 무엇을 말함인지 알 길이 없었는데,
뒷날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야 모두들 그것이 바로
율곡의 고매한 인품과 덕을 비유한 것이었다고 본다.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이율곡 연시조

고산 구곡담(九曲潭)을 사람이 몰려드니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일곡(一曲)은 어드메오 관암(冠巖)에 해 빗쵠다.
평무(平蕪)에 내 거든이 원근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녹코 벗 온 양 보노라.

 

이곡(二曲)은 어듸메오 화암(花巖)에 춘만(春滿)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로니 알게 한들 엇더하리.

 

삼곡(三曲)은 어드메오 취병(翠屛)에 닙 퍼?다.
녹수에 산조(山鳥)는 하상기음(下上其音)하는 적의
반송(盤松)이 수청풍(受淸風)한이 녀름 경(景)이 업세라

 

사곡(四曲)은 어듸메오 송애(松崖)에 해 넘는다.
담심암영(潭心巖影)은 온갓 빗이 잠겨셰라.
임천(林泉)이 깁도록 됴흐니 흥을 겨워 하노라.

 

오곡(五曲)은 어듸메오 은곡(隱曲)이 보기 됴희
수변정사(水邊精舍)는 소쇄(瀟灑)함도 가이 없다.
이 중에 강학(講學)도 하려니와 영월음풍하오리다.

 

육곡(六曲)은 어듸메오 조래(釣崍)에 물이 넙다
나와 고기와 뉘야 더옥 즐기는고
황혼에 낙대를 메고 대월귀(帶月歸)를 하노라.

 

칠곡(七曲)은 어듸메오 풍암(楓巖)에 추색(秋色) 됴탸
청상(淸霜)이 넙게 치니 절벽이 금수(錦繡)?로다
한암(寒巖)에 혼자 앉아 집을 잊고 잇노라.

 

팔곡(八曲)은 어듸메오 금난(琴灘)에 달이 밝다.
옥진금미(玉軫金微)로 수삼곡을 노래하니
고조(古調)를 알니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

 

구곡(九曲)은 어듸메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속에 뭇쳐셰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어휘 풀이

<벗님> : 만년에 해주 고산에 은퇴, 은병정사를 짓고 지낸 것으로 보아 정사(精舍)의 여러 후학(後學)들을 가리킨다고 봄
<무이를 상상하고> : 주자가 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던 무이산을 생각하고. 이곳에서 그는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무이(武夷)> :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 주자가 이 산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을 닦음. 구곡계(九曲溪)가 있어 경치가 좋음.
<관암> : 갓같이 생긴 바위
<평무> : 잡초가 우거진 들판
<소쇄> : 맑고 깨끗함
<조래> : 낚시질하는 산골짜기
<대월귀> : 달빛을 받으며 돌아옴
<옥진금미> : 거문고

*해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은 연시조(聯時調). 작자가 42세 되던 해인 1577년(선조10)에 황해 해주 석담(石潭)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고 있을 때 그곳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그 풍광을 노래한 것이다.

  서곡 1수, 본문 9수로 모두 10수의 연시조인데,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지었다 하나 시상(詩想)에 있어 독창적인 면이 엿보인다. 서곡부터 시작하여 제1곡은 관암(冠巖), 제2곡은 화암(花巖), 제3곡은 취병(翠屛), 제4곡은 송애(松崖), 제5곡은 은병(隱屛), 제6곡은 조협(釣峽), 제7곡은 풍암(楓巖), 제8곡은 금탄(琴灘), 제9곡은 문산(文山) 등으로 나누어 각각 그곳의 경치와 흥취를 읊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偶吟  우음     우연히 읊다
                                         栗谷   율곡(李珥)  1536~1584

 
風月養我情   풍월양아정   바람과 달은 나의 情感 키우고
煙霞盈我身   연하영아신   안개와 노을은 나의 몸을 충만케 한다

 
子長吾所慕   자장오소모   子長는 그리워 하는 사람
悅卿吾所親   열경오소친   열경悅卿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非探山水興   비탐산수흥   山水의 흥취를 찾는 것이 아니라
聊以全吾眞   료이전오진   나의 참된 마음을 온전하게 하고자 함이다

 
物我合一體   물아합일체   사물과 내가 일체一體가 되니
誰主誰爲賓   수주수위빈   누가 주인이고 누가 客 인가

 
湛湛若澄潭   담담약징담   깊음은 맑은 못과 같고
肅肅如秋旻   숙숙여추민   고요하기는 가을 하늘과 같다

 
無憂亦無喜   무우역무희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으니
此境人難臻   차경인난진   이러한 경지에 사람이 이르기는 어렵다

 


                    花石亭     화석정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속의 정자에 가을이 이미 지나가니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취해 떠드는 나그네의 뜻은 끝이 없다 

 
遠水連天碧    원수련천벽   멀리 강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내린 단풍나무는 해빛을 받고 빨갛다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은 말리 멀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다

 
寒鴻何處去    한홍하처거   추운 날, 기러기 어디로 날아 가는가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기러기 울음소리, 夕陽속으로 사라진다

 

 

 

             浩然亭見月  호연정견월   호연정에서 달을 보며
    

 
天放空疎客   천방공소객   하늘이 쫓아낸 쓸쓸한 나그네
逍遙江上山   소요강상산   강 위의 산을 소요한다
登臨夕陽盡   등림석양진   올라와 바라보니 석양은 지고
月出海雲間   월출해운간   바다구름 사이로 달이 떠오른다

 

 

 

            梅梢明月  매초명월    매화 가지 끝의 밝은 달 
    
 
梅花本瑩然   매화본영연   매화는 본래부터 환히 밝은데
映月疑成水   영월의성수   달빛이 비치니 물결 같구나


霜雪助素艶   상설조소염   서리 눈에 흰 살결이 더욱 어여뻐
淸寒徹人髓   청한철인수   맑고 찬 기운이 뼈에 스민다

 
對此洗靈臺   대차세령대   매화꽃 마주 보며 마음 씻으니
今宵無點滓   금소무점재   오늘밤엔 한 점의 찌꺼기 없네

 

       

 

           求退有感  구퇴유감   세 번 상소하고 물러나기를 허락 받고서
    
 
行藏유命豈有人   행장유명기유인   벼슬에 나가고 돌아오는 것도 천명이지,

                                                   어찌 사람에 달렸으랴
素志會非在潔身   삭지회비재결신   본래의 뜻이 내 몸만 깨끗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었네

 
여闔三章辭聖主   여합삼장사성주   대궐문에 세 번 상소하여 성스러운 님을

                                                   하직하고는
江湖一葦載孤身   강호일위재고신   강호 조각배에다 외로운 몸을 실었네

 
疎才只合耕南畝   소재지합경남무   재주가 못났으니 다만 밭을 갈기에 알맞은데
淸夢從然繞北辰   청몽종연요북진   맑은 꿈은 부질없이 북극성을 감도네

 
茅屋石田還舊業   모옥석전환구업   초가에 돌밭 옛 살림이 되어
半生心事不憂貧   반생심사불우빈   반평생에 가난 따위는 걱정도 않네

 

 

            山中     산중   산 속에서
                                          

 
採藥忽迷路   채약홀미로   약초 캐다 홀연히 길을 잃었네
千峯秋葉裏   천봉추엽리   봉우리마다 단풍 곱게 물들었는데
山僧汲水歸   산승급수귀   산에 사는 스님이 물길어 돌아간 뒤
林末茶烟起   임말다연기   숲 끝에 피어오르는 차 달이는 연기

 

 

 

               溪分峰秀    계분봉수
     

 
溪分泗洙派   계분사수파   시내는 사수가 흐르는 것 같고
峰秀武夷山   봉수무이산   산봉우리 무이산 보다 아름답다

 
活討經千卷   활토경천권   재산이라고는 천 권 경서와 몸담을 방 몇 간 뿐인데
行藏屋數間   행장옥수간   주고받는 얘기와 웃음은

 
襟懷開霽日   근회개제일   밝은 달이 가슴속까지 환하게 비치는 듯하여
談笑止狂란   담소지광란   설레는 이 가슴을 진정시켜 주노라

 
小子求聞道   소자구문도   선생을 찾아온 뜻은 도를 알고자 함이지
非偸半日閒   비투반일한   한가로이 놀러 다님이 아니 오리

 

 

 

                         滿月臺    만월대 
      
 
下馬披荊棘   하마피형극   말에서 내려 가시밭길 이리저리 헤치며
高臺四望虛   고대사망허   높은 누대에 올라서 사면을 바라보니 허전하구나
雲山孤鳥外   운산고조외   구름 자욱한 산 속에서 외로운 새마저 날아가니
民物故都餘   민물고도여   백성 사는 옛 도읍은 황폐하기 그지없네
 


 

         土亭李之函送別詩     土亭 李之函 송별시 
    

難兄難弟摠淸流   난형난제총청류   형과 아우 모두 깨끗한 사대부인데
選勝移家占一區   선승이가점일구   좋은 곳 골라 집 옮기며 구역을 차지하였네


活計鼎條車不滿   활계정조거불만   살림살이라야 조촐하여 한 수레에 가득하지

                                                   않지만
塵紋間絶地偏幽   진문간절지편유   시끄러운 세속 멀리 떨어져 주위가 더욱

                                                  그윽하네

 
紫荊陰裏三間足   자형음리삼간족   붉은 가시나무 그늘 속에 초가삼간으로

                                                   만족하고
黃犢披邊二頃優   황독피변이경우   누런 송아지 언덕 가에, 두어 이랑 밭으로

                                                   넉넉하다니

 
何日得諧携手約   하일득해휴수약   다시 만나지는 약속은 어느 날이나 이루려나
春江佇立送扁舟   춘강저립송편주   봄날 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조각배를 보낸다네

 

 

출처 : 산의품 보금자리
글쓴이 : 산의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