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崇仁(高麗) 이숭인 1349~1392
李崇仁(高麗) 이숭인 1349■1392
고려학자?시인
1349(충정왕 1) 경산부(京山府)~1392(태조 1).
고려 후기의 학자?시인.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 원구(元具)와 어머니 언양김씨(彦陽金氏) 사이의 2남3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 9) 14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이색의 문하에 있었으며, 16세 때 등과하여 숙옹부승을 제수받고 후에 장흥고사가 되었다. 21세 때 성균관의 생원이 되면서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박상충?정도전?권근 등과 깊이 사귀었다. 24세에 중국의 과거에 응시할 인재를 뽑는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나 나이가 미달하여 가지 못했다. 그후 성균직강?예문응교?전리총랑을 지냈다. 우왕 즉위년에는 친명파라고 하여 대구현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소환되어 성균사성?전리판서?밀직제학을 역임했으며, 1386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창왕 즉위) 최영 일파의 참소로 통주(通州)에 유배되었으나, 최영의 몰락으로 다시 소환되어 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그 일파로 몰려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에 앞서 정도전의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후 태종이 그의 죽음이 무고함을 밝히고 1406년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문사(文士)로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고, 문재(文才)로서 고려의 국익을 위해 기여했으며, 시는 후대에 많은 극찬을 받았다. 또한 이색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아 유풍(儒風)을 새롭게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문학관을 살펴보면, 첫째, 경전 위주의 문학관으로 사장(詞章) 위주의 문예보다는 도학적인 면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시는 성정(性情)의 정(情)에 근본해야 한다고 하여, 학문이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들어가서 성정의 정을 얻은 후면 시는 저절로 된다고 했다. 셋째, 시의 효용을 교화 위주에 두었으며 넷째, 자연발로(自然發露)의 문학관으로 시는 억지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의 시는 정연하고 고아(高雅)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에는 〈제승사 題僧舍〉?〈오호조 嗚呼鳥〉 등이 있다. 산문은 표문(表文)이 많은데, 이는 그가 대외관계에 필요한 많은 문을 썼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의 문학을 대변하는 문인으로 그의 도학적인 문학관은 조선의 변계량?권근에게로 이어졌다. 저서로는 〈도은집〉 5권이 전한다.
新雪 신설 겨울 풍경
李崇仁 이숭인 1347~1392
蒼蒼歲暮天 창창세모천 아득한 세밑 하늘
新雪遍山川 신설편산천 흰 눈이 산천을 온통 뒤덮었네
鳥失山中木 조실산중목 새는 산속의 둥지를 잃었고
僧尋石上泉 승심석상천 스님은 바위위 샘물 찾아 나서네
饑鳥啼野外 기조제야외 굶주린 새 들녘에서 우짖고
凍柳臥溪邊 동류와계변 얼어붙은 버드나무 시냇가에 누워있네
何處人家在 하처인가재 어느 곳에 사람 사는 집 있을까
遠林生白煙 원림생백연 멀리 숲에서 흰 연기 피어오르네
새로 내린 눈
이숭인(李崇仁, 高麗)
아득한 세모의 하늘 아래
새로 내린 눈이 산천에 가득
새들은 산 속의 나무를 잃어버리고
스님은 돌 위 샘물을 찾는데
주린 까마귀는 들녘 밖에서 울고
얼어붙은 버드나무 시냇가에 누웠다
도시 어느 곳에 인가가 있길래
저 멀리 숲 속에서 흰 연기 피는 걸까?
新雪
蒼茫歲暮天(창망세모천)
新雪遍山川(신설편산천)
鳥失山中木(조실산중목)
僧尋石上泉(승심석상천)
飢烏啼野外(기오제야외)
凍柳臥溪邊(동류와계변)
何處人家在(하처인가재)
遠林生白煙(원림생백연)
題毗瑟山 僧舍 제비슬산승사 毗瑟山 僧舍
俗客驅東道 속객구동도 俗客이 말을 몰아 동쪽 길로 가니
高僧臥小亭 고승와소정 노승이 작은 정자에 누워 있다
雲從朝暮白 운종조모백 구름은 해를 좇아 온종일 흰데
山自古今靑 산자고금청 산은 옛날과 다름없이 언제나 푸르다
往事追松子 주사추송자 솔방울 벗삼은 지난 일 한적했고
羈逝愧地靈 기서괴지영 말몰아 유람가니 地靈뵐낯 없어라
愍勒汲澗水 민륵급간수 바램이 있다면 산골 물 길어다가
一菊煮蔘? 일국자삼령 한웅큼 잡은山蔘과 茯笭藥을 달여나 볼까
☞ 羈= 단속할 기. 逝= 갈 서. 勒= 굴레 륵.
제곤슬산승사(題昆瑟山僧舍)
비슬산 절에 제하다
俗客驅長道 高僧臥小亭
속객구장도 고승와소정
세상 나그네 먼 길 달려 왔는데
노승은 작은 정자에 누워있구나.
雲從朝暮白 山自古今靑
운종조모백 산자고금청
구름은 해를 좇아 온종일 흰데
산은 옛과 다름없이 언제나 푸르구나.
往事追松子 羈遊愧地靈
왕사추송자 기유괴지령
솔방울 벗 삼은 지난 일 한적했고
말 몰아 유람가니 지령(地靈)뵐 낫 없어라
殷勤汲澗水 一菊煮蔘? 도마꼬리영, ?복령, 풍뎅이
은근급간수 일국자삼령
은근한 마음으로 골짜기 물 길러다가
한 줌 인감과 복령을 달여나 볼까.
題僧房 제승방 스님의 거처
李崇仁(高麗) 이숭인 1349■1392
山北山南細路分 산북산남세로분 산의 남북으로 오솔길은 갈라지고
松花含雨落紛紛 송화함우낙분분 송화는 비에 젖어 분분히 떨어진다
道人汲井歸茅舍 도인급정귀모사 도인은 물을 길어 띠집으로 들어가고
一帶靑煙染白雲 일대청연염백운 한 줄기 푸른 연기는 흰구름을 물들인다
山居卽事 산거즉사 산중에서 지내며
李崇仁(高麗) 이숭인 1349■1392
無才堪世用 무재감세용 세상에 쓰일 재능이 없으니
絶意鬪年芳 절의투년방 꽃다운 나이들과 겨룰 생각 끊었다네
藥圃風初暖 약포풍초난 봄 되니 약밭엔 바람이 따스하고
書窓日漸長 서창일점장 서실 창에는 해가 차츰 길어지네
要僧分水石 요승분수석 중이 오면 함께 풍광을 즐기고
見客置壺觴 견객치호상 벗 만나면 이곳에서 술잔을 주고받지
寫得閑居賦 사득한거부 한가한 산중생활 한 편 시에 담아내어
聊因扁草堂 료인편초당 그냥 그렇게 초당에 내걸었네
기(記)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이숭인-
글쓴이: 심온 조회수 : 1 08.11.17 06:26 http://cafe.daum.net/jjjyangju/5Tps/44
기(記) 이숭인
여흥군 신륵사 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
판삼사사(判三司事) 한산(韓山) 목은 선생(牧隱先生)이 숭인(崇仁)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대덕(大德) 경술년 7월 초 3일에 나의 조부 정읍부군(井邑府君)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先君) 가정문효공(稼亭文孝公)께서 당시 13세였으나 초상과 장사를 잘 치르셨다. 지정(至正) 경인년 10월 2일에 조모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군이 예(禮)를 다하여 장사하고 중을 청하여다가 시골의 절에서 불경(佛經)을 읽었다.
선군이 항상 탄식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하셨는데, 좌올남산총공(坐兀南山聰公)이 선군에게 말하기를, ‘공이 지금 진실로 우리 불법으로써 선고(先考)와 선비(先?)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면, 어찌 1부 장교(藏敎)를 간행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불법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선군이 즉시 부처의 초상(肖像)을 향하여 기원을 세웠다.
다음해 신유년 정월 초하룻날 선군이 불행하게도 어머님의 상복을 입은 가운데서 돌아가셨다. 내가 중국에서 분상(奔喪)하여 와서 총공(聰公)을 청하여 불경을 읽었다. 선군의 입원(立願)을 언급하였으나, 내가 상중에 있으므로 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상복을 벗은 뒤에 요행히 세과(世科 조상의 은덕으로 얻는 벼슬)에 들어 이름이 관원의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 오직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선군이 입원(立願)한 불사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총공(聰公)이 여러번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선대인의 입원(立願)을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하였으나, 일찍이 답장은 하지 않고 스스로 상심할 뿐이었다.
홍무(洪武) 신해년 9월 26일에 선비 김씨(先?金氏)가 또 병으로 돌아가셨다. 상기(喪期)가 겨우 끝났을 때에는 내가 병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갑인년 9월 23일에 현릉(玄陵)이 모든 신하들을 버리고 승하하셨다. 내가 삼가 생각하니 우리 선군(先君)은 현릉(玄陵)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의 옛 신하로서 오랜 세월을 섬겼으며, 나는 현릉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재상의 관부(官府)에 올랐으니 우리 부자가 입은 은택은 지극히 넉넉하였지만 일찍이 터럭만한 보답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기미년에 총공(聰公)이 마침 산중에서 내려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제 나의 나이가 벌써 74세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공과 더불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선대인(先大人)의 말씀이 또렷이 귀에 남아 있습니다. 공은 기억하십니까.’ 하니, 내가 더욱 마음으로 아파하여 말하기를, ‘위로는 선왕의 명복을 빌고, 아래로는 선고(先考)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의 병이 나았을 때, 왕명을 받들어 나옹(懶翁)의 탑명(塔銘)을 지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스스로 계획하여 보니 내 힘으로는 부족하였다. 힘입어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옹(懶翁)의 무리뿐이기에 즉시 편지를 보내어 의사를 말하였다. 호(號)가 무급(無及), 수봉(琇峯)이라고 하는 두 중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격려하였다.
경신년 2월부터 인연을 따라 희사(喜捨)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각참(覺?)은 순흥(順興)에서, 각잠(覺岑)은 안동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에서, 도혜(道惠)는 청주에서, 각연(覺連)은 충주에서, 각운(覺雲)은 평양에서, 범웅(梵雄)은 봉주(鳳州)에서, 지보(志寶)는 아주(牙州)에서 선행을 권장하였다. 닥나무가 변하여 종이가 되고 검은 것을 녹여 먹을 만들었다. 신유년 4월에 이르러 《경률론(經律論)》을 인쇄하여, 9월에 표지(表紙)를 꾸미고, 10월에 각주(覺珠)가 이금(泥金)으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이 누런 책가위를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函)을 만들었다. 아침저녁으로 몇 되, 몇말의 곡식을 빌어다가 여러 중들을 밥 먹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은 국신리(國?里)에 사는 노파 묘안(妙安)이었다. 임술년 정월에 화엄종 영통사(靈通寺)에서 거듭 교열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군(驪興郡) 신륵사에 이르니 나옹(懶翁)이 입적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공희(權公僖)가 제목(題目)을 주관하여 다시 여러 시주(施主)들과 더불어 시재(施財)하고, 동암(同庵) 순공(順公)이 공사를 감독하여 드디어 절의 남쪽에 2층 집을 세우고 크게 단청을 장식하였다. 준공하자 인쇄한 《경률론(經律論)》을 그 안에 넣어 간직하였다.
5월에 전경(轉經)하고, 9월에 전경하였으며, 금년 들어 계해년 정월에 또한 전경하였다. 대략 1년에 세 번 전경하는 것은 일정한 규정으로 한다. 가운데에 꽃동산을 만들고 사람의 키만큼 큰 비로자나(毗廬遮那) 불상 한 위(位)를 두었다. 당성군(唐城君) 홍공 의룡(洪公義龍)이 죽은 딸을 위하여 지은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한 위(位), 강부인(姜夫人) 화연(化緣)이 지은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한 위가 있어서 사중(四衆)의 무리들에게 우러러보고 예배하는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 아, 30여년의 오랜 세월을 지난 뒤에 선군(先君)의 입원(立願)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 경축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 큰 공(功)을 미루어 영원히 임금의 장수(長壽)와 나라의 복(福)을 비는 데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중들이 비석을 세워 장래에 가르침을 보이려 한다.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기문을 쓰라.” 하였다.
숭인(崇仁)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곧 기문을 써서 말하기를, “부처의 도(道)가 청정(淸淨)하고 고묘(高妙)하여 한 점의 티끌도 묻지 않고 만물에 초연하게 뛰어났으므로, 현자와 지자(智者)들은 본래부터 이를 즐거워하였다. 그 말에는 또 소위 복전이익(福田利益)이라는 설(說)이 있다. 여기에서, 충신이나 효자로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자라면 그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 귀의(歸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불서(佛書)가 세상에 크게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이미 일으키고 목은 선생이 계승하여 마침내 이 법보(法寶)를 이루어 임금과 어버이에게 복(福)을 받드는 이것이 곧 충신?효자가 임금이나 어버이를 위하여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다는 것인가. 아, 누가 신하 아니며, 아들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천만세에 이르기까지, 그 하늘같이 존경하는 분에 대하여 사모하고 발원(發願)하려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아니하니, 내가 감히 즐겁게 글을 쓰지 아니하겠는가. 저 사중(四衆)의 무리 중 재물을 바쳐 조력한 자는 그의 성명을 모두 비석의 뒷면에 적어둔다.” 하였다.
嗚呼島(오호도) / 도은 이숭인
嗚呼島吊溟中 오호도적명중 오호도는 동쪽바다 가운데 있는데
滄波香然一點碧 창파향연일점벽 물결이 아득하여 푸른 점이 되었네
夫何使我雙涕零 부하사아쌍체령 나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爲哀此田橫客 ○위애차전횡객 다만 슬피 이 전횡을 위함이니
田橫氣槪橫素秋 전횡기개횡소추 전횡의 기개는 가을을 가득 채웠고
義士歸心實五百 의사귀심실오백 의사의 마음 오백이 한데 모였다네
咸陽降準眞天人 함양강준진천인 함양의 높은 콧대는 진실로 하늘 사람의 일이었고
手注天潢洗秦虐 수주천황세진학 은하수 물을 끌어내 진나라의 가혹함을 씻었다
橫何爲哉不歸來 횡하위재불귀래 횡이시여 어찌 다시 오지 못하시오
怨血自汚蓮花鍔 원혈자오연화악 원통한 피만 연화검에 응겨 남았네
客○聞之爭奏何 객○문지쟁주하 객이 그 말을 들었으나 이미 늦었고
飛鳥依依無處托 비조의의무처탁 날으는 새조차 의탁하여 갈 곳이 없네
寧從地下共追隨 영종지하공추수 차라리 죽어가서 같이 따를까
軀命如絲安足惜 구명여사안족석 실낱같은 목숨 무엇이 아까우리
同將一刎寄孤嶼 동장일문기고서 한번 칼을 물어 외로운 섬에 의탁하니
山哀浦思日色簿 산애포사일색부 산천이 슬퍼하고 일색 또한 빛을 잃었네
嗚呼千秋與万古 오호천추여만고 아아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난들
此心結誰能知 차심결수능지 이 마음 맺혔음 그 누가 알까
不爲轟霆有所洩 불위굉정유소설 천둥소리 없어도 비는 내리고
定作長虹射天赤 정작장홍사천적 긴 무지개되어 하늘 붉혔네
君不見古今多少輕薄兒 군불견고금다소경박아
당신은 고금의 많은 경박자를 보지 못하였는가
朝爲同胞暮仇敵 조위동포모구적 아침엔 동포 저녁에는 원수가 되네.
이시는 ' 오호도'에 얽힌 '전횡'의 고사를 소재로 하여 지은 작품으로 40세에 賀正使(하정사,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신)로 명나라에 갔을 때 지은 도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표현이 매우 격렬하고 강개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분을 절로 느끼게 한다. '오호도'에 관련된 소재로 하여 지은 작품에는 이숭인과 정도전의 작품이 있다.
<전횡의 고사>
전횡은 제왕 전영의 아우로 한나라 초기 제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호도로 쫓겨갔다. 한이 신하가 되기를 강요하자 거부하며 자결하였고, 500여명의 식객들도 전횡의 뒤를 따라 오호도에서 자문(목을 베어서 죽음)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도은은 哀秋夕辭(애추석사)에 나타난 강직한 정신을 바탕으로
절의를 지키며 죽은 전횡과 식객을 조상하면서 상황에 따라 아침에 동지였다가 저녁에 원수가 되는 고금의 경박스런 관리들을 비판하고 그들이 보여 준 절의를 부각시키며 자신의 의지를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여창신기(旅窓晨起)
여관 창가에서 새벽에 일어나
九月猶?? (구월유치격) 구월에도 얇은 갈포옷 입고 칡베치 칡베격
家書久不通 (가서구불통) 집에서는 오랫동안 소식도 없다.
浮生曾是客 (부생증시객) 덧없는 삶, 일찍이 나그네 신세
多故已成翁 (다고이성옹) 많은 변고에 이미 늙은이 다 되었다.
賦?人將去 (부복인장거) 가의의 복조부처럼 사람은 떠나려 하고
새이름복 ?
傷麟道欲窮 (상린도욕궁) 획린을 슬퍼하듯 진리는 다하려 하는구나.
童烏梓應拱 (동오재응공) 동오의 무덤가 나무는 아름들이로 자라나고
梓 가래나무재
菜婦室還空 (채부실환공) 안방은 안주인이 떠나 비어 있도다.
風物長歌裏 (풍물장가리) 풍물은 긴 노래 속에 있고
形骸痛飮中 (형해통음중) 몸둥아리는 통음 속에 있도다.
骸 뼈해, 정강이뼈
古來非一日 (고래비일일) 예부터 이런 날 하루가 아니니
拍手向天公 (박수향천공) 하늘 향해 손바닥을 칠 뿐이로구나.
村居(촌거) 시골에 살면서
赤葉明村逕 적엽명촌경 단풍나무 잎사귀는 마을길을 밝히고
淸泉漱石根 청천수석근 맑은 샘물은 돌부리를 씻는다.
地偏車馬少 지편차마소 구석진 곳이라 찾는 사람 적은데
山氣自黃昏 산기자황혼 산기운은 스스로 황혼에 든다
白廉使惠茶 백염사혜다
백염사(白廉使)에게서 차를 선물받고
先生分我火前春 선생분아화전춘
선생이 나에게 화전춘(火前春)을 보내주시니
色味和香一一新 색미화향일일신
색과 맛 향 그런 향기, 하나 하나 모두 새롭네
滌盡天涯流落恨 척진천애유락한
하늘 아래(天涯)를 떠도는 한(恨)을 깨끗이 씻어주니
須知佳茗似佳人 수지가명사가인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 같음을 모름지기 알아야하네
백안렴사가 주신 차(白廉使惠茶)
先生分我火前春 선생분아화전춘
선생이 나에게 주신 寒食 전의 봄차는
色味和香一一新 색미화향일일신
색과 맛 향그런 향기 모두 새롭네
篠盡天涯流落恨 소진천애유락한
온 세상을 떠도는 한 깨끗이 씻어 없애니
須知佳茗似佳人 수지가명사가인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 같음을 모름지게 알아야 하네.
活火淸泉手自煎 활화청천수자전
이는 불꽃에 맑은 물 손수 끓이니
香浮碧椀洗훈전 향부벽완세후전
청자다완에 향기 이르나 비린내나는 창자 씻어주네
嶺崖百萬蒼生命 영애백만창생명
가난하게 사는 백만 백성의 삶은
擬問蓬山刻位仙 의문봉산각위선
봉래산 여러 신선에 물어보고 싶네.
先 生 分 我 火 前 春 선 생 분 아 화 전 춘
色 味 和 香 一 一 新 색 미 화 향 일 일 신
篠 盡 天 涯 流 落 恨 소 진 천 애 유 락 한
須 知 佳 茗 似 佳 人 수 지 가 명 사 가 인
活 火 淸 泉 手 自 煎 활 화 청 천 수 자 전
香 浮 碧 梡 洗 훈 전 향 부 벽 완 세 훈 전
嶺 崖 百 萬 蒼 生 命 령 애 백 만 창 생 명
擬 問 蓬 山 刻 位 仙 의 문 봉 산 각 위 선
(七言律詩 仄起式 ‘眞’韻→新 人 ‘先’韻→煎 仙)
훈
선생이 나에게 주신 한식 전의 봄차는
색과 맛 향그런 향기 모두 새롭고
온 세상을 떠도는 恨 깨끗이 씻어 없애니
좋은 차는 美人과 같음을 모름지기 아네
이는 불꽃에 맑은 물 손수 끓이니
청자 다완에 향기 우러나고 비린내나는 창자 씻어주어
가난하게 사는 모든 백성 목숨은
봉래산 신선 자리에 새겨있는지 물어보고 싶네
(칠언율시 측기식 ‘진’운→신 인 ‘선’운→전 선)
火前春 ; 한식 즉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 4월 5-6일 쯤에 불을 피해 찬밥을 먹는데 불을 놓기전에 딴 차를 말한다.찬밥을 먹는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중국 의 古俗(고속)에 그 날은 風雨(풍우)가 심하므로 불을 금하기 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晉(진)나라의 현인 개자추(介子推)가 이 날 산에서 불에 타 죽었음으로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 날은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다는 설이 있다. 또 화전춘이라는 시구는 唐의 백거이(白居易)의 차시 즉 이육(李六)이 촉나라 햇차를 부쳐온데 대하여 사례하는 시에서 녹아차 열조각은 화전의 봄차(綠芽十片火前春)에서 인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락한(流落恨); 떠돌아 한 天涯; 하늘 끝 멀리 떨어진 타향
須; 모름지기 수 篠;가는 대 소 佳茗;아름다운 차 . 좋은 차
似;같을 사 佳人; 아름다운 사람. 미인.「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는 구절은 소동파의 햇차에 부치는 詩 에 佳茗似佳人 」
浮;뜰 부 壁;푸를 벽 椀;주발 완 훈; 매울 훈 전;비린내 전 嶺;산봉우리 령 崖;벼랑 애 百萬;모든 . 蒼生; 모든 백성을 뜻함. 蓬山(봉산); 봉래산을 말함 . 신선이 사는 산으로만 된 섬을 말함. 命;목숨 명 位;자리 위 刻; 새길 각
도은 이숭인의 바둑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은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삼은이란 고려 말기 성리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 이숭인을 말한다.
이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한 유학자로서 고려 말 정계에 나아가 활약했으며,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절개를 지켜 살아남은 사람들도 조선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후진을 양성하고 학통을 계승시켜 조선시대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도은 이숭인 대신 야은(野隱) 길재(吉再)를 넣어서 삼은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숭인은 경산부(京山府: 지금 경상도 성주)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 겸 ‘진덕박사’가 되었으며 고려에서 문사를 뽑아 중국 명나라에 보낼 때 그가 수석으로 뽑혔으나 아직 25세가 못되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중국에 보내지 않았다.
이숭인은 고려 말 여러 문인들과 함께 배불숭유의 입장을 지켰으며 대륙에서 원?명(元?明) 교체기에 그는 친명 정책을 주장했다. 우왕 때 그가 ‘전리총랑’으로 김구용,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했던 사실이 이를 설명해 준다. 당시 원나라가 비록 쇠약해 졌지만 고려 조정에는 아직도 원의 영향력이 커서 그는 이 사건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성균사성’을 거쳐 ‘밀직제학’이 되어 당시 ‘정당문학’이었던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그는 신흥국가 명나라의 문물제도를 볼 수 있었으며 한인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숭인과 이성계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대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박천상 사건’으로 무고를 당해 극형을 받게 됐을 때 그를 구해준 사람이 당시 시중이었던 이성계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성계를 추종하는 신진사류들이 이숭인 제거를 음모했고 계속 탄핵을 주장하여 그는 여러 차례 귀양을 갔다.
이성계가 새로 등극하기 직전인 1392년 이숭인은 정몽주 일당으로 몰려 다시 귀양을 갔고 그가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창업했다. 조선개국 후 당시 실권자였던 정도전이 도은의 인품과 학문을 시기하여 그의 심복 황거정을 시켜 도은를 배소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도은의 문장은 국내외에 이름이 높았다. 당시 명나라, 원나라와의 등거리 외교에서 복잡한 외교문서를 도은이 도맡아 작성했는데 명태조 주원장이 이숭인의 문장을 보고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도은의 유저로는 ‘도은선생시집’이 있으며 ‘해동악부’에 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기품이 높고 고상하다는 후인들의 평이다. 도은은 바둑을 좋아했고 잘 두었다고 한다. 그의 시집에 아래와 같은 바둑시 한수가 나온다.
觀人圍棋 관인위기
바둑을 구경하며
手談相對小窓間 수담상대소창간
작은 창문 아래서 마주앉아 바둑을 두네.
?雨蕭蕭映碧山 첨우소소영벽산 ? 처마첨, 갓모자
처마 끝에 쓸쓸히 비는 내리고 푸른 산이 비쳐오네.
勝負固應關一下 승부고응관일하
다음 한 수가 승부의 관건인데
機深却思十分閑 기심각사십분한
골똘히 생각하니 한가한 듯 하여라.
위의 도은 바둑시는 청구풍아(靑邱風雅)에도 나온다. 청구풍아는 조선조 성종 때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편집한 책인데 고려시대의 명시(名詩)만을 뽑아 비평과 주석(註釋)을 달았다. 김종직은 도은의 바둑시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였다.
“도은의 ‘관인위기시’에서 勝負부터 十分閑까지의 구절은 바둑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 없다(非深於九局圖者不能道比).”고 써 도은이 바둑에 고수였음을 인정했다.
寄寧州康使君 (기영주강사군)
爲州古所樂 위주고소락 영주는 옛날 내가 즐기던 곳
遠地向誰親 원지향수친 멀리 있어도 옛 정이 느껴져..
別久能無念 별구능무념 오래 떨어져 생각 못했으나
詩多似不貧 시다사불빈 지은 시들이 많이 있었네.
馳驅吾已倦 치구오이권 달려오느라 난 이미 피로하여
眠食子宜珍 면식자의진 침식(寢食)함이 내겐 마땅히 중한 일일세
何日龍山第 하일용산제 어느 날에 용산의 집에서 만나
相看白?巾 상간백첩건 서로 모습을 볼 수 있겠나...
모직물첩 ? 무명, 베
* 강사군(康使君); 천안의 수령으로 재임했던 강호문(康好文)을 말함.
* 영주(寧州); 고려 후기 천안의 한때 고명(故名)
* 백첩건(白疊+毛巾); 흰 헝겁으로 된 옛 유자(儒者)가 쓰던 건. 모자.
次韻寄康寧州
강영주시를 차운하여 보내다.
歲暮親朋少 세모친붕소 세밑에 친한 벗 찾는 이 적고
寥寥獨在家 요료독재가 쓸쓸히 혼자서 집에 있었네.
喜承書札到 희승서찰도 편지가 와서 기쁘게 받으며
驚問道途사 경문도도사 놀라 묻기를 왜 이리 더디었나?
紙樣人情薄 지양인정박 종잇장 같이 인정은 박한데
絲?世故加 사분세고가 실타래처럼 세상도 어지러워라
마루대분 ?
憐君得荒郡 연군득황군 그대의 고을 흉년들어 안타깝네만
予亦走京華 여역주경화 나 역시 서울에서 바쁜 몸이라네.
* 그 시절 천안에는 가뭄이 오고 흉년이 들어 세밑에 상당히 궁
핍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수령으로 있던 강호문이 개경(開京)에
있는 이숭인에게 도움을 청하니 그도 (전국이 다 흉년이었을 것
이므로..) 이를 도와 줄 수 없는 것을 탄식하며 이를 지은 것 같다
이 강호문이 애민(愛民)하여 많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기
록이 다른데서도 보이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憐君得荒郡‘이라
는 구절인데, 고래(古來)로 천안은 물이 부족하여 다른 곳보다
도 더 가뭄을 탔던 것 같다.
옛 문헌에 태조산(太祖山), 화산(華山), 수조산(水潮山), 용연(龍
淵)등에서 기우제를 지낸 글들이 남아 있고 지금도 물을 관장한
다는 용(龍)자 들어가는 지명이 수없이 많은 것도 그 연유가 아
닌가 생각한다.
개천사에서
淨土山多好 정토산다호 부처가 사는 산은 아름다워서
開天寺足徵 개천사족징 족히 개천사를 이룰 만 했네.
百尺臺臨水 백척대임수 백척 높은대 아래로 물이 흐르고
千年木臥藤 천년목와등 천년 묵은 듯 나무덩쿨 얽혀 있도다.
踵門無俗客 종문무속객 산문따라 속된 사람 찾아오지 않고
面壁有高僧 면벽유고승 참선하는 높은 스님 계실뿐이네.
君歸足暇日 군귀족가일 그대들 돌아가서 한가한때 되거든
一一訪吾曾 일일방오증 모두 거듭하여 날 찾아오게나..
感興 감흥
??天機運 미미천기운 쉬지 않는 것은 하늘의 운행
?? 힘쓸미
肅肅秋氣悲 숙숙추기비 쓸쓸한 가을 기운이 슬퍼진다.
飄飄西風來 표표서풍래 산들산들 서풍이 불어오니
??號枯枝 색색호고지 쏴쏴 마른 가지가 우는구나.
?? 털어낼색
悠悠遠行客 유유원행객 멀리 멀리 떠나간 나그네
一去無還期 일거무환기 한 번 가선 돌아올 기약 없구나.
妾身在空閨 첩신재공규 첩의 몸은 빈 방에 홀로 있어
日夜長相思 일야장상사 밤낮으로 길이 그리워합니다.
相思不可見 상사불가견 생각만 하고 보지는 못하니
惻愴終何爲 측창종하위 애닯게도 슬픔을 끝내 어찌하나
○
山北山南細路分 산북산남세로분
산속에 조그맣게 나 있는 오솔길
松花含雨亂紛紛 송화함우난분분
비 맞은 송화 가루는 어지러히 휘 날리며
道人汲井歸茅舍 도인급정귀모사
도인은 우물에서 물 긷고 띠집으로 돌아가고
一帶靑煙染白雲 일대청연염백운
한 가닥의 푸른 연기는 흰 구름을 물드리네
哀秋夕辭(애추석사)
忠君與愛國兮 충군여애국혜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함이여
志專專其靡他 지전전기미타 뜻은 오직 한 마음 딴마음 없도다
何時俗之險兮 하시속지험혜 어쩌자고 세상은 험악해만 가고
學曲而心阿 학곡이심아
학문은 비뚤어만 가고 마음은 아부만 하는가
彼讒諛之得志兮 피참유지득지혜
너희 아첨하는 무리들이 뜻을 얻음이여
自昔凶人國也 자석흉인국야 옛 부터 나라에 해를 끼쳤거니
萬死余無悔兮 만사여무회혜 비록 일만번 죽더라도 내 후회치 않으리니
恐此志不白也 공차지불백야 이 마음 변할까 두려워하네
竊不敢改余之初心兮 절불감개여지초심혜
내 가만 생각해 봄에 처음 뜻 고치지 못함이여
固長終乎窮 고장종호궁 참으로 궁색한 수렁에서 마치리
前余生之千古兮 전여생지천고혜 전생의 천고여
其在後者無窮 기재후자무궁 내 후생도 무궁하리
失余志之不廻兮 실여지지불회혜
화살 같은 내 뜻을 쏘아 돌이키지 못함이여
仰前修而飭躬 앙전수이칙궁
옛 사람의 닦음을 우러러 이 몸을 닦으리
世貿貿莫我知兮 세무무막아지혜 세상이 두려워 나를 몰라줌이여
庶憑辭以自通 서빙사이자통 노래나 읊어 스스로 위로하리
애추석사는 여러면에서 屈原(굴원)의 「漁夫辭(어부사)」와 「離騷經(이소경)」을 연상케 하는 글로 도은은 혼란한 사회속에서 참소를 입어 귀양길에 오르면서 가상의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결코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결연한 의지를 말하고 있다.
당시 부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고에 걸려 유배를 떠나면서
지은 자전적인 고백의 글로 오직 충군?애국하는 한마음으로 살아 왔는데 아첨하는 무리들에 의해 유배길에 오른 것이다. 일만번 죽더라도 내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는 궁색한 가운데 생을 마칠 각오를 하면서 "옛 사람의 닦음을 우러른다"고 했는데 이는 필경 굴원을 따르고자 하는 것으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생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성리학적인 대의명분과 충군?애국하는 정신, 강직한 성품이 역성혁명을 추구하는 세력들과는 또 다른 길을 걷게 했을 것으로 짐작케 한다.
송서구사지강릉성친(送徐九思之江陵省親)
客從京國出 객종경국출
객은 서울을 떠나서
遙向故園歸 요향고원귀
멀리 고향을 향해 돌아간다.
山水人居勝 산수인거승
산과 물은 사람 살기 좋고
樓臺暑氣微 루대서기미
누대는 무덥지 않다.
寂寥徐孺榻 적요서유탑 榻 걸상탑, 임금의자
서유의 의자 적막해도
文彩老萊衣 문채로래의 萊 명아주래, 묵은밭
노래자의 옷은 아름다우리라.
何日能相見 하일능상견
어느 날에야 서로 만나나
尋君夢遠飛 심군몽원비
그대 찾으니 꿈은 멀리 나라간다.
남악 총선사 방의 임선생 시를 차운하여 짓다
相逢久面目 상봉구면목 구면에 서로 만나니
妙契透機關 묘계투기관 묘한 인연 기관에 통했구나.
三業水俱淨 삼업수구정 세 가지 업은 물처럼 맑아지고
一生雲與閑 일생운여한 일생을 구름과 더불어 한가하다.
泉甘宜煮茗 천감의자명 달콤한 샘물은 차 다리기 좋고
煮 삶을자. 삶다. 茗 차싹명, 늦게 딴차.
日永好看山 일영호간산 해는 길어서 산 구경하기 좋구나.
慙愧靈師語 참괴령사어 부끄러워라, 훌륭한 대사님 말씀
休官便此還 휴관편차환 벼슬 버리고 이곳으로 돌아오라 하셨다
憶 三峯 삼봉을 생각하다.
不見鄭生久 불현정생구 그대 정생을 못 본지 오래 이거늘
秋風又颯然 추풍우사년 가을 바람 또 한번 소슬하구려.
新篇最堪誦 신편최감송 그대가 지은 최근 시는 읊을만하나
狂熊更誰憐 광웅갱수연 나의 미친 짓을 누가 어어삐 봐줄까. 웅
天地容吾輩 천지용오배 우리들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여
江湖臥數年 강호와수년 강호에 누워지낸 것이 수년이 되었네.
相思渺何恨 상사묘하한 아득한 그리움이 얼마나 한스러운가
極目斷鴻邊 극목단홍변 외 기러기 날아가는 먼 하늘 바라보네.
註) 平聲 仙韻으로 然?憐?年?邊 이다.
次如大虛九日韻 대허와 함께 구일운에 차하다.
山川形勝更淸秋 산천형승갱청추
病客無聊只臥遊 병객무료지와유
門外白衣誰解送 문외백의수해송
籬東黃菊不曾收 리동황국불증수
籬 울타리 리
三峯渺渺聳高秋 삼봉묘묘용고추 삼봉은 가을하늘 아득히 높이 솟아
峯頂騷人賦遠遊 봉정소인부원유 봉우리 꼭대기에 오른 이 원유를 부의 하네 騷 떠들소, 떠들다. 근심하다.
今日飄零猶故熊 금일표령유고웅 오늘 회오리바람과 비조차 예전과 같은데
皇天老眼幾時收 황천노안시시수 하나님의 어두운 눈은 언제나 밝아 지려나.
註)三峯曾吾也感時懷友自不能已矣 삼봉이 증오이다. 마침 시국에 느낀바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친구를 생각하다.
重九感懷 구월구일에 느낌이 있어서
去年重九龍山전 거년중구용산전 작년 구월구일에는 용산에 갔었지
坐客望若登神仙 좌객망약등신선 함께한 친구들 바라보노라니 신선이 하늘을 오르는 듯
達可放歌徹廖廓 달가방가철료곽 달가는 노래 불러 쓸쓸함을 달래고
敬之下筆橫雲烟 경지하필횡운연 경지가 붓을 돌리니 안개구름 피어나네
曾吾醉談聽下厭 증오취담청하염 증오의 취담 들어 싫지 않고
子虛詩句淸且姸 저러시구청차연 자허의 싯귀는 맑고 아름다웠네.
民望長身鸞鶴姿。민망장신란학자
落帽起舞何翩旋。락모기무하편선
顧余亦是淡蕩者。고여역시담탕자
痛飮不讓鯨吸川。통음불양경흡천
美人年紀才二八。미인년기재이팔
戴花細步踏華筵。대화세보답화연
戴 이대,머리에 이다. 느끼다
人生歡樂惜此日。인생환락석차일
月明滿地猶未還。월명만지유미환
今年重九在流落。금년중구재류락
忽憶往事如夢間。홀억왕사여몽간
數子飄零各異縣。수자표령각이현
尺書寂寞長懸懸。척서적막장현현
懸 매달현,
古城一丘足登覽。고성일구족등람
黃花一枝且芳鮮。황화일지차방선
田夫野?好看客。전부야수호간객 늙은이수
白酒不論靑銅錢。백주불론청동전
富貴貧賤終何有。부귀빈천종하유
?花泛酒卽頹然。철화범주즉퇴연 주을철
*민망(民望)은 염정수(廉廷秀)의 자(字)이다.
염정수는 이숭인의 누이의 남편인데 자형인지 매제인지 확인할 수 없다. 정몽주, 이색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숭인과는 아마도 열 살 이내의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至日有雪 無賀禮 獨坐懷曾吾
어느 날 하례는 없고 눈이 내려 홀로 앉아 증오를 그리워하며
寂寂閉關臥 적적페간와 적적하여 문을 잠그고 누우니
悠悠思舊情 유유사구정 유유히 옛 정이 그립구나
故人千里隔 고인천리격 그대는 천리밖에 멀리 있는데
時序一陽生 시서일양생 세월은 흘러도 날마다 해가 솟는구나.
宦路吾無策 환로오무책 나는 벼슬길에 아무런 묘책 없고
宦 벼슬환, 벼슬아치
詩壇子主盟 시단자주맹 시단에는 그대가 으뜸일세
縱然流落久 총연유락구 비록 유락함이 오래지만
聲價動公卿 성가동공경 그대의 올바른 목소리는 공경의 마음을 바루리라.
七日陽初復 칠일양초부
三冬學未成 삼동학미성
誰家梅?白 수가매예백 꽃술예, 초목이더부룩나는모양
觸處雪華明 촉처설화명
丘壑幽棲遠 구학유서원
乾坤淑氣生 건곤숙기생
憶曾談大極 억증담대극
促膝盡寒更 촉슬진한갱
憶 三峯隱者 은둔한 삼봉을 생각함
游宦十餘載 유환십여재
僑居遷次頻 교거천차빈
營生雖甚拙 영생수심졸
謀道未全貧 모도미전빈
落落負餘子 락락부여자
時時思故人 시시사고인
停雲終日在 정운종일재
?渺漢江濱 표묘한강빈
?옥색표, 옥색비단, 사물의 모양
雪夜 憶三峯呈諸友。 눈오는 밤 삼봉을 생각하며 여러 친구들에게 주다.
日暮寒雲勢漸癡 일모한운세점치
夜來密雪下如篩 야래밀설하여사
篩 체사, 체, 가루를치는 기구
紙窓燈火團?語 지창등화단란어 ? 둥굴란
只欠三峯隱者詩 지흠삼봉은자시
茶一封幷安和寺泉一甁呈三峯
차한봉지와 안화사 샘물 한병을 삼봉에게 드리다.
崧山巖?細泉榮 숭산암하세천영 송악산 바위틈에 가늘게 흐르는 샘물
?틈하, 틈, 갈라터지다.
知自松根結處生 지자송근결처생 솔뿌리 엉긴 곳에서 솟아난 것이라오.
紗帽籠頭淸晝永 사모롱두청주영 사모를 눌러 쓰고 앉아 한낮이 지루할 텐데
好從石?聽風聲 호종석요청풍성 돌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 들어 보세요. ? 은요, 족쇄, 화로
三峯曾吾也 感時懷友 自不能已。
삼봉이 증오이다. 마침 시국에 느낀바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친구를 생각하다.
松都最好一年秋 송도최호일년추
湧酒溪山勸客遊 용주계산권객유
想得風流三峴會 상득풍류삼현회
癸丑三月初六日有雪 呈三峯 계축 3월 초6일 눈이 와 삼봉에게 주다.
二月到三月 이월도삼월 이월이 가고 3월에
雨雪也頻頻 우설야빈빈 눈비가 내리다니,
未放重?解 미방중구해 ?갖옷구, 갖옷
仍須綠酒親 잉수록주친
乾坤且?? 건곤차분침 ? 기운분, 재앙 ? 요기침, 요기를 부르는기운
草木?精神 초목만정신 속일만
排悶新詩句 배민신시구
携將寄故人 휴장기고인
茶呈實周主事1 다정실주주사1
실주 주사에게 차를 올리다
海上鄕茶占早春 해상향다점조춘
筠籠采采露芽新 균롱채채로아신
題封寄與儀曹問 제봉기여의조문
內樣龍丹味孰眞 내양용단미숙진
바닷가 고을 차가 이른봄에 차지했는데,
바구니로 따고 따니 나온 잎이 새롭구나.
봉하여 부치고 의조에게 묻노니,
내전의 용단 맛과 어느 것이 진미일까요?
茶呈實周主事2
黃金?屑玉精靡 황금비설옥정미
屑가루설, 비눈펄펄내릴비, 눈이 조용히 내리는 모양,
靡 쓰러질미, 복종하다, 연루되다
不雜蘭膏也自奇 불잡난고야자기
橄欖細和玄酒淡 감람세화현주담
煩公作譜使人知 번공작보사인지
황금 빛 가루 날리는 옥색 정한 미음은
난초 향이 섞이지 않아도 절로 기이합니다.
감람나무 향을 맑은 물에 엷게 탄 맛이니,
번거롭지만 다보 지어 남들도 알게 합니다.
1. 옛 다인(茶人)들
여기서는 녹차를 즐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차와 관련한 간단한 역사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 가락국
대체로 우리나라 차의 시원을 말할 때는 가락국을 떠올립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신라 30대 법민왕이 서기 661년 영을 내려, 가락국 수로왕은 내 15대조가 되므로 비록 나라는 망했다 하나 사당은 남았으니 제전을 받들도록 하라 하며 수로왕의 17대손 경세급간으로 하여금 거등왕 당시와 같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 차와 과자 등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않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 씌여진 <김해지 토산조>와 이능화 님의 <조선불교통사>
등을 미루어봐도 이미 가락국에서 차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명해집니다.
둘,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기록은 없지만 중국의 <송고승전 구화산지(宋高僧傳 九華山志)>에, '당나라 영위 4년(서기 653년), 신라의 김지장이란 스님이
금지차(金地茶)와 볍씨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신라 흥덕왕 3년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차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확실한 기록으로서 매우 귀중한 사실이 되는 것이지요.
송고승전에서는, 스님의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교각으로
신라의 왕자였다고 전합니다.
김지장 스님은, 시 한 수를 남겼는데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시냇가 늪에 달을 불러 차 달이고(: 烹茗) 꽃은 꽂지 않으리
이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다시(茶詩)라 여길만한 것입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곳곳에 다인들이 등장합니다.
'찬기파랑가'를 쓴 충담사, '도솔가'를 쓴 월명사, 원효, 설총, 사선 (四仙 : 선인으로 불리운 네사람 곧, 영랑, 술랑, 남랑, 안상), 최치원, 지장법사, 보조국사 지눌, 진감국사, 무염국사, 신문왕의 왕자인 보천, 효명 등이 그들이지요.
신라의 다도는 화랑(花郞)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당시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합된 화랑의 정신은 심신일치!
그러니까 화랑들이 다도를 익힘으로써 다도에 의한 정신수양으로 나아갔고, 거기에서 차의 효능은 산천유람에 의한 육체단련에 유익하였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구체적인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고구려의 고분벽화 속에
각종 차그릇과 벽돌차가 그려져 있으며 덩이차도 발견되었다 합니다.
또 백제도 그 남아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일본에 귀화한 백제의 행기 스님(서기 668 - 749)이나 왕인 박사가 불교와 차와 글을 가르쳤다는
일본의 여타 기록(<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 등)으로 보면 백제의 차원 높은 차 문화를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셋, 고려시대
고려 500년은 한국차의 전성기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토산차의 개발은 물론 송나라 차의 수입도 활발했지요.
이처럼 차가 융성하게 된 배경은 당시의 불교에서 찾아집니다.
I장에서 말씀드린 전설 중에 달마의 눈꺼풀 얘기가 있지요?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는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로 일컬어집니다. 그 후 선종의 계보를 살피자면 많은 선사들이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고, 그 중 조주 종심이라는 선사는 차를 선의 세계로 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되겠지만,
이 선과 차의 융합은 다도의 핵심을 이루었던 것이기도 해요.
화두(話頭) 중에 '끽다거'라는 게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조주는 누가 절에 찾아와 불도(佛道)를 물으면, 항상 "끽다거(喫茶去 : 차 한잔 마시고 가게)" 라고 했답니다.
하루는 제자 중의 한사람이 묻기를,
"처음 절을 찾은 사람에게도 끽다거, 두번째 찾는 사람에게도 끽다거라 하시니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가만히 보고 있던 조주는 말했지요. "끽다거"
얼핏 언어의 희롱같기만 한 얘기지만 선가에서는 화두로 쓰입니다.
고려 때는 주로 덩이차(단차)와 가루차를 사용하였고,
공식적으로는 '뇌원차(腦原茶)'라는 명칭의 차가 있었습니다.
보르네오, 수마트라에서 전래된 용뇌(방향제의 일종)의 향기를
차에 배이게 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또한 고려 때에는 '다방(茶房)'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다방과는 달리, 당시엔 조정의 다례를 거행하고 왕의 행차시 다례를 올리는 것을 주임무로 했던 관청의 일종입니다.
부수적으로는 꽃과 과일, 약을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다례와 같은 찻일은 '차군사'에 의해서도 거행되었는데요,
차군사에는 찻물 끓일 화로를 지니고 다니는 행로군사(行爐軍士),
차와 다구 등 차짐을 메고 다니는 다담군사(茶擔軍士)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의 대명절인 봄철 연등회, 가을철 팔관회를 비롯하여 왕의 수행, 사신 맞이 등 각종 의례에도 차의식이 거행되었다지요.
그리고 이 때는 중국에서 들어온 납차, 용봉단차가 유통판매되었는데
간혹 가짜를 만들어 파는 장사꾼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사찰주변에는 '다소(茶所)'라고 하는 사찰에 차를 바치는 마을이 있었고, 민간에서도 '차점(茶店)'이라는 찻집이 있었습니다.
이상으로 고려시대에 이미 상당한 차문화가 이루어졌다 보여집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선과 차가 결합하여 다선일체의 사상으로 발전했고
차를 통해 무념무욕을 배우는 수신의 본보기로 삼게되었죠.
차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가의 수준을 재는 척도로서
양적으로는 찻집의 수를, 질적으로는 '투다'를 살펴본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그 투다가 있었습니다.
'투다(鬪茶 : 차 겨루기)'는 '명전(茗戰)'이라고도 하는데
차의 우열을 겨루는 풍습이지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모여 차, 물, 찻그릇
이 세가지의 우수성을 서로 겨루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승부는, 차의 산지를 알아 맞추는 것과
찻물 표면에 금이 갈라지는 현상이 빠르냐 늦냐로 이루어지지요.
고려 때의 뛰어난 다인으로 이규보를 들 수 있는데요,
스스로 차를 달이고 맛을 낼 줄 알았던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질화로에 불을 일어 스스로 차달이기를 시험한다
손수 꽃잔에 차를 따르니 그 색과 맛을 자랑하네 입에 대니 점점점 무르고도 부드러움이 마치 아이에게서 나는 젖내음 같아라
려말 충절로 이름 난 삼은(三隱 : 목은 이색,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을 비롯 혜감국사, 원감국사, 이숭인, 이인로, 이자현 등도 모두 다인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다인들이 많지만 익숙치 않은 이름일 것 같아서 그만 줄입니다.
넷, 조선 전기
조선에서는 숭유억불정책을 썼습니다.
사찰과 승려들에 대한 제한과 박해가 심해지는 만큼 불교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던 차문화도 많이 쇠퇴하게 되지요.
일반적으로 차 마시는 풍속은 많이 사라졌지만 궁중에서 또 사신접대시 여전히 다례가 행해졌고, 유교의 사례(四禮 : 冠, 婚, 喪, 祭)에도 차가 쓰였으며, 김종직, 김시습, 정회량, 서경덕, 신숙주, 이이, 서산대사, 하연, 사명대사, 이목 등 여러사람이 차에 대한 시들을 남기고 있어서
그들이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차는 기록에서 거의 사라집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이처럼 자취를 감추는 대신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차가 성행하게 되지요.
그 후 한국의 차문화에는 약 200년의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서 꼭 짚고가야할 게 있는데요, 그것은 다름아닌 고려, 조선에 걸쳐 차를 공납으로 바쳐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입니다.
이들을 '공다민(貢茶民)'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왕족과 귀족들이 차를 즐길 때 차가 자라는 땅에 태어났음을 아마 저주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 지리산 주변 차산지 농민들의 고통은 너무나 참혹했다 합니다.
(심지어 차세(茶稅)는 차가 나지 않는 땅의 백성에게도 부과되었습니다.)
이규보는 그들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쪽사람들은 일찍이 성난 짐승도 두려워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깊은 산속 덩굴을 헤맨다
일만 잎을 따야 떡차 한개를 만드니 그 한개 값이 천금으로도 바꾸기 어렵네...
관리들의 성화에 집집마다 아이, 노인이 몰려나온다
독기 서린 고개를 넘고 또 넘어 정신없이 차를 따고나면 차를 메고 어깨가 벗어져도 떠나야 하는 서울길 만리 이것이야말로 백성의 기름과 살이다
만사람을 저미고 베어 얻게되느니......
오죽했으면 차를 즐겼던 그조차 '백성의 기름과 살'이라는 한탄을 했을까요.
그는, "산야를 다 불질러 다공을 없애야만 남쪽사람이 비로소 숨을 쉴 것이니 먼저 이것부터 바로 잡으라" 고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했다합니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는, 남쪽 몇몇 고을의 귤과 유자를 얘기하면서 공납에 시달린 농민들이 귤과 유자나무를 말라죽게 하여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다는 실증을 보입니다.
혹 공다민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이 역시 우리 차의 쇠퇴를 불러온 이유 중의 하나겠지요.
즉 차의 산업화로써 생산지 농민의 생업을 도운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노동력만을 착취했으니, 공급이 줄어들고 따라서 차의 쇠퇴는 당연한 결과일 거란 말입니다.
다섯, 조선 후기
쇠퇴의 일로를 걷던 차문화는 하마터면 여기서 끊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맥을 잇고 오늘날까지 전해준 차의 중흥은
정약용의 강진 유배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었지요.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로 인하여 비로소 우리나라의 다도는 그 체계가 잡히게 됩니다.
정약용 님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산에 차를 키우며 스스로 '다산(茶山)'이라 호를 지었습니다.
유배생활 중 <동다기(東茶記)>(전하지는 않습니다)를 저술하였고, 역사상 우리나라 최초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으며, 특히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를 통해 길러낸 그의 제자들이 남긴 <다신계 절목(茶信契節目)>은 당시의 차 제조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라고 하지요.
어찌 보면 다산의 유배생활은 개인을 떠나 한국인으로서 보자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랄 수 있습니다.
<목민심서>, <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주역심전> 등등
그가 남긴 5백 8권 70여책의 거의 2/3 가 이 시기에 이뤄진 때문이죠.
다산, 그는 이윽고 차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
해남 두륜사의 촉망받던 학승 초의가 다산을 만난 건 그의 나이 24세, 다산의 나이 48세 때의 일입니다.
초의는 다산 초당을 왕래하면서 시와 유학 등의 학문을 배웠고, 두륜사 뒷산에 일지암을 세워 토산차를 가까이 하면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이론 및 실제의 뼈대를 갈무렸습니다.
그가 쓴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이 두 서적에는 차의 진수가 들어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지요.
비록, 당나라 육우의 <다경>과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만보전서>에서
차의 제법에 대한 부분을 가려모아 필사, 정서를 거친 것이긴 하지만
<동다송>에는 우리나라 토산차의 우수성을 예찬한 문장이 보입니다.
추사 김정희 님도 그가 마시던 승설차에서 이름을 따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 아호를 짓고 차를 즐겼지요.
그는 동갑인 초의 스님과 차를 통한 깊은 교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금석학(金石學 : 금석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에 밝았고 명필이었던 그는, '명선(茗禪)', '다삼매(茶三昧)'라는 유명한 글씨를 남깁니다.
'명'은 차의 다른 이름이요, '삼매'는 인도어로 'Samadhi'라고 하는
선의 무념무상?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곧 그는 차와 선을 동일시 했던 것이예요.
그는 그의 아우 김명희에게 보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차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하였다.
그것은 차가 군자의 성품과 같아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 남종화의 창시자,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삼절(三絶)이란 명성을 드날렸던 소치 허유. 그도 초의와 추사에게 화법과 글씨 그리고 차를 배웠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찻집이 흔히 있어 외국인들이 사 마셨다고 합니다.
고종의 주치의였던 독일 분쉬 박사의 글에 당시의 차값은 6전이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제시대, 이 땅의 다인의 맥은 흐려지고 맙니다.
여섯, 일제 시대
일본은 이미 무로마치(室町) 막부 시절에 무사들이
정책적으로 차를 장려하여 전쟁에 격한 국민감정을 순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차와 더불어 도자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조선의 많은 도공들을 잡아가기도 했었지요.
일제 시대에 이들은, 차나무로서 재원을 확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국책사업으로서 차 재배를 장려하였습니다.
연구 결과, 한국차의 풍습과 전래 및 분포에 대한 <조선의 차와 선(朝鮮の 茶と禪)>이라는 책까지 발간할 정도였지요.
이 시기에 일본 다도의 한국 유입과 함께
한국에는 다도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도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일본의 다도란 것이 아직까지 한국인들 중 '다도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차법에 대한 완고함과 독존적 사고방식을 이루고 있음이 적지않다는 것인데요...
그러다가 광복이 되면서 미군 진주와 함께 본격적인 커피 유입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오래지 않아 곧 이 나라 차문화의 주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 고종 때라 합니다.
한미수호조약으로 미 공사가 들어오면서 선물했던 것이지요.
당시엔 가배다로 칭했는데, 일제시대에는 고희라고 하다가
6.25 이후에 커피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곱, 현대
정부의 농특사업 지원으로 국내 몇몇 업자들이 일본인이 버리고 간 차밭을 손질하여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엔 기호도가 높은 홍차용 품종으로 베니호마래 종자를 도입했고, 70년대엔 녹차용 다수확 품종인 야부기다 종자를 도입했지요.
다원 조성 붐과 함께 차 생산이 전성기를 이루는 듯 할 즈음,
일부 업자들이 저질품을 생산했던 까닭에 한동안 외면받다가
1978년 이후 녹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이 녹차 판매에 진출하였고, 다시 녹차의 생산, 보급, 자료 수집이 활발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인으로는 최남선,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얼마 전의 응송 스님, 경봉 스님 그리고 지금의 수안 스님, 지허 스님도 차를 잘 아는 분들입니다.
두륜사 일지암은 차에 대해 일가(一家)를 이룰 정도의 인정을 받은 스님 만이 주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곳엔 여연 스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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