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노수신

회기로 2010. 1. 24. 18:36

노수신 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대윤(大尹)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 (李延慶) 에게 배웠으며, 휴정(休靜)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대윤(大尹)에 속하여 인종 즉위 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7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 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정황(丁?)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 (선조 즉위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했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기둥


曉月空將一影行 黃花赤葉正含情 효월공장일영행 황화적엽정함정

雲沙目斷無人問 倚遍津樓八九楹 운사목단무인문 의편진루팔구영


새벽 달빛에 공연히 그림자를 데리고 걷노니 누런 꽃 붉은 잎이 정녕 정을 머금은 듯.아득히 구름 낀 모랫벌, 물을 길도 없느니 누에서 이 기둥 저 기둥에 계속 기대기만 하여라.


그림자 말고는 같이 벗할 것도 없이 쓸쓸한 유배지그리운 이가 오는 날이어서, 누런 꽃도 붉은 잎도 마침 더욱 정을 머금은 듯 곱다.슬픔 담긴 마음엔 세상이 온통 슬픔으로 비치듯, 마음에 설레임이 담기면 온 사물이 다 설레임으로 비치는 까닭일 것이다.그 설레임 속에서 눈이 다 못 닿는 아득한 저편 대안(對岸)엔 구름만 잔뜩 끼어있고, 기다리는 `그 사람`은 왔는지 안 왔는지 물을 길이 없어 애만 탄다.벽파진 나루터에서 그렇게 저편 모랫가 아득한 물결 사이로 애타는 눈빛만 얹어놓는다.그 눈빛을 얹고서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닷물처럼, 기다림의 설레임과 조바심, 걱정 등이 온통 뒤엉켜 그 애타는 심사를 가눌 길이 없다.운무에 잠긴 저편 모랫벌은, 그리움으로 아득하고 흐릿한 그의 마음의 모습일 것이요, 그 사이에 출렁이는 물을 수 없는 물결의 거리는 주체할 수 없는 그의 가슴속 초조함의 거리일 것이다.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누의 기둥에 기대는 것뿐..






○ 노수신 적소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245 (도 기념물 제 74 호            1987.03.31)

노수신 적소는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신하인 노수신이 귀양살이를 하던 곳으로, 후에 건물명을 '수월정'이라 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벽파정 시

두 공은 천상에 있고 二公天上在 이공천상재

나그네 홀로 바다 가운데 떠 있네. 孤客海中浮 고객해중부

이 아침까지 목숨이 붙어 있으니  幸緩今朝死  행완금조사

앞길이 오히려 절로 멀고 유유하네.前導尙自悠 전도상자유





    벽정대인(碧亭待人)


효월공장일영행(曉月空將一影行)

황화적엽정함정(黃花赤葉正含情)

운사목단무인문(雲沙目斷無人問)

의편진루팔구영(倚遍津樓八九楹)


새벽달에 허전히 그림자 끌고 가니

누런 꽃 붉은 잎은 정을 담뿍 머금었네

구름 모래 아마득해 물어 볼 사람 없어

나루 누각 기둥 돌며 여다홉 번 기대었소.

 

구름 아득한 하늘 끝자락, 파도 너머 백사장을 눈이 아프게 바라보지만 건너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아침부터 기둥을 옮겨가며 바라보던 기다림은 어느새 벽파정(碧波亭) 기둥 돌기를 8~9번이나 훌쩍 넘겼다는 서러운 마음을 담은 노래다.





    愼氏亭懷無悔甫弟

(신 씨의 정자에서 아우 무회를 그리워하며)

路盡平丘驛  로진평구역

江深判事亭  강심판사정

柳暗靑坡晩  유암청파만

天晴白嶽春  천청백악춘



광주노씨 가훈


첫째,「부모를 봉양하는 데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면, 극진히 하지 않는 일이 없어라」


둘째,「반혼(返魂)하는 것이 고예(古禮)가 아니고, 거여(居廬)·대묘(待墓)하는 것은 좋은 풍속이니, 반혼하면 처자와 더불어 혼동하여 거처해서 슬픔을 잊을 때가 많으니 크게 불가한 일이다」



光州(光山) 盧씨 蓮谷(연곡)의 家訓


첫째,「풍랑은 풍랑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첫째의 의리이다」

둘째,「경전을 가지고 산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해야 한다」

셋째,「훈민정음이 천하에 두루 쓰일 수 있는 문자임을 알아라」

 

 

인심도심설 (유교) [人心道心說]

유교의 도덕적 심성수양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서, 마음의 작용이 2가지의 서로 다른 성격을 띨 수 있음을 밝힌 인성론(人性論).〈서경〉 대우모편(大禹謨篇)에는 순(舜)이 우(禹) 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니 마음을 잘 살펴 하나가 되게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후 당대(唐代)까지는 유교가 도덕적 심성수양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내용은 주목받지 못하고, 오직 불교적인 심성수양론만이 발달했다. 그러나 불교를 비판하면서 성립한 송대(宋代)의 성리학에서는 불교의 심성수양론을 대체할 유교적 이론을 정립해야 했고, 그러한 관심 속에서 이러한 대우모편의 글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인심도심설의 기본내용은 주희(朱熹)가 〈중용〉장구서(章句序)에서 설명했다. 마음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기도 하는데, 그 각각을 가리켜 인심과 도심이라고 했다. 인심은 감각적 욕구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며, 도심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인심이 위태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감각적 욕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도심이 미묘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도덕적 본성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이 인심과 도심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구나 정일(精一)한 마음자세를 가짐으로써 도심을 잘 살펴서 키워나갈 수 있고 인심이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심성수양의 결과로 중의 상태, 즉 인욕(人欲)의 사(私)를 물리치고 천리(天理)의 공(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적인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도 인심도심설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의 인심도심설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5세기 초에 이미 권근(權近)은 마음의 작용을 2가지로 나누면서, 마음속의 성이 발한 것을 정이라 하면서 사단과 도심을 그러한 정에 포함시켰으며, 마음이 발한 것을 의라 하면서 칠정과 인심을 그러한 의에 포함시켰다. 그 후 이황(李滉) 역시 "인심은 칠정이요 도심은 사단이다"라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의 명(名)과 실(實)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은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다만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려 할 때, 인욕은 인심에 속하는 것이며 천리는 도심에 속하는 것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조선 성리학에서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의 관계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한 이는 이이(李珥)였는데, 그는 성혼(成渾)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명백히 밝혔다. 성혼은 도심과 인심이 각각 성명지정 (性命之正)과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발한다는 것은 곧 이와 기에서 발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서 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사단칠정은 마음의 작용 가운데 정(情)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도심인심은 정과 의(意)를 합해서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개념들이 지칭하는 범주가 다르다고 했다. 또 도심과 인심은 서로 받아들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명백히 나누어 설명할 수 있지만,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도심인심과 사단칠정의 관계를 설명하면 사단을 도심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을 인심이라고만 하면 틀린 것이므로 인심과 도심을 합친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또 도심인심도 사단칠정과 마찬가지로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가지 길뿐이지만, 사람의 의사(意思)가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인지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따라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경우 도심은 오직 천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순선(純善)이지만, 감각적 욕구는 천리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인욕에 따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심에는 선 악 모두가 있다고 했다.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땅한 바를 따르면 그 역시 선(善)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의사가 처음에는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그것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게 되면 도심이 인심으로 바뀔 수 있으며, 또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한 바를 좇아 사욕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심이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이 인심과 도심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견해를 가리켜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결국 도덕적 수양에서 가장 기본되는 것을 성의(誠意)에서 찾는다. 도심과 인심이 갈라지고 또 서로 전환하는 것이 모두 의(意)의 작용이기 때문에 정일하는 공부는 결국 천리에 부합하는 의사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출처 : 산의품 보금자리
글쓴이 : 산의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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